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4화 (5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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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분수대에 빠졌다고 사람이 죽지는 않는다. 다만, 이건 생명의 위협과는 결이 조금 다른 곤란함을 불러왔다.

일단 애써 지은 새 연미복이 젖어서 엉망이 되었고, 물을 한 움큼 먹은 탓에 코가 시큰거렸으며, 처지마저 아주 우스꽝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어제 도착한 옷이라 세탁할 필요는 없었는데요.”

내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뒷짐을 진 채로 나를 내려다보던 로렌츠가 대답했다.

“이런, 그랬나? 낡아 보여서 그만.”

그는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식으로 상대를 꼴사납게 하는 걸 상당히 즐기는 듯했다.

아마도 나를 곤란하게 만들어 보고 싶었던 것 같은데, 그 덕에 나는 그가 가장 신경 쓰는 게 무엇인지 알게 됐다. 이 남자의 악취미까지 알게 된 건 상당히 유감스럽지만…….

‘로렌츠는 카일의 약점을 찾고 있구나.’

그게 카일을 무너뜨리기 위함인지, 아니면 단순히 신경을 긁어 이 잔잔한 관계를 바꾸고 싶은 건지는 아직 구분할 수 없었다.

“제가 황자님께서 저를 분수대에 처박아 두고 즐거워하시더라는 소문을 퍼뜨리고 다니면 어쩌시려고 그럽니까.”

로렌츠가 태연하게 대꾸했다.

“이 황성의 주인과 이방인 중 누구의 말이 더 설득력 있을까?”

꽤 오만한 말이었다. 아무리 그가 국무의 대부분을 살피고 있다지만, 아직 황제가 버젓이 살아 있는데.

하긴, 그는 시간문제라고 생각하겠지. 혹은, 황제가 얼른 죽어서 이 귀찮은 알력 다툼에 종지부가 찍히기만을 기다리거나.

“어쨌든, 유감일세.”

[‘사실 별로 안 미안하고, 네 속은 좀 긁어야겠다.’]

나는 웃는 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눈치야 챘지만, 새삼 시스템으로 확인받으니 두 배로 열 받는다.

“잡아 줄까.”

얼씨구, 병 주고 약 주냐?

그렇게 제안한 주제에 로렌츠는 내게서 살짝 떨어진 채 팔을 곧게 내밀고 있었는데, 언제 장갑을 벗었는지 맨손이었다. 장갑에 물 한 방울 튀는 것조차 아깝다는 건지.

‘어휴.’

[ ̄へ ̄=3]

나와 시스템이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됐다, 야. 내가 손이 없냐, 발이 없냐.

“알아서 일어나겠습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하지만, 제가 워낙 의심이 많아서. 하하.”

[‘받을 게 없어서 네놈 도움을 받겠냐! 치워라!’]

……아주 틀린 건 아닌데, 어째 사감이 좀 들어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좌우로 털듯이 흔들었다. 눈에 물이 들어가서 시야가 흐리고 눈두덩이 시큰시큰했다. 묵직해진 몸을 애써 일으키니, 전신에서 후드득 물이 쏟아지기까지 했다.

“어으, 추워.”

아무리 수도의 봄이 빠르다지만 이제 겨우 초입에 불과했다. 찬물을 뒤집어쓴 탓에 절로 부르르 떨렸다.

“사람을 시켜 새 옷을 지어 보내라 이르겠네.”

물에 좀 담갔다고 옷을 버리냐. 돈이 많으니 정말 별짓을 다 하네. 카일도 제 갑옷을 몇 년씩 잘 손질해서 차고 다니는데.

“그것도 됐습니다. 말리면 그만인걸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으나 신경은 쓰였다. 어쨌든 카일이 일부러 지어 준 옷이니까. ‘불러오기’를 해제하기 전에 다른 사람에게 세탁이라도 부탁해 둘까.

물론, 옷이 좀 상한다고 해서 카일이 불편해할 위인은 아니다. 오히려 이깟 옷 몇 벌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나부터 걱정하겠지.

“거긴 추우니 얼른 이리 와라, 슈.”

그래. 분명히 그렇게 말할 거다. 속상해 죽겠다는 목소리로…….

……응?

“카일 전하?”

카일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내 상상 속의 표정 그대로.

‘뭐야. 왜 여기 있어?’

내가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사이, 카일이 성큼 다가와 내 팔 밑에 손을 넣어 번쩍 안아 들곤 분수대 밖으로 빼냈다.

내 옷뿐만이 아니라 그의 옷마저 물에 젖어 버렸는데도, 그는 내 안색만을 꼼꼼히 살폈다.

“괜찮나?”

“네, 뭐……. 분수에 빠진다고 사람이 죽는 건 아니잖습니까.”

카일의 손등이 다가와 내 뺨과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여기까지 급하게 온 건지, 그의 손에서 따뜻한 온기가 배어 나왔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카일이 나를 등 뒤에 숨기며 로렌츠에게 따져 물었다. 목을 긁고 나오는 고저 없는 음성은 으르렁거리는 것에 가까웠다.

“저를 도발하실 거라면 직접 하십시오. 애먼 사람을 끌어들이지 마시고.”

“애먼 사람이라니.”

로렌츠가 부드럽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저 격려의 의미로 어깨를 두드려 주었을 뿐이야. 그리 맥없이 떠밀릴 줄은 나도 미처 몰랐지.”

동시에 시스템의 친절한 번역이 다시 시작되었다.

[‘내가 이리 말했으면 적당히 그런 줄 알아라. 아니면, 네가 어쩔 테냐.’]

여전히 로렌츠에 대한 떨떠름한 마음이 묻어났지만, 물에 빠진 당사자로서 지극히 공감하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애석하군요. 로렌츠 형님의 눈에는 제가 아직도 풋내기 십 대 정도로 보이는 모양입니다.”

[‘내가 네 말에 속을 만큼 멍청하게 보이냐.’]

칼만 안 들었지, 전쟁이 따로 없네.

나는 어깨를 한차례 떨었다가 물었다.

“……그런데, 전하.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카일은 조금 분노한 목소리로 내 질문에 답했다.

“위에서 보고 있었다.”

“…….”

“테라스에서는 정원이 잘 내려다보여서. 네가 들어가는 것만 확인하고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대충 상황이 눈에 그려졌다. 카일은 내가 걱정되어서 지켜보았던 거고, 아마 로렌츠는 그런 시선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카일을 시험하기 위해 나를 적당히 밀어 보았다는 거구나.

“신기한 일이군.”

로렌츠의 목소리는 순수한 감탄으로 가득했다.

“친모를 모욕하는 말이 수십 마디씩 쏟아져도 눈썹 하나 꿈쩍 않던 바로 그 블레이크 대공작이, 동행인이 물에 빠졌다는 이유만으로 부리나케 내려올 줄은.”

카일은 혀를 찼다. 대꾸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는 듯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 그러더니 제 망토를 벗어 내게 둘러 주었다.

“저기, 이러면 망토도 젖는데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

하긴, 그냥 물에 젖은 것뿐인데.

할 말이 없어진 내가 가만히 올려다보고만 있자, 카일이 내게 눈을 맞춰 오며 물었다.

“대화는 끝났나?”

“네.”

“이제 돌아가도 되겠지.”

체면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지금은 자신과 함께해 달라는 말로 들렸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그가 내민 손 위에 내 손을 올려 맞잡았다.

“네. 아무래도 정원은 아주 자알 둘러본 것 같으니까요.”

나는 어깨 너머로 까딱, 고개를 숙이며 로렌츠에게 인사했다.

“분수 구경, 잘하고 갑니다.”

등 뒤에서 로렌츠의 웃는 소리가 들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귀찮은 놈이니 웬만하면 엮이지 말자.

이후, 나는 물을 뚝뚝 흘리면서 카일과 함께 별궁으로 향했다. 어색한 침묵이 잠깐 흐르기에, 나는 괜스레 웃으며 말했다.

“비싼 옷이 다 젖었네요, 죄송합니다.”

“옷이야 다시 지으면 그만이다. 이참에 몇 벌 더 지을까.”

로렌츠가 했던 말과 비슷했지만, 어조는 훨씬 더 따뜻했다.

옷 같은 건 버려도 된다는 뜻이라기보다 옷보다는 내가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들렸다. 옷 정도야 네게는 얼마든지 더 챙겨 주겠다는 뜻 같기도 했다.

이것 봐. 다정한 건 제가 다 하면서, 누가 누구더러 다정하다고.

“비싼 옷을 뭐하러 그렇게 많이 지어 둡니까? 두어 벌이면 돼요. 번거롭게.”

어차피 하루 중 네 시간만 인간이다. 그렇다고 햄스터 옷을 떠 달라는 건 아니고…….

아, 그 악몽 같은 딸기 무늬 스웨터가 생각나 버렸다. 이제는 반려 변태에 이어 딸기 스웨터 변태가 되게 생겼네.

“번거로울 게 뭐가 있나. 치수도 다 아는 마당에.”

카일이 낮게 웃으며 내 어깨를 감싼 팔에 힘을 살짝 주었다.

“잘 먹어서 그런가, 상의는 조금 더 넉넉하게 지어도 되겠군.”

“…….”

나는 카일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물이 튀어서 그런지, 머리카락이나 뺨이 묘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분명 어두웠던 것 같은데, 그의 곁에 있으니 새삼 환하게 느껴진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드러난 매끈한 이마에 내 시선이 날아가 닿았다.

‘……입 맞추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 미친 거겠지.’

미쳐도 정말 단단히 미친 거겠지.

“저 때문에 전하가 불리해지거나 위험해지지는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투덜거리듯이 내뱉은 말에 카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네가 안전하고 행복하면, 내가 그렇게 될 일도 없을 거다.”

“…….”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의 행복은 제법 비슷한 결을 따라 움직이는 것 같지 않나?”

우리의 행복은 그리 떨어져 있지 않다. 카일이 행복하면 나도 자연히 웃게 되고, 내가 웃는 모습을 보면 카일도 따라 웃게 된다.

북부가 위험해지면 서로 바쁘고, 함께 겨울을 난 게 뿌듯하고, 황자들이 얄밉게 굴면 짜증도 났다가 잘 빠져나온 상대를 보며 이렇게 실없이 웃고 마는 것.

“운명 공동체 같은 거네요.”

그랬었지. 네 삶에 그런 이름으로 내 존재가 각인되었었지. 그건 어쩌면, 내 삶에도 카일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각인되었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운명 공동체.”

카일이 내가 꺼낸 말을 입 안으로 가만히 읊조렸다. 그러다 무척 마음에 든 듯, 천천히 곱씹어 보더니 덧붙였다.

“좋은 어감이군.”

목소리는 낮고 울림이 강했다. 그 목소리를 색으로 표현하자면 한없이 검을 것이다. 다만 그것은 무척 부드럽고 다정해서, 초봄의 추위를 잊을 만큼은 되었다.

“…….”

나는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가 꾹 다물었다.

[(⊙ˍ⊙)]

“뭐라고 말하려고 했나?”

“아뇨, 그게…….”

“슈?”

“먼저 갑니다! 시간이 다 되어서! 푹 주무시고, 제 방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내일 전하 방으로 제가 먼저 찾아가겠습니다!”

“…….”

“그, 그럼 이만!”

나는 그를 재빨리 뿌리치고는 내 방으로 후다닥 뛰어 들어갔다.

쾅!

내 등 뒤에서 문이 거세게 닫혔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콱 막으며 허, 하고 헛숨을 삼켰다.

미친.

‘방금, 고백할 뻔했다…….’

감정 자각한 지 얼마나 됐다고!

그냥, 희미한 달빛 아래에서 빛나던 그 모습이 사람을 홀릴 것처럼 끌어당겨서. 누군가 긴 끈으로 나를 칭칭 감아 당기기라도 한 것처럼 속절없이 끌려가서…….

충동인가?

그래, 충동일 수도 있다. 감정이란 으레 빠르게 왔다가 빠르게 사라지기도 하니까. 잠깐 스쳐 지나가는 변덕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가슴이 뛰냐고…….”

덕분에 나는 문에 기댄 채, 심장 박동이 부디 잠잠해지기를 한참이나 기다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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