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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레 건네진 산책 제안은 뜬금없다 못해 괴상하게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황자의 손님이면 황성의 중요한 손님이기도 하니, 모자람 없이 챙겨 주고 싶어 그러네. 그간 한 번도 제 사람을 데려온 적이 없었거든. 그러다 보니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병상에 누운 황제를 대신하여 대부분의 국무를 처리하는 1황자의 제안이다. 거절하자니 명분이 없기도 하고, 사실 거절할 만한 이유를 느끼지도 못했다.
싸움의 시작은 적을 파악하는 것부터 시작한다.
비록 지금의 로렌츠는 카일의 적이 아니지만, 제 이익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돌아서거나 이용하고도 남을 인물이다. 블레이크 영지에 낡은 샹들리에를 보낸 것처럼.
벨리알과는 몇 번인가 부딪친 적이 있어서 적당히나마 성격을 예상할 수 있지만…… 로렌츠는 어떨까.
[겉으로 보기에는 평온하고, 태생에 비해 유약하고 소심합니다.]
그 이상의 정보는 없었다.
원작 <겨울의 심장>에서도 잘 조명되지 않은 캐릭터라는 뜻이다. 혹은, 후반부에서 조금 더 심도 있게 다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나는 중간에 하차해서 읽지 않은 부분이기도 하지만.
“저는…….”
잠시 머뭇거리던 내가 ‘금방 들어가 봐야 하긴 하지만, 괜찮으시면 그럴까요’ 따위의 대답을 하려던 때였다.
“슈.”
카일이 내 쪽에서 놓으려던 손을 도리어 꽉 잡아 왔다.
마치, 보내 주기 싫은 것처럼.
꼭 불안한 것처럼.
“오늘은 시간이 애매하고…….”
그건 카일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나는 달래듯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겹쳐 토닥였다. 흉터와 굳은살로 가득한 손은 간절할 정도로 내 손만을 꽉 쥐고 있었다.
“내일 산책합시다. 전하를 위해 네 시간이나 낼 수 있거든요. 엄청나지 않습니까?”
그 말에 부루퉁했던 카일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아마 무언가 얻어 오려는 내 판단을 최대한 존중하려고 노력 중인 거겠지.
“그간 매번 온갖 핑계를 대며 사라지더니, 꽤 파격적이군.”
“제가 이렇게나 전하를 생각한답니다. 감동적이죠? 자, 그러니까 손 놓으시고.”
카일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기색이었으나 결국 내 손을 놓았다. 저번부터 자꾸 그를 두고 가는 꼴이다. 조금 미안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를 위해서니까.
로렌츠는 흥미가 서린 눈길로 우리를 줄곧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카일에게서 멀어지자, 내게 손을 다시 내밀어 왔다.
“합의는 끝났나?”
“네, 보시다시피.”
“그럼, 가지.”
손바닥에 감겨 오는 얇은 가죽 장갑의 감촉이 조금 오싹했다.
“기다리마.”
카일이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로렌츠가 허튼짓이라도 할까 염려되어 일부러 건넨 말이겠지. 얼굴은 세상 무뚝뚝한 주제에, 은근히 세심하다니까.
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손을 휙휙 흔들었다. 웃는 얼굴을 보여 주는 건 좀 부끄러우니까, 내일 만나자는 뜻이었다.
*
“그대는 제법 독특해 보이더군.”
본궁 정원을 거닐던 로렌츠가 말했다. 궁의 배치나 꽃 종류를 설명하던 말이 잠시 끊어진 틈에 불쑥 나타난 사담이었다.
“그런가요.”
나는 별다른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이렇게 뻔한 소리를 하려고 데려온 거면 꽤 시시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대에게서 이질감을 느꼈다는 소리일세.”
그렇겠지.
우선 생긴 것부터가 상당히 다르다. 이국적인 생김새는 물론이고, 바로 그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가 데려온 유일한 동행인이니까.
그뿐인가? 벨리알과 내일 약혼할 센 랑드가 콕 찍어 초대한 사람이기도 하다. 일개 평민이자 마수학자에 불과한데도.
게다가 나는 이곳의 문화에 익숙하지 않았다. 매사 어색하고 새삼스럽게 구는 내 모습이 부자연스럽기도 할 거다.
“이질감…….”
나는 송이송이 피어난 꽃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래도 북부에서 올해 겨울을 났다고, 온난한 땅에서만 피어난 화려한 꽃들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내가 이 꽃을 어색하게 바라보는 것처럼 로렌츠도 나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찬 땅에서 살던 사람이라 그런가 보죠.”
로렌츠가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블레이크 대공작 역시 찬 땅에 사는 사람일세. 하지만, 그대와는 결이 달라.”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이놈의 귀족들은 자꾸만 말을 빙빙 돌려서 한단 말이야, 사람 속 터지게.
“뭐, 아는 게 없어서 그럴 수도 있고.”
아무래도 대학교를 졸업하긴 했지만, 여기서는 학력으로 인정이 안 될 테니까.
대충 좀 넘어가자는 내 뜻을 읽었을 텐데도 로렌츠는 여전히 집요했다.
“외국에서 왔나?”
이세계에서 왔다, 왜. 대한민국이라고 들어는 봤냐?
“그렇게 칩시다.”
“출신이 불분명하다는 뜻이군.”
어쨌든 건진 건 있다. 온화한 척하지만 속은 집요하다. 궁금증이 든 건 반드시 알아야 한다.
그러나, 로렌츠는 자신의 권위를 직접 사용하지는 않았다. 지금도 그렇다. 뒷짐을 진 채 내가 자신의 질문에 대답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황자라는 지위를 내세워 압박하면, 나로서는 카일의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대답할 텐데.
이런 류는 상당히 음험하고 위험하다. 아닌 척 상황을 단순히 관망하는 척하지만, 그건 자신의 이미지를 포장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이럴 때는…… 모르쇠 전법이 약이다.
“제가 기억이 불분명해서요.”
이것만큼 좋은 약이 없다. 모르겠다고 하고 넘어가는 게 얼마나 편한데.
사회생활 할 때 가장 많이 써먹었던 방법이기도 하다. 모르는 것도 모른다고 하고, 아는 것도 모른다고 하기. 그래야 인생이 편하다.
“기억도 없고, 갈 곳도 없는 저를 블레이크 영지에서 거둬 준 겁니다. 그래서 아는 것도 많지 않고, 좀 엉뚱한 구석이 있을 겁니다. 제가 혹시 무례하게 굴더라도 황자님께서 적당히 이해해 주십쇼. 워낙에 무지렁이인지라 카일 전하께서도 걱정이 많으십니다.”
내가 무식해서 그런 거니, 연대 책임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는 뜻이었다.
역시나 빙빙 돌리는 화법에 익숙한 로렌츠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 말을 썩 믿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넘어가 주겠다는 듯한 태도다.
“무언가 없는 이들이 많더군, 북부에는.”
“다 가진 사람이 굳이 그 차디찬 땅에서 살겠습니까. 노력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은 기름진 땅에 가서 떵떵거리며 살겠죠.”
누군가의 결핍을 그렇게 납작한 걸로 취급하지 말았으면 좋겠는데.
“안락하다고는 못하지만, 그래도 저는 꽤 좋아하거든요. 블레이크 영지도, 대공 전하도.”
이건 진심이었다.
나는 그곳이 꽤 좋았다.
당연한 것처럼 서로를 돕는 분위기도, 무서우면서도 알뜰살뜰한 대공작도. 제 터전을 짓밟는 마수에게는 가차 없으면서도 다친 짐승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그곳의 모든 분위기에 정이 들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바쳐 가며 만든 터전치고는 꽤 근사했다는 말을, 그 땅을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꼭 해 주고 싶을 만큼.
“흥미롭군.”
로렌츠가 읊조리듯이 말했다.
이제 나는 딱 도망가고 싶었다. 이만하면 됐으니 그만 들어가 보겠다고 할까.
“다 가진 분께서 뭘 새삼스럽게.”
“아, 북부 말고.”
“예?”
쏴아아.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어느새 정원을 한 바퀴 돌고 제자리에 돌아와 있었다. 만찬장으로 이어지는 작은 뜰에는 정교한 문양이 새겨진 분수대가 있었고, 거기서 파르스름하게 빛나는 물이 줄기줄기 뿜어져 나왔다.
“기억도 없다면서 그 척박한 땅에 잘도 정을 붙였군.”
“뭐가요.”
알아듣기 쉽게 얘기해 줬으면 좋겠다. 누가 귀족어 번역기 좀 만들어 줘라.
[‘북부는 하찮은 곳이다.’]
번역기 대신 시스템이 나섰다. 제법 그럴듯했다.
‘하긴. 황제가 되실 분에게는 하찮고 가난한 사람들처럼 보일 수도 있지.’
그러니까, 이놈이 못 써먹을 놈이라는 거다.
무릇 나라를 돌보려면 가장 먼저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부터 챙길 줄 알아야지. 어쩌다가 재수 좋아서 황제 아들로 태어난 것뿐인 주제에 뭐라도 다른 것처럼 굴다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좋은 곳이거든요. 아무래도 살기가 힘들어서 그런지, 나쁜 놈들은 초저녁에 다 얼어 죽었지 뭡니까.”
가로등 아래로 작은 날벌레가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쪽을 손짓하며 농담조로 말했다.
“여긴 너무 따뜻합니다. 날이 너무 풀리면 풀이 웃자라고 벌레가 많아지거든요.”
[‘너 같은 놈이 없어서 살 만하다.’]
아니, 내 말까지 해석하지는 말고…….
하지만 맞는 말이다. 번역기 성능 좋네.
[(❁´◡`❁)]
“단순히 과거만 잊은 모양이군. 예전에 나쁜 일이라도 있었던 건지.”
[‘머리가 나쁘지는 않은가 보군.’]
“얼마나 편합니까? 귀찮은 건 알아서 재깍재깍 잊어 주는 머리라니. 전 분명히 오래 살 겁니다, 황자님. 그러니까, 제가 가끔 바보처럼 똑같은 걸 또 물어도 너무 화내지 마세요.”
[‘쓸데없는 데이터는 그때그때 삭제하거든요. 너를 포함해서.’]
“하하, 아하하.”
별안간 로렌츠가 시원하게 웃어 젖혔다. ……뭘 웃고 있어? 웃지 마라. 그런다고 정 안 드니까.
“그래, 그래서 카일이 너를 총애하는군. 대공작의 특별한 사람이라…….”
기분 탓이었을까? 그의 이끼 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난 것 같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주춤,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주변을 가볍게 둘러본 로렌츠가 어깨를 으쓱하더니, 내게 한 걸음 다가왔다.
“어떨까.”
[‘지금부터 너를 시험할 것이다.’]
아니, 아니. 그 정도는 알아듣는다고. 그보다, 지금은 그런 해석이 중요한 게 아니잖아!
“너라면 내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왜 이러세요. 왜 가까이 오세요. 우리 말로 합시다.
로렌츠가 내게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근거리였다. 내가 땀을 삐질 흘리며 물러났지만, 로렌츠는 빙그레 웃으며 더 다가올 뿐이었다.
뭔데? 뭐야? 왜? 바라는 게 뭔데?
“네가, 카일 블레이크의 약점이 될 수 있을까.”
무어라 반응할 새도 없이 로렌츠의 팔이 내게 뻗어져 왔다. 툭, 어깨가 강하게 밀려 몸이 뒤로 휙 넘어갔다.
“어…….”
시야가 뒤집혔다. 홱 돌아갔을 때 어렴풋이 본 하늘은 별도 달도 뜨지 않아 온통 검었다. 그러더니 이내 새파란 물줄기가 내 눈앞에 쏟아지고…….
아, 설마.
[!∑( 口 ||]
나는 순식간에 떠밀려, 분수에 빠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