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2화 (52/129)

52

시간은 잘도 흘러, 약혼식 전날이 되었다.

그간 센과 벨리알은 약혼식 준비로 바빴고, 카일은 상단이나 용병단과 교류할 기회를 잡고자 성 안팎을 돌아다니곤 했다.

나는 시간이 되면 카일을 따라가기도 했고, 일정이 애매할 때는 적당히 드러누워서 맛있는 걸로 배를 채우며 인간으로서의 삶을 마음껏 즐겼다.

[퀘스트가 완료되었습니다!]

[보상 : 북부의 아군]

그리고 카일과 벨리알은 일시적으로나마 동맹을 맺었다.

‘의외로 벨리알과 말이 통했었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적당히 던져 보았는데, 벨리알이 의외로 순순히 그러자고 해서 조금 놀랐다. 아마 센이 따로 잘 말해 줬을 가능성이 크지만,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어쨌든 카일은 벨리알의 쪼잔한 괴롭힘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좋고, 벨리알은 로렌츠와 대립하는 데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

‘세레나가 될 수 없다는 건, 결국 벨리알이 황제가 되지 못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지만.’

그건 나중에 생각해야지. 지금은 내 코가 석 자고, 카일 블레이크 하나 살리기도 벅차다.

아니, 그보다도…….

‘포크와 나이프로 생선을 어떻게 발라 먹는 거냐고…….’

[<⊙)+++◁] 나는 손을 휘휘 내저어 얄미운 시스템 창을 치워 냈다. 작은 생선을 튀기듯이 구워 크림 소스를 끼얹은 요리가 내 앞에 떡하니 놓였는데, 문제는 이걸 통으로 튀겼다는 거다. 새로 맞춘 옷을 입고 만찬에 온 건 좋지만, 애석하게도 나는 귀족들의 테이블 매너에 약했다. 아니, 모른다고 보면 된다. 정말 기본적인 것만 겨우 아는 정도니까. 젓가락. 젓가락 있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3분 내로 가시란 가시는 전부 다 발라낼 자신 있는데. “슈.” 낮은 속삭임 덕에 귀가 간지러웠다. 내가 왼쪽으로 몸을 살짝 기울이자, 카일이 살짝 웃더니 자신의 접시와 내 접시를 바꿨다. 내 것과 똑같은 생선 요리였다. 차이점이 있다면, 내 앞으로 옮겨진 접시 위엔 깔끔하게 손질된 생선이 있다는 점이었다. “북부의 음식과 조금 달라서, 불편한 것이 많을 거다.” “……감사합니다.” 솔직히 이번에는 조금 감동이었다. 깔끔하게 발라낸 생선 살을 소스에 콕 찍어 입에 넣자, 입안에 부드러운 감칠맛이 퍼졌다. 그렇게 열심히 음식을 먹는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카일이 제법 제 사람을 챙길 줄 아는군.” 목소리는 상석에서 들려왔다. 긴 탁자의 중앙 끝을 차지한 남자가 나와 카일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리 살뜰한 모습은 처음 봐서 말이야. 하하.” “……과찬이십니다. 북부에서는 보기 힘든 귀한 음식인지라.” [로렌츠 세레나 마인하르트. 마인하르트 제국의 제1황자.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동복형제.] 시스템이 굳이 알려 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카일과 같은 흑색 머리칼과 벨리알과 얼핏 닮은 이목구비가 인상적이었다. 다만 전체적으로 이목구비가 흐려서인지 생기가 없어 보였는데, 거기에 입술이 얇아서 조금 비열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다. 아니, 단순히 비열하다기보다는……. [(¬︿̫̿¬)] 진짜 이상한 표정이다. 하지만, 어쩐지 이해는 됐다. 무해한 듯 웃는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서늘하고 섬뜩한 느낌이다. 아마 눈이 전혀 웃지 않아서 그런 것 같은데, 내내 이쪽을 훑는 시선이 꼭 사냥감의 급소를 찾는 맹수 같아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북부에서는 보기 힘든 음식이라…….” 건너편에서 우리의 대화를 들은 벨리알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가 싶더니 생선 요리를 재빨리 손질해 센의 접시와 바꾸었다. 술을 잘 못 마시는 그녀를 위해 다른 음료를 준비해 오라 이르는 모습도 제법 살뜰했다. 보는 눈이 많으니 일부러 그러는 건가 싶다가도, 서로를 힐끗거리며 의식하는 두 사람의 모습이 썩 나쁘지만은 않아 보여서 그저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센은 술을 잘 못 하는구나.’ 아쉽다. 이 좋은걸. 나는 서부 지방의 특산물로 만든 라즈베리 벌꿀 술을 마시겠냐는 귀족의 제안에 고개를 냉큼 끄덕였다. “좋죠. 저도 한 잔 주세요.” 기념할 만한 날이다 보니, 벌꿀 술이 외에 귀한 술들을 많이들 가져온 모양이다. 일종의 전통이라나? 심지어 카일조차도 북부에서 숙성시킨 독주를 한 병 챙겨 와 내밀기까지 했다. 길쭉한 유리잔에 찰랑거리는 금색 술은 보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일 정도로 달아 보였다. 코끝을 살짝 가져가 대 보니, 라즈베리 특유의 새콤한 향이 물씬 올라왔다. 맛있겠다. 독하려나? 뭐, 독해 봤자 얼마나 독하겠어. 카일이 적당히 수습해 줄 테니까, 오늘은 좀 취해 보자. “안 돼.” 그런데 카일이 별안간 내 손목을 쥐어 저지시켰다. 입술 끝에 닿으려던 술이 허망하게 멀어졌다. 왜, 뭔데. 왜. “잠시 기다려라.” 일단 그가 기다리라고 하면 기다리는 게 경험상 많은 도움이 됐다. 내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잔을 내리자, 그는 자신의 식기 옆에 놓여 있던 길쭉한 막대를 집어 들어, 내 술잔에 담갔다. 잘그랑, 맑은 소리와 함께 막대가 유리잔을 휘저었다. 이내 쑥 빠져나간 은빛 막대는 복잡한 문양을 수놓은 손수건 위에 가지런히 놓였다. 단순한 손짓이었는데도 절도가 넘쳤다. 그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던 나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독감별 막대로 음료에 독이 들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스템이 떠올려 준 내용을 읽고 나서 주변을 둘러보니, 다들 새로운 술을 마시기 전에 한 번씩 카일처럼 자신의 잔을 확인하고 있었다. 황자가 셋이나 있는 건 물론이고, 고위 귀족들만 모인 만찬인데 독이라니. 설마,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이 있으려고. 나는 달콤한 술로 목을 축이며 카일에게 작게 속삭였다. “……정말 이런 자리에서 독을 타는 사람이 있습니까? 황성 한복판에서, 그것도 이렇게 노골적으로요?” 그러자 카일이 웃을 듯 말 듯 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내 어머니께서는 세레나에게 바칠 꽃차에 독을 탔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쫓겨나셨다.” “그건 헛소문이잖아요.” 내가 인상을 찡그리자,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하지만 실제로 차에서는 독이 검출되었지.” “…….” 별로 새삼스럽지 않다는 말투에 나는 망연해지고 말았다. 언제 배신당할지 모르고, 또 언제 독을 마셔 죽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카일의 표정이 담담해서 더 쓸쓸해 보였다. 내가 심각한 표정으로 술잔을 노려보기만 하자, 그가 가만히 웃어 보였다. “괜찮다. 너는 안전하니까.” 금방이라도 내 머리를 쓰다듬을 것처럼 손이 움찔거렸으나, 만찬장의 사람들을 생각해서인지 실행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그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니지만…….” 이미 한 번 죽은 몸, 독 마시는 게 대수겠냐마는. 새삼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라는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그의 무뚝뚝한 껍질이 얼마나 모진 바람 속에서 만들어진 건지 알게 되어 신경 쓰였다. “어어, 잠깐만요. 전하도 제대로 확인하셔야죠. 그렇게 잠깐 넣었다 빼는 걸로 알겠습니까?” 내 술잔은 물론이고 물, 심지어는 새로 나온 음식마저도 꼼꼼히 확인하는 주제에 정작 제 음식은 적당히 확인한다. 술잔에 들어갔던 막대는 순식간에 빠져나갔고, 색의 변화를 눈대중으로만 대충 살피는 식이었다. 독을 타도 내 접시보다는 카일 접시에 탈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위기감이 없어!? “제 건 한참 넣어 보셨잖습니까?” “극독이 닿으면 막대가 검게 물드는데, 심한 경우에는 깨지기도 한다. 그 정도만 아니면 돼. 너는 약한 독만 먹어도 위험할 수 있으니까.” 그 말은 꼭 자신은 약한 독 정도는 먹어도 된다는 것처럼 들렸다. 내 시선이 너무 또렷하게 느껴졌는지, 카일이 덧붙였다. “황가의 자제들은 어렸을 때 독을 먹으며 내성을 쌓는 훈련을 한다. 웬만한 독으로는 죽지 않아.” 독약 먹고 안 죽으면 그만인가? 그래도 먹어서 좋을 건 없잖아.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그의 잔을 빼앗아서 내 앞에 있는 막대를 쑥 넣었다. 이후, 막대를 한참이나 노려보고 안전한 것을 확인한 뒤 돌려주니 카일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다정하군.” “당연한 겁니다.” “그러니 다정하다는 거다.” 평범한 칭찬일 텐데, 가슴 한구석이 간지러웠다.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끊임없이 나오는 음식이 지나고 나자, 오렌지 아이스크림을 얹은 케이크가 나왔다. 황성 음식은 화려한 음식만큼이나 맛도 훌륭했다. 케이크를 남김없이 먹는 내 모습을 보더니, 카일이 제 몫의 후식도 선뜻 내밀었다. “많이 먹어라.”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고, 잘 먹겠습니다. 그는 비스듬히 앉아 팔짱을 낀 채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먹지 않아도 배부르다는 그 눈빛은 내 앞에 놓인 후식보다도 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거 안 보이냐? 저쪽의 백작 부인은 자기가 헛것을 보는 건 아닌지 눈을 비비신다. “으음.” 음식은 맛있었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영 더부룩한 느낌이 났다. 역시, 케이크 두 조각은 무리였나? 윗배에 손을 얹은 채 고개를 기울이며 곰곰이 생각하자, 카일이 내 안색을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좀 걷다 들어갈까. 시간 괜찮나?” 그간 하도 시간 타령을 해서인지 이제는 내 일정부터 묻는다. 나는 시스템 창을 띄워 보았다. [앞으로 65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꽤 넉넉하다. 이 정도면 산책해도 괜찮겠다. 이곳은 북부에 비해 따뜻하고 꽃도 많이 피었던데, 구경해 볼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이 당연한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내 의자를 뒤로 빼 주려는 듯했다. “네, 뭐. 좋죠.” 그가 내게 손을 내밀며 웃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나도 모르게 작게 바람 새는 듯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럼, 지금 갈까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우리가 만찬장을 떠나려 할 때였다. “북부의 마수학자라고 했나?” 어느새 다가온 로렌츠가 내 앞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황성 구경은 잘했을지 모르겠군. 알지 모르겠지만, 딱 이즈음의 본궁 정원은 꽤 보기가 좋아. 그래서 안내를 해 줄까 하는데.” “…….” 흰 장갑을 낀 로렌츠의 손이 내게 내밀어졌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