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1화 (5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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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팔을 들고, 가만히 계시면 됩니다.”

나는 거울 앞에서 어정쩡하게 팔을 들어 올렸다. 딱 봐도 귀족들이나 오게 생긴 양장점에서 긴 줄자를 펼친 재봉사가 아까부터 내 어깨며 가슴, 허리를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몇 벌은 해야겠지.”

“한 벌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저번처럼 쏟아지는 물을 대신 맞기라도 하면 옷이 곤란하지 않겠나.”

“……쪼잔하게.”

“네가 나를 유치하게 만들지, 항상.”

한마디도 안 진다, 하여튼.

나는 퉁명스러운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다가 이제 다 되었다는 재봉사의 말에 팔을 내렸다.

곁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카일은 재봉사에게 부득불 두 벌의 연미복을 주문했다. 하나는 깔끔하고 단정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이었다.

“오. 지금 보니 이거, 치수는 다시 재지 않아도 될 뻔했군요.”

“네?”

“전에 카일 전하께서 주문하신 옷 치수와 비슷합니다. 혹시 몰라서 미리 만들어 둔 견본이 있는데, 거기서 수선할 부분이 거의 없어요.”

“아니…….”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눈대중으로 이렇게까지 딱 맞췄다고?

나는 의문스럽단 시선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고, 허공에 팔을 둘러 안는 시늉을 했다.

“허리는 이 정도. 어깨는 이쯤이었나.”

“…….”

나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그냥 다물어 버렸다. 귀 끝이 화끈거리는 것을 보니, 필시 얼굴도 제 색은 아닐 것이다.

요컨대, 그간 나한테 꼭 맞춘 듯 준비되었던 옷들이 다 카일이 직접…… 그러니까, 저렇게 재서 만든 거라고?

“누가 옷을 그렇게 주먹구구로 짓습니까!”

“하지만 정확했지 않나?”

“……말을 맙시다, 말을.”

나는 여전히 팔을 둘러 내 허리 사이즈를 가늠하는 카일의 손을 꾹 잡아 내렸다. 그러곤 목소리에 힘을 실어서 단단히 당부했다.

“앞으론 꼭! 반드시! 저랑 같이 와서 지으십쇼.”

“굳이…….”

“꼭!”

“……그래.”

이건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다. 그가 새로운 양장점에 갈 때마다 내 허리나 흉통을 저런 식으로 가늠해 본다는 것이 문제인 거다.

애초에 눈대중으로 이렇게까지 정확히 지었을 정도면…… 평소에 나를 얼마나 지켜본 거야?

나는 카일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양손으로 허공을 움켜잡는 시늉을 했다.

……음. 허리가 대충 이 정도였나?

[(¬‿¬)]

그런 표정 짓지 마라. 나도 알 수 있잖아.

나는 헛기침을 하고 양장점 바깥을 바라보았다. 축제 분위기로 들뜬 거리는 밝은 활기와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다만, 그 환희와 축복의 한가운데 선 황성은 곧 끊어질 듯한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심지에 불이 붙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곁으로 다가온 카일을 느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재봉사는 옷을 마무리하러 갔는지, 근처에 보이지 않았다.

묵혀 둔 말을 꺼내기에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그간 워낙 다난해서 도저히 틈이 나지 않았는데, 지금이라면 적당할 것 같았다.

하나, 듣는 귀가 있을지도 모르니 목소리는 자연히 작아졌다.

“그때 블레이크 영지에서 샹들리에가 떨어졌던 것 말입니다.”

“그래.”

고작 샹들리에만 말했는데도 그는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당시를 생각하는 듯 미미하게 미간도 좁혀져 있었다.

이미 다 아문 상처거늘, 그게 그렇게 못마땅한 건지.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배후가 클라인 공작가예요. 좀 캐 보니까, 마인하르트 제국에서 그 샹들리에를 만들 수 있는 유일한 기술자가 클라인 공작가에서 일하고 있다더라고요. 일부러 낡은 샹들리에를 보낸 겁니다. 벨리알 황자와 카일 전하의 사이를 나쁘게 하려고요.”

아니, 이왕이면 벨리알이 그 샹들리에를 맞고 죽기를 바랐겠지.

“그런가. 그쪽도 로렌츠의 짓이었나.”

“그쪽도…… 라면?”

“벨리알과 센을 습격한 의문의 병사들을 움직인 것도 로렌츠였다. 그쪽 기사단을 심문하니, 의외로 순순히 불더군. 일을 벌여 놓은 것치고는 인망은 두텁지 않은 모양이야.”

카일의 목소리는 일견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벨리알과 사이가 나쁘다 해도,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건 내키지 않는다는 반응이었다.

“그보다, 벨리알이 조용한 것이 의외군.”

“예?”

“내가 황성에 올 때마다 갖은 방법으로 괴롭히고는 했어. 이번에는 티파티 초대장을 보내는 것으로 그쳤으니, 많이 참은 거겠지.”

“아…….”

그간 사람을 얼마나 괴롭혔으면 저런 말이 나오냐.

나는 슬쩍 벨리알이 있는 황성을 눈으로 흘겼다. 그리고 이내 헛기침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아마 신경 쓸 겨를이 없을 거예요. 지금 벨리알 황자는 로렌츠 황자는 물론이고 외가에도 신경을 써야 하니까요. 클라인 공작가를 등에 업고 있는 이상, 로렌츠 황자도 무시할 게 못 되니까.”

“자신을 공격한 배후가 로렌츠라는 것을, 벨리알도 알고 있나?”

“네. 조사해 본 모양이더라고요.”

카일이 신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식 전에 사달이 생기고 말 것임을 그도 어렴풋이 예감한 모양이었다.

대책이 필요했다. 물론, 이 자리에서 전부 정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자는 듯 고개를 까딱했다.

“금방 되겠죠? 먼저 좀 나가서 걷겠습니다. 여긴 향수 냄새 때문에 영 머리가 아파요.”

“그래. 나가서 오른쪽으로 쭉 걸으면 된다.”

“네.”

고개를 끄덕이곤 양장점을 나왔다. 향긋하기보다 독하게 느껴질 만큼 짙던 향수 냄새가 가시니, 머릿속이 한결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제 어떻게 한다.’

찌뿌둥한 어깨를 한번 편 후, 카일의 말대로 오른쪽으로 난 길로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원작과 흐름이 제법 달라졌으니, 이젠 시스템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도 한정적일 거다. 물론 카일을 살릴 방법을 함께 찾아 주기는 할 테지만, 벨리알과 클라인의 싸움에서 어느 쪽의 손을 들어 줘야 좋을지는 아직 확신할 수 없었다.

‘물론, 둘 다 썩 내키진 않지만.’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걷고 있자니, 어느새 카일이 합류했다. 남다른 보폭으로 합류한 그는 높이 쌓은 상자를 한 손으로 거뜬히 들고 있었다.

“즐거워 보이시네요.”

“아무렴.”

그래, 네가 좋으면 됐다. 안 봐도 하트가 올라가는 것 같네.

나는 주변을 살피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제 지나다녔던 골목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아무래도 귀족들이 주로 오가는 곳이라서 더 말끔하고 화려하게 꾸민 모양이었다.

고급스러운 포석과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을 새긴 기둥 같은 것에 시선을 빼앗기는 동안, 어디선가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 블레이크 아냐?”

작지만 못 들을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의 근원지를 찾았다. 부채를 든 귀족 부인 서넛이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고 있었다.

“……허.”

척 봐도 좋은 이야길 나누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런 건 눈빛만 봐도 알지.

[( ̄へ ̄)!]

나는 귀부인들이 몸을 숨긴 골목으로 슬쩍 걸어가 보았다.

무슨 욕들을 그렇게나 열심히 하는지, 그들의 대화가 충분히 들릴 만큼 거리를 좁혔음에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어머, 그 하녀 소생 황자 말이죠?”

“그 하녀는 세레나께 독성이 있는 꽃을 바친 게 들통이 나서 쫓겨났고 말이야.”

“감히 일개 하녀가 공작 가문의 영애를 암살하려 했다고? 황후가 되실 분인데?”

“그런다고 자기가 세레나가 되리라 믿기라도 한 건지. 어휴…….”

“그런 천박한 하녀의 아들이야, 불 보듯 뻔해.”

“그럼, 그 어미에 그 자식이지. 독심을 품고 있을 거야. 천한 소생 주제에!”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하녀가 어쩌고 저째?

“이봐요.”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도무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카일이 참는다고 해도, 내가 안 된다. 내가 싫었다.

그는 누군가에게 이런 식으로 평가될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그가 하지 않은 일로 그를 판단하는 일만큼은 내가 용납하기 싫었다.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애써 잠재우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허리에 올린 채 한껏 비아냥댔다.

“배포들이 참 남다르신 모양입니다? 황성 근처에서 감히 대공작을 욕하시고. 아, 혹시 여기 대공작보다 직위가 높으신 분이 계신가요? 그래서 겁이 안 나는 건가? 보아하니 신분이 참 중요하신 분들인 모양인데, 어디 어떤 고강한 신분들이신지 제가 좀 들어 봐도 될까요?”

처음엔 인상을 구기며 무어라 쏘아붙이려던 귀부인들은 이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한껏 곤란한 기색으로 얼굴들을 가리는 꼴이 퍽 비겁해 보였다.

나는 내친김에 더 열을 내며 달려들었다.

“황제 폐하께서 바보도 아니고, 자기 아들 하나 못 알아봐서 황자로 삼으셨겠습니까? 남의 추문을 입에 올리면서 즐거워하면 부끄럽지도 않아요? 게다가, 하녀 출신이면 날 때부터 뭐가 모자라기라도 한답니까?”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냐. 신분제 따윈 초저녁에 졸업한 나라 출신이라서인지 저런 발언들을 들으니 더 황당했다.

말 몇 마디에 쫄아서 물러날 거면, 처음부터 남의 험담을 왜 하는 거야?

나는 씨근거리며 발을 더 앞으로 옮겼다. 그래. 얼마나 잘난 집안 사람들인지 들어 보자고. 황자보다 대단한 신분 있으면 나와 보라 그래. 어?

“잘난 이름 좀 알려 달라니까요? 왜 말들이…….”

“쉿.”

그때, 눈앞이 어두워졌다. 이내 따뜻한 손이 내 눈가를 덮는 것이 느껴졌다.

어느새 내 뒤에 다가와 선 카일이 내 이마와 눈가를 가린 채 속삭였다.

“괜찮다. 진정해.”

“…….”

언제 왔지.

기척도 없어서 몰랐다. 어쩌면 평범하게 왔는데, 내가 열을 내느라 전혀 몰랐던 건지도.

뒤로 살짝 기울어진 내 등이 그의 가슴팍에 닿았다. 쓸데없이 넓은 몸은 어딘가 다정하게마저 느껴졌다.

“이만 물러나도록.”

이 말은 아마 제 험담을 늘어놓던 이들에게 하는 말일 것이다.

귀부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줄행랑쳤다. 또각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아예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카일이 내 어깨를 부드럽게 잡아 저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전하는 화도 안 납니까? 남 일이라고 함부로 떠들잖아요.”

내가 입술을 내밀며 부루퉁하게 말했다.

“전하의 친모께서 하녀라서 뭐, 남에게 피해라도 줬습니까? 그래서 어디 어느 가문이 망하기라도 했대요? 비겁한 작자들.”

나는 울분을 토하며 인상을 구겼다.

내가 이렇게 열을 낸 건, 아마도.

‘야. 쟤네 엄마, 가정부라며?’

‘남의 집안일 도와주고 번 돈으로 말끔하게도 하고 다니네.’

나쁜 일을 해서 번 돈이 아닌데도 손가락질하는 건 너무 쉽다. 사람이라는 게, 흠잡는 걸 즐거워하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어서.

“하지도 않은 일로 비난하는 건, 소인배들이나 하는 짓이에요.”

카일이 선선히 웃으며 대답했다.

“익숙해. 괜찮다. 그러니, 감정 소모하지 마라.”

“이런 게 당연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요.”

이런 말 한마디에, 이런 적의에 당연해지기까지의 시간이 얼마나 쓰렸는지 감히 헤아릴 수도 없어서.

그러나 내가 무어라 덧붙이려던 순간, 그의 큰 손이 다시 다가와 내 정수리 부근에 닿았다. 카일이 내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네가 있으니 괜찮다.”

깜박이도 안 켜고 들어오는 카일의 말이 너무 낮고 따뜻해서.

그래서, 어쩐지 조금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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