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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49화 (49/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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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옷이 크네요.”

그것도 허리가 특히 남았다. 허리띠를 최대한 졸라맸는데도 묘하게 불편했다. 소매도 손등을 다 덮을 만큼 길었다.

내가 본래 입는 옷보다 두 치수는 큰 것 같다. 그래도 흘러내리지 않으니까 됐다. 방까지만 어떻게든 가고 나서 ‘불러오기’를 해제하면 되니까.

“미안하게 됐군. 최대한 네 체구에 맞게 가져오라 일렀는데, 내 눈대중보다 더 말랐을 줄은 몰랐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어떻게 눈대중으로 옷을 맞추겠냐. 특히 나는 체구보다 허리를 한두 치수씩 작게 입어야 딱 맞는 편인데.

“괜찮습니다, 이 정도면 입을 만해요. 상처에 거즈를 붙여 놔서, 딱 붙는 것보다는 큰 게 더 편하기도 하고요.”

맞춤형 옷도 아니고, 평소에 입던 옷이 잘 맞은 게 더 이상했…… 어? 그러고 보니 왜 잘 맞았지? 그동안 내가 입었던 옷들은 다 카일이 구해다 준 옷이었는데…….

“대공작이 꽤 살뜰하게도 보살피는 모양이군. 본래 아랫사람에게 그렇게 친절한 위인인가?”

벨리알이 빈정거리듯 물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보란 듯이 대꾸했다.

“예, 뭐. 찻물을 냅다 붓진 않으시죠.”

“그건 네가 알고 끼어든 것 아니었나.”

“그것도 맞고요.”

내가 건너편에 몸을 내리며 말했다.

“서로 묻고 싶은 게 좀 있는 것 같은데, 공평하게 하나씩 이야기해 주기 어때요? 솔직하게.”

“내가 왜 너와 공평한 문답 따위를 해야 하지? 나는 황자고, 너는 일개 하인인데.”

“하인이라뇨. 마수학자입니다. 공평한 문답이면 싸게 먹히는 것 아닐까요? 제 가려운 곳을 긁어만 주시면 뭐든지 턱턱 대답해 드린다는데.”

나는 너스레를 떨며 덧붙였다.

“잘 모르시나 본데요, 황자님. 이런 기회, 잘 안 옵니다? 당장이라도 제가 마음이 변해서 벌떡 일어나서 나가면, 아무것도 못 듣고 그냥 옷만 한 벌 준 사람 되는 거예요.”

벨리알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오만하게 대꾸했다.

“내가 널 묶어 둔다면?”

“뭐, 영지민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죽은 시늉도 하시는 블레이크 대공작과 전면 충돌하시는 거죠. 그걸 바라십니까?”

그건 지금의 벨리알에게 별로 좋은 판단은 아닐 것이다.

2황자라는 애매한 황위 계승 순서, 클라인 공작가의 압박, 센의 애매한 혈통에 이어 북부와의 대립까지 더해지면 그는 정말로 고립되고 만다.

벨리알은 혀를 짧게 찼다.

“쓸데없이 영리하군.”

“영리하면 쓸모가 좋은 거죠.”

“좋다. 그 공평한 문답인지 뭔지, 하도록 하지.”

미소를 거둔 벨리알의 얼굴에서는 온화함이라고는 한 조각도 찾아볼 수 없었다.

평소에 방긋방긋 웃을 때면 동화 속 왕자님처럼 생겼는데, 이렇게 보니 얼음으로 조각했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단, 내가 먼저 묻겠다.”

“그러세요. 뭐 그게 어려운 일이라고.”

조삼모사 아니냐? 네 맘대로 해라. 말마따나 그쪽은 황자고, 이쪽은 일개 마수…… 학자니까.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벨리알은 나를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는가 싶더니, 이내 첫 번째 질문을 건넸다.

“북부에서 나를 만났을 때, 너는 내게 대연회에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 그 말을 하기 위해 일면식도 없는 내게 달려들기까지 했지. 그랬던 이유가 뭐지?”

나는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다.

“샹들리에가 떨어질 것 같았거든요. 위험할 수 있으니까요. 고치라고 말했지만, 다들 다른 준비로 정신없어서 제 말을 제대로 들어 주지 않더라고요.”

“샹들리에가 떨어지면 나만 다치는 게 아니다. 하지만, 넌 굳이 나를 콕 찍어서 막으러 왔지. 그건…….”

나는 고개를 저어 그의 질문을 막았다.

“또 물어보시고 싶으신 거면 제 질문에 대답해 주셔야죠.”

벨리알은 못마땅한 듯 입매를 팽팽하게 당겼다. 하지만,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다.

“좋다. 궁금한 게 뭐지?”

“북부에서 황성으로 돌아가시는 길에 습격을 당하셨죠. 그로 인해 오른팔에 부상을 입으셨고요.”

“허, 기밀을 잘도 아는군. 대체 무슨 수로 그런 걸 낱낱이 아는 거지? 극소수의 이들만 아는 사실인데.”

“뭐……. 선심 써서 그 질문에도 대답해 드리자면, 다 아는 방법이 있습니다.”

낮말은 햄스터가 듣고 밤말도 햄스터가 듣는다, 왜. 이 햄스터는 모르는 게 없거든.

“어쨌든. 그 배후를 알아내셨습니까?”

벨리알이 차갑게 웃었다.

“의뭉스럽기 짝이 없군. 답을 다 알면서도 질문을 하다니.”

“확실히 하고 싶어서요.”

“그래. 클라인 공작 가문에서 고용한 놈들이었다.”

“전하를 죽이라는 명령을 받고 움직였다고요?”

그가 한쪽 입꼬리를 삐딱하게 올리며 대답했다.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라. 굳이 나를 지목해서 대연회에 가지 못하게 했던 이유.”

웬만하면 솔직하게 대답하려고 했는데……. 이건 어쩔 수 없이 좀 둘러대야겠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대답했다.

“봤어요.”

“봤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꿈에서 봤어요.”

꿈이나, 책이나. 상상 속에서 비롯되었다는 건 똑같으니까 적당히 묶어서 퉁치자.

“그렇게 사기꾼처럼 보지 마시고요. 이러니까 말 안 하려고 했던 건데……. 어쨌든, 가끔 예지몽을 꿔요. 그리고 몇 번인가 보았던 꿈의 내용이 현실에서 정말로 실현될 때가 있다는 걸 알아챈 거죠.”

“그래서, 꿈에서 내가 떨어지는 샹들리에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네. 혹시나 해서 샹들리에를 봤더니 정말 헐거운 거예요, 이음새가. 고치는 건 글렀으니까, 전하라도 안 오셨으면 해서 말한 거고요.”

“네게 나를 구할 의무 같은 건 없었을 텐데.”

“그렇긴 한데, 저희 영지에서 다치면 대공 전하가 곤란해지잖습니까? 그건 싫거든요.”

벨리알이 턱을 매만지며 생각하다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겨운 충심이군. 아니, 애정인가?”

“……애, 애정은 무슨!”

순간 말문이 막혀서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이제 황자님이 대답하실 차례입니다.”

“그래, 놈들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검을 들고 직접 나서서 싸우니 적잖이 당황하더군. 마치 내가 큰 부상을 입었을 거라고 예상했던 것처럼.”

“그 말은…….”

누군가 일부러 샹들리에를 고장 냈을 수도 있다는 뜻인가?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그토록 낡은 샹들리에를 굳이 쓸 이유가 있을까? 혹시, 그 물건을 어디서 선물 받았다던가…….

나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활짝 핀 장미 모양을 한 샹들리에는, 북부 대연회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았다.

“이봐.”

내가 샹들리에에 정신을 빼앗긴 사이, 벨리알이 질문했다.

“이번에도 꿈에서 보았나? 내가 그 여자에게 차를 쏟아부을 거라고.”

꿈 핑계를 자주 써먹는 건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다. 나는 적당히 둘러댔다. 솔직하게 대답해 주기로 했지만, 뭐. 어쩌겠어. 선의의 거짓말인 셈 치자.

“눈치로 알았습니다.”

곧장 내 질문이 이어졌다.

“전하, 장미 모양 샹들리에가 흔합니까?”

“아니. 마인하르트 제국에서 이 샹들리에를 만들 수 있는 기술자는 한 명뿐이다. 그리고 그는 클라인 공작가에서 일하고 있지.”

“그렇다면, 이 모양의 샹들리에는 클라인 공작가에서만 납품할 수 있다는 거네요?”

질문이 연이어 이어졌다. 벨리알은 그 사실을 지적하려다가, 내 목소리가 싸늘해진 걸 알아차리고는 그냥 대답해 주었다.

“……그래. 장미는 클라인 공작가의 상징물이다. 이 샹들리에는 다른 것보다 배는 무겁고 수명이 짧아. 하지만, 그 어떤 샹들리에보다도 밝고 화려하지.”

“북부의 샹들리에는 클라인 공작 가문에서 보낸 것이군요.”

그러니까 낡은 줄 알면서도 쓴 거다. 황실에서 보낸 거니, 대연회에서라도 써서 흠 잡힐 구석을 덜 만들려고.

벨리알의 설명대로라면 평소에는 수명이 약해서 다른 것으로 대체하거나 떼어 두었을 것이다. 망가져서 고치는 데 돈이 더 들 테고, 카일이라면 쓸모없는 사치품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설마……. 그 샹들리에를 이용해서 나를 해치려고 했다는 건가?”

“적어도 그게 언제 북부로 간 건지, 누가 보낸 건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지금 네 발언은 해석하기에 따라 클라인 공작 가문을 음해하려는 의도로 치부될 수 있다.”

“그래서, 절 고발하시려고요?”

내가 고개를 기울이며 씩 웃었다.

“팔을 그렇게 다치시고도?”

“…….”

벨리알이 으르렁거리듯이 말했다.

“원하는 게 뭐지? 마수학자.”

좋은 질문이었다.

내가 씩 웃으며 말했다.

“카일 블레이크 대공작을 괴롭히지 마세요. 어떤 방식으로든요. 압박하지도 마시고, 무안을 주지도 마세요.”

“그래서 내가 얻는 건 무엇이지?”

“적어도 북부를 적으로 돌리지는 않을 거라는 안정감? 혹시 모르죠. 또 이상한 예지몽을 꾸면, 제가 이렇게 나설 지도요. 이미 한 번은 구해 드렸고, 또 한 번은 막아 드리기까지 했죠.”

“…….”

“전하 성격대로 찻물을 냅다 부었으면, 지금쯤 그분이 뭐라고 떠들고 다녔겠어요?”

벨리알 측과 영원히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 하지만, 적어도 시급한 문제가 있는 양쪽이 쓸데없는 싸움으로 진을 뺄 필요는 없어지는 것이다. 당장 클라인 공작 가문을 적대해야 하는 벨리알의 입장에서는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될 테다.

벨리알의 눈이 가늘게 접혔다.

“흥미롭군. 마수학자로 두기로는 아까운 인재야.”

“그냥 마수학자로 두세요. 저, 생각보다 별것 아닙니다.”

그래. 하루 중 스무 시간을 햄스터로 사는 미물 중의 미물이시다. 햄스터 키울 자신 없으면 눈독 들이지 마라.

“황성에서 지낼 생각은 없나? 조건은 북부의 두 배로 치지.”

“스무 배를 치신다고 해도 안 됩니다.”

벨리알은 정말로 아쉬운 듯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왜? 정말 카일을 좋아하기라도 하나?”

왜 자꾸 염문으로 엮는 거야?

이대로라면 끝이 날 것 같지 않아서 내가 빽 소리쳤다.

“그래요, 좋아합니다! 됐습니까? 사랑해 마지않는 대공 전하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등판에 샹들리에 정도는 맞을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하하. 아하하, 푸훗, 하하하.”

“……뭘 웃습니까?”

내가 째려보자 벨리알이 아예 고개까지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됐다, 됐어. 네 말대로 하겠다. 보면 볼수록 신기하고 웃긴 사람이군.”

“뭔…….”

옷도 갈아입고 정보도 주워들었겠다, 더는 볼일이 없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가 블레이크를 일시적인 동맹으로 인식합니다!]

이쪽도 일단은 괜찮은 것 같고.

“전 그럼 갑니다.”

벨리알은 여전히 웃으며 손만 설레설레 흔들어 보였다. 나가도 된다는 소리였다.

나는 투덜거리며 방을 나섰다. 일단 카일이 걱정할 테니, 녀석한테 가 봐야겠지. 얼굴 한 번만 비추고 슬슬 들어가야겠다. 마침 ‘불러오기’ 시간도 거의 다 끝나 가니까…….

그러나 손님들이 머무르는 별궁에 들어선 내 눈에 들어온 건 카일이 아니라 센이었다.

센이 왜 여기에 있지?

“뭐야, 센?”

“슈!”

그리고 센이 내게 다가와 간절하게 외쳤다.

“캐슈넛이 없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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