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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48화 (48/129)

48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괜찮을 거예요. 벨리알 전하의 방은 정원에서 가깝거든요. 제가 의사도 불러 두었으니, 슈 치료도 확실히 할 거예요.”

“…….”

“그렇게 걱정되세요?”

평소엔 얼굴만 보아서는 기분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표정에 변화가 없는 대공작이 이렇게까지 동요할 줄은 몰랐다.

그의 곁에 앉은 센은 어색한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벨리알 전하는…… 빈말로라도 성격이 그리 좋은 분은 아니시지만, 그래도 한번 뱉은 말에는 책임을 지시는 분이에요.”

“그래.”

“그러니까 이제 저를 왜 데려오셨는지 말씀해 주세요, 전하.”

그제야 내내 반쯤 내리깔려 있던 카일의 눈이 센을 가만히 응시했다.

두 사람은 귀족들이 담소를 나눌 때 주로 사용하는 중앙 정원에 와 있었다. 벨리알이 슈를 데리고 간 이후, 무언가 고민하던 카일이 센을 불러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무릎 위에 올려 둔 두 손을 맞잡은 채, 카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벨리알.”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사랑하나?”

무표정한 남녀가 잠시간 시선을 교환했다.

센은 부정하지도, 긍정하지도, 심지어 되묻지도 않은 채 여전히 카일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마치 할 말이 없다는 듯, 혹은 거짓말하기도 싫고 솔직히 말하기도 싫어서 답을 대신할 만한 것을 기다리듯이.

“겨울에 그대를 보내 주었다. 그리고 겨우 봄이 되었을 뿐인데 약혼 소식이 들려오더군.”

“…….”

“누군가를 사랑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지.”

그녀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황족이 귀족과 정략결혼하는 건 흔한 일이에요, 전하. 전하께서도 아시다시피.”

“그래, 흔하지. 하지만 그대는 정략결혼을 위해 잃어버린 이름을 찾지 않았나?”

센의 얼굴에 얇게 어렸던 미소가 사라졌다. 그녀는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뇨, 전하. 순서가 바뀌었어요. 잃어버린 이름을 찾기 위해 정략결혼 한 거예요.”

“랑드 남작 가문의 복수를 위해?”

“……네. 벨리알 전하도 동의하셨어요. 각자의 복수를 위해 손을 잡았을 뿐이에요. 그게 이상한 일인가요?”

쏘아붙이듯이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센은 이내 자신이 짜증스럽게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조용히 덧붙였다.

“……죄송해요, 전하.”

“그래, 벨리알을 사랑하지 않는군.”

“그건 벨리알 전하도 마찬가지예요.”

“……그런가.”

카일은 센을 바라보았다.

느슨하게 땋아 내린 갈색 곱슬머리에는 황금으로 세공한 머리 장식이 달려 있었고, 입고 있는 새틴 드레스는 웬만한 평민의 몇 년치 식량과도 바꿀 수 없을 만큼 비싸 보였다.

이 황성에 와서는 값비싼 것만 걸치고, 맛있는 음식만 먹으며 지냈겠지. 전처럼 고된 일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무도 감히 그녀에게 명령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녀의 출신이 하인이든 아니든, 지금은 황자의 약혼녀다. 북부에서 지냈을 때보다 처지가 훨씬 좋아졌다는 뜻이다.

그러나, 센은 행복해 보이지 않았다.

항상 활달하고 생기 넘치던 표정은 음울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대화 중에도 몇 번씩 불안한 시선으로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가 한숨을 내쉬기도, 잘 정리된 손톱 끝으로 손등을 신경질적으로 긁기도 했다.

“랑드 남작 부인을 본 일이 있다.”

카일이 말했다. 여상한 어조였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았다.

센이 눈을 크게 떴다.

“……제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으시다고요?”

“그래. 그때 나는 너무 어려서, 그분이 랑드 남작 부인이라는 사실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알겠군. 왜 그대를 어디서 본 것 같았는지.”

센이 자신의 어머니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닮아서, 기억도 잘 나지 않았던 어린 시절의 그 은인을 무심코 떠올리게 할 만큼.

황성의 예절과 규칙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던 그에게 기꺼이 온정을 베풀고, 비를 피할 움막이 되어 주었던 사람.

쏟아지는 힐난 속에서도 끝까지 카일 블레이크를 제 자식처럼 생각했던 두 번째 어머니. 그것이 센의 어머니인 랑드 남작 부인이었다.

카일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남작 부인은 불행해 보였다. 마음에 없는 정략결혼이 싫다고 했지. 황제와 결혼하기 싫다는 그 말은 지나가는 말에 불과했지만, 기억에 오래도록 남았어.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황제를 사랑해도 불행할 거라고.”

“…….”

“내 어머니는 불행해 보였거든.”

카일이 담담하게 덧붙였다.

“세레나는 그런 자리다.”

“알아요.”

“아니, 그대는 모른다. 그 불행을 본 적 없으니까.”

“불행해져도 상관없어요. 복수할 수만 있다면.”

센이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클라인 공작 가문은 랑드 남작 가문을 멸문시켰어요. 터무니없는 핑계를 대서 저택에 불을 지르고, 제 양친을 죽게 했죠. 그 일로 저는 고아가 되어 길거리를 떠돌았고요. 하나뿐인 딸을 황후, 그러니까 ‘세레나’로 만들겠다는 이유 하나만으로요.”

“…….”

“알아요. 제 어머니께서는 세레나가 되지 않아서 오히려 행복해지셨고, 그렇기 때문에 제가 태어날 수 있었어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가족의 억울한 죽음이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잖아요!”

센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그녀는 한 어절씩 또박또박 끊어 말했다.

“대가를 치르게 할 거예요. 그건 전하가 선택한 길과는 다른 길이겠지요.”

“……그래.”

카일은 하려던 말을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복수가 전부가 아님을 전하고 싶었다. 복수한다고 해서 행복해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자신의 깨달음이다.

사람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행복의 기준 또한 다르다. 그리고 비록 행복해질 수 없는 걸 알면서도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그녀가 그렇게 하기를 선택했다면, 카일에게는 그런 센을 막을 자격이 없었다.

“그대의 어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 이 황성에서 나를 따듯하게 대해 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지.”

“…….”

“그게 얼마나 큰 은혜였는지는, 어떤 말로 표현해도 부족해.”

“……그랬군요.”

“나는 그대를 막을 수는 없지만.”

카일이 머뭇거리다가 이어 말했다.

“……적어도, 그대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센은 줄곧 카일을 보던 고개를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자꾸만 비어져 나오려는 눈물을 참는 듯, 억지로 감정을 눌러 담다가 이내 애써 웃어 보였다.

“그렇게 할게요. 그러니, 전하께서도 행복해지셨으면 좋겠어요.”

“센.”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어느새 씩씩한 미소를 지은 센이 카일에게 말했다.

“전하. 혹시, 이후의 일정은 어떻게 되시나요?”

“잠시 성 밖을 둘러보려고 했다. 알아보던 것이 있어서.”

“그럼 제가 그동안 캐슈넛과 놀아 주고 있어도 되나요?”

“그래. 편히 하도록. 그러고도 시간이 남거든, 슈를 살펴 주겠나?”

“많이 다쳤는지 걱정되셔서요?”

대답 대신 희미한 미소가 돌아왔다. 센이 콧잔등을 찡그리며 웃어 보였다.

“전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말하도록.”

“슈를 좋아하세요?”

*

센은 멀어지는 카일을 뒤로하고 그의 방으로 걸었다. 손에는 그에게 건네받은 캐슈넛의 간식 주머니를 쥔 채였다.

마지막으로 캐슈넛을 보았을 땐 살이 많이 쪄 있어서 그네를 선물해 주고 북부를 떠났었는데, 얼마 전 카일의 앞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캐슈넛은 확실히 그때보다 말라 있었다.

체중 조절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간식도 조금만 줘야 할 텐데.

하지만 그 작은 앞발로 호두를 쥐고, 열심히 갉아 먹는 모습을 보고서도 과연 입에서 그만이라는 말이 나올지 모르겠다. 슈처럼 식탐이 좋은 녀석이라, 분명 더 달라고 귀여운 투정을 부려 올 텐데.

센은 가벼운 걸음으로 카일의 방으로 들어섰다. 어두운 공간에 불을 밝히고, 하녀들을 시켜 준비한 햄스터 집을 열었는데…… 어쩐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응?”

잠금은 단단히 걸려 있었다. 일전에 캐슈넛이 햄스터 집에서 탈출한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그러지 못하도록 더 철저히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특히나 신경 써서 햄스터 집을 만들었다는 보고까지 들었는데, 그 조그마한 캐슈넛 혼자 집을 벗어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캐슈넛. 얘, 어디 있니?”

분명 말이 안 되는 일인데, 그 말이 안 되는 일이 센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센은 손을 깊숙이 넣어 톱밥을 헤집었다. 그네와 미끄럼틀, 숨집까지 살피고 밥그릇이나 물그릇도 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햄스터 집에서는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캐슈넛이 없었다.

햄스터 집, 어디에도.

센은 간식 주머니를 아무렇게나 놓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당장 카일에게 알려야 했다. 아니, 일단 벨리알에게 말해서 성의 문과 창문을 다 닫고 마법사를 불러 수색을…….

“마법사님!”

때마침 멀지 않은 곳에서 황성의 마법사가 보였다. 수도에서 제일 실력이 뛰어나다는 황실 직속 마법사였다.

성안에서는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빠르게 걷는 것도 전부 금지되어 있건만 지금은 그런 것쯤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센은 드레스 자락을 쥐고 서둘러 움직였다. 나중에 벌을 받더라도 지금은 한 생명이 더 간절하고 소중했다.

북부에 있던 그 잠깐 동안 정이 들었던 탓일까. 혹시라도 캐슈넛이 누군가의 발에 차여 다칠 것을 생각하면 심장이 섬뜩하고 등골이 오싹했다.

“뭐야, 센?”

그때, 반대쪽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센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슈!”

반가움과 초조함이 한꺼번에 밀려든다. 그러고 보니, 슈는 마수학자였지. 그렇다면 저보다 캐슈넛에 대해 더 잘 알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슈의 앞에 멈추어 섰다. 그리고 숨을 고를 틈도 없이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캐슈넛이 없어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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