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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는 재빨리 상황을 정리해 보았다.
연회에서 본 귀족들의 흐름은 양쪽으로 갈라져 있었다. 클라인 공작가와 로렌츠에게 호의적인 쪽, 그리고 벨리알과 센에게 호의적인 쪽.
이는 형제간의 다툼이 수면에 올라왔다는 뜻이다.
본래 벨리알은 형을 제치고 황위를 삼키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고, 원작인 <겨울의 심장>에서는 실제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니 센이 세레나가 되었던 거겠지.
하지만 원작에서 카일을 죽이고 황위에 오를 때까지 벨리알와 로렌츠는 크게 싸우지 않았다. 오히려 카일 블레이크를 제거하기 위해 힘을 모았으니까.
‘센이 변한 것처럼, 벨리알의 운명도 바뀐 건가?’
자신의 어머니와 원수 관계라는 것을 알면서도 센에게 이름을 찾아 준 벨리알, 그리고 이 미묘한 신경전. 카일을 두둔하지는 않지만 공격하지도 않았던 벨리알의 태도까지.
확실했다.
지금 벨리알과 로렌츠는 대립 중이다. 심약하고 비겁한 형의 머리 꼭대기 위에 앉아 실세 노릇을 하는 게 아니라, 실질적으로 로렌츠를 제거하려고 하는 것이다. 본래 눈엣가시로 여기던 카일의 존재까지 밀어 두고서.
벨리알이 그럴 이유는 하나뿐이다.
‘습격의 배후가 로렌츠구나.’
본디 카일에게 향했어야 했던 습격이 벨리알에게 향했다. 그로 인해 벨리알이 공격당했고, 분명히 그 배후를 추적했겠지.
그게 로렌츠가, 혹은 로렌츠의 끄나풀이 지시한 일이라는 사실을 벨리알이 알아챈 거다.
……진짜 막장 집안이 됐잖아. 황제가 되기 위해서 동생까지 죽이려고 드는 거야?
“어쨌든, 벨리알 황자님께서도 예전에 비해 체면을 많이 차리시지 않는 모양입니다. 제인 님께서 계셨을 때는 그렇게 카일 전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시더니, 이젠 하인 출신에 남작 가문의 이름까지 억지로 붙여 가면서…….”
“황자비로 만들겠지.”
마침 돌아온 벨리알이 서늘한 눈빛으로 여인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티파티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아쉽게 되었군. 내가 없는 사이에 적당히 울려서 쫓아내고 싶었을 텐데, 생각보다 빠르게 돌아와 버려서.”
“……베, 벨리알 전하.”
“하긴. 그대는 본래 그런 식이었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언제나 그 혓바닥으로 난도질해야만 직성이 풀렸다던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잖아요.”
“그렇지. 그리고 그대가 황자비가 될 이를 모욕했다는 사실 또한 틀린 게 아니겠고.”
나는 주변을 재빨리 둘러보았다.
도에 넘는 행동인데도 그녀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귀족들의 흐름이 로렌츠에게 많이 넘어갔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1황자고, 큰 이변이 없다면 황제가 될 인물이니까. 물론 훌륭한 재목은 아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황후의 총애를 받고 있기도 했다.
게다가 다들 눈치라는 게 있기 마련이다.
사람들은 벨리알의 약혼을 탐탁지 않게 보고 있었고, 로렌츠가 벨리알을 밀어내는 움직임을 보인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벨리알이 포섭한 몇몇 귀족이 아니고서는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다.
그때, 내내 침묵하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실로 오랜만의 퀘스트였다.
[적의 적은 아군이다! 적의 고립을 막고, 일시적인 동맹을 맺어 보세요!]
[보상 : 북부의 아군]
나는 벌떡 일어났다.
그런 내게 힌트를 주듯 시스템이 원작, <겨울의 심장> 내용을 읽어 주기 시작했다.
[벨리알은 자신의 약혼녀를 모욕한 여인의 머리 위에 차를 쏟아부었다. 지체 높은 귀족 영애의 머리와 드레스는 엉망이 되었고, 그 사실을 전해 들은 그녀의 아버지는 물론이고 클라인 공작마저도 불같이 화를 냈다.]
[하지만, 누구도 벨리알에 대해 나쁘게 말하지 못했다. 벨리알의 평판을 위해 클라인 공작 가문이 화가 난 것과는 별개로 침묵했기 때문이었다.]
두 번째 시스템 창의 글자가 흐릿하게 지워지기 시작했다. 운명이 바뀌었고, 그로 인해 변한 부분이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벨리알은 로렌츠와 적대하고 있다. 그렇다면 클라인 공작 가문에서도 원작과 달리, 벨리알의 평판을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원작의 흐름대로 벨리알이 저 여자에게 차를 쏟는다면, 클라인 공작가에서는 벨리알에 대해 나쁘게 떠들겠지.
막아야 한다.
막아서, 벨리알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우호적으로 돌린다면 적어도 북부의 일에 훼방은 놓지 않을 테니까!
“잠깐만요!”
나는 카일의 손을 뿌리친 뒤, 빛살처럼 달려들어 벨리알을 가로막았다.
내가 탁자를 빙 둘러 돌아가는 사이,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벨리알이 가까이에 있던 찻주전자를 쥐어 뿌리듯이 끼얹었고…….
“슈!”
카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찻물을 고스란히 맞은 내 정수리와 뺨, 어깨 부분에서 뜨끈한 김이 훅 피어올랐다.
뜨겁다. 덜 식은 차였구나.
“그만하세요, 벨리알 전하.”
“또 너군.”
벨리알의 녹색 눈동자가 분노로 타올랐다.
“내 약혼녀가 모욕당했다. 네가 끼어들 일이 아니야.”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벨리알의 오른팔은 어정쩡한 자세로 들려 있었다. 자세히 보니 불편한 듯 부들부들 떨리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뜨거운 물이 지나간 뺨을 소매로 아무렇게나 닦은 뒤, 그의 팔을 잡아 내렸다.
“아직 불편하실 텐데 무리하지 마시죠.”
그러자 벨리알의 눈이 더욱 차갑게 가라앉았다.
“나에 대해 잘 아는 듯한 태도군.”
부상을 숨겼던 모양이다. 하긴, 누가 돌변할지 모르는 이 막장 집안에서 약점을 드러내는 건 바보나 할 짓이니까.
하지만 나는 그게 습격 때 입은 부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카일의 운명이 벨리알에게 옮겨 가면서, 카일이 입었어야 할 상처 역시 벨리알에게 옮겨 간 것이다.
“뭐, 모르지는 않죠. 어쨌든 숙녀에게 찻물 끼얹는 짓을 해 봤자 나쁜 소문에만 휩싸일 거라고요.”
평소에 얼마나 아무렇게나 살았는지는 모르지만, 지금은 아니다. 클라인 공작 가문과 연결된 이들을 건드리면, 그들은 모든 힘을 동원해서 벨리알의 평판을 깎아내릴 것이다.
아직은 안 된다.
벨리알과 로렌츠, 둘 중 누가 진짜 카일의 적인지 알아내기 전에는 한쪽이 뒤처지거나 제거되어서는 안 된다.
“연회는 이만하죠.”
센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시방석에 앉은 듯 불편해하던 귀족들은 군말 없이 두 사람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자리를 떠났다.
내 뒤에 서 있던 여인이 감사 인사 하나 없이 도망쳐 버린 것도 그즈음의 일이었다.
“기껏 도와줬더니…….”
그래, 뭐. 남한테 고맙다는 인사를 꼬박꼬박할 정도로 예의가 있었으면 남들 다 모인 데서 센을 모욕하려고 들지도 않았겠지. 바랄 걸 바라자.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등을 돌렸다. 뜨거운 물에 젖은 옷은 달라붙어서 불편했고, 가벼운 화상을 입은 건지 어깨 근처가 따끔따끔했다.
얼른 카일에게 돌아가려던 차,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잡아당겼다.
“이봐.”
“…….”
벨리알이었다.
그가 나를 홱 당기며 물었다.
“날 위해서라고 했나?”
“그럼 제가 누군지도 모르는 분을 감싸겠습니까? 잊으셨나 본데, 저는 센이랑 친하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놔라. 너한테 감사 인사받을 시간에 돌아가서 옷이나 갈아입어야겠다.
“내가 차를 부을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끼어들었더군.”
그래, 그래. 알았다. 왜.
“샹들리에가 떨어질 때도 그랬지. 마치, 그게 떨어질 걸 미리 안 사람처럼…….”
내 팔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아니, 이 세계 남자들은 왜 이렇게 힘이 세? 놓고 하자고, 놓고.
“대화할 필요가 있겠군.”
벨리알이 다른 팔로 내 어깨를 콱 쥐었다.
“잠시 따라오도록. 사죄의 의미로 새 옷을 주겠다.”
퀘스트에서 말하는 일시적인 동맹이라는 게, 벨리알을 말하는 거겠지?
그렇다면 이야기를 나눠서 나쁠 건 없겠다. 그가 습격의 배후를 조사했다면, 로렌츠와 클라인 공작가의 최근 행적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알고 있을 테니까. 북부의 안녕을 위해서라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그렇게 생각한 내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슈.”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카일이 내 반대편 손을 쥐었다.
“그냥 두면 화상을 입는다. 얼른 가지.”
벨리알은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 반대편 팔을 더욱 바짝 당겼다. 휘청대느라 푹 꺾인 내 고개 위로 부드러우면서도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의 일행께 저지른 무례는 책임지고 보상하지요.”
“아니, 됐습니다. 내 일행은 내가 책임집니다.”
“사양하지 마시죠. 죄송해서 이러는 것이니.”
“죄송하면 그 팔 놓으십시오, 황자.”
둘 다 놔라. 이 망할 황자들아. 사람을 반으로 찢을 셈이냐.
[—(*>﹏<*)—] 둘 중 한 명을 선택해야 했다. 그것도 최대한 빨리. 젖은 옷에 닿는 피부가 한층 더 따끔거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저, 죄송하지만…….” 그때, 나는 보고 말았다. 벨리알의 녹색 눈동자가 꼭 카일을 닮아 있었다. 궁지에 몰린 짐승들이나 가질 법한 그 간절한 눈길을 마주하자, 속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카일의 운명이 벨리알에게 옮겨 간 거라면, 그렇다면 그도 고립된 현실에서 천천히 죽음을 향해 내달리게 되는 걸까. “……전하.” 나는 몸을 돌려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사뭇 간절하게마저 느껴지는 그의 시선에 마음이 흔들렸으나,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하려던 말을 끝맺었다. “벨리알 전하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오겠습니다.” “슈.” “잠깐이면 됩니다. 잠깐이면.” 벨리알을 구하고 싶은 건 아니다. 애당초 모든 사람을 구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이 아니면 벨리알과 독대할 만한 타이밍은 절대로 오지 않을 거다. “전하를 위해서입니다.” 카일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좁혔다. “벨리알 전하를 위해서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그거거든요, 지금은.” 카일이 소리 없이 입을 벙긋거렸다가 꾹 다물었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그만둔 모양이었다. 서운한 표정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그는 나를 더 막지 않았다. 카일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다녀오도록.” “…….” “가자마자 옷부터 갈아입어라.” 걱정 어린 목소리였다. 나는 찡그리듯이 웃어 보였다. “예,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