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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대의 새된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높직한 단상 위의 인형들에게 일제히 쏠렸다.
광대는 왕관을 쓰고, 망토를 두른 검은 머리 남자 인형을 번쩍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왕은 사실 왕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현명하지도, 용감하지도 않았으며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본인이 잘 알고 있었지요. 하지만 세상일은 자신이 바라는 대로만 되지는 않았고, 결국 왕은 나라를 다스리게 되었답니다.”
한 나라에서 가장 귀하고 부유한 사람이 되는 건데, 그게 왜 싫은 거냐며 아이들이 수군거렸다. 비록 가짜기는 해도 반짝이는 왕관과 고급스러워 보이는 털 망토가 멋있어 보였던 모양이다.
‘누구나 권력을 좋아하지.’
나는 씁쓸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힘에는 그에 따른 의무도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보다 많지 않은 게 현실이다.
광대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왕은 한 여인을 사랑했습니다. 그 여인만이 왕이 평생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평범함’을 선물해 줄 거라 믿었거든요. 하지만 평민 출신인 여인을 데려올 수 없어서, 왕은 여인을 하녀로 속여 성으로 데려왔답니다.”
순간, 서늘한 기분에 나는 팔뚝을 문질렀다.
마인하르트의 봄은 빠르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게 북부에 있었는데도 어쩐지 바람이 찬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왕에게는 이미 결혼하기로 한 왕비가 있었습니다.”
광대가 리본과 레이스를 치렁치렁하게 매단 인형을 반대편 손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다.
“왕비는 자신의 자리를 하녀에게 내주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지요. 그래서 이 하녀를 쫓아낼 궁리만을 하고 있었답니다. 하지만, 아무리 왕비라고 해도 어떻게 왕이 사랑하는 여자를 쫓아낼 수 있겠어요? 왕의 눈을 피해 하녀를 괴롭히는 게 고작이었지요.”
참 할 일도 없다. 왕을 사랑해서 왕비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닐 거잖아? 그런데 사랑까지 질투하다니.
가만, 이 소설에서도 정부 제도 같은 게 있나? 요즘 로맨스 판타지 소설에는 그런 거 많던데. 차라리 정부나 후궁으로 삼으면, 왕비 자리는 뺏기지 않을 거 아냐.
광대의 연기가 너무 실감 나기 때문일까? 어쩐지 꼭 실제로 있었던 일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팔뚝에 돋은 소름을 쓱쓱 문지르며 광대의 신들린 연기를 구경했다. 저 왜소한 몸으로 어떻게 저토록 여러 사람의 목소리를 흉내 낼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냥 막장 드라마 같은 건가?”
인형극을 보던 나는 중얼거렸다.
내용이라고 해 봤자 익숙한 듯 별반 특별할 게 없었다.
이후 왕비는 하녀를 괴롭히다 못해 왕에게 거짓말해서 둘 사이에 오해를 만들었고, 하녀의 아이가 왕의 아이가 아닐 거라는 모욕을 당한 그녀는 아이와 함께 비참하게 쫓겨나 생을 마감했다.
그러나 차가운 골목길에서 제 어머니와 죽을 뻔했던 그 갓난아기는 평민에게 우연히 발견되어 황궁으로 가게 되었다. 그 아기의 얼굴이 왕을 무척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제야 왕비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왕은, 악독한 왕비를 쫓아내기 위해 다른 여인을 데려왔습니다. 이번에는 평민이 아니라 귀족을요. 하지만 왕은 이용할 목적뿐이었던 그 귀족 여인조차도 자신의 첫 번째 평민 아내처럼 비참하게 죽이고 말았지요.”
드라마 같은 건 잘 안 보는 편이었는데, 왜 이렇게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지 모르겠다. 흔한 이야기인가? 아닌데. 그렇다기엔 엄청 자극적인데.
마치, 누가 작정하고 지어낸 이야기처럼…….
……잠깐.
작정하고 지어낸 이야기?
“그 귀족 여인은 딸을 낳았지만, 숨겼습니다. 하녀가 되어 쫓겨났던 그 여인의 아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답니다. 어차피 왕비를 이길 수 없다면, 최소한 제 아이에게 자유라도 주고 싶었던…….”
아.
그제야 나는 이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내내 으슬으슬하게마저 느껴지던 이 분위기의 이유를 깨닫고 말았다.
누군가가 작정하고 지어낸 이 이야기는 나한텐 익히 들었던 것이었고……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이야기에 그치지 않았다.
왜 몰랐을까.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전하.”
카일은 우뚝 선 채 인형극을 보고 있었다. 싸늘하게마저 느껴지는 단단한 무표정은 미동조차 없었다.
그건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삶이었다.
사랑받았으나 오해로 인해 버려진 힘 없는 어머니 밑에서 태어나, 억울하고 비참하게 자랐던 카일. 자라면 자랄수록 혈통을 의심할 수 없는 외모를 가지게 되었지만, 그 사실이 카일을 구해 주지는 않았다.
그건 카일이 모든 것을 등지고 차디찬 땅으로 쫓기듯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었다. 누군가가 쉽게 지은 것을 누군가는 그것을 평생 사무치게 겪어야만 했다.
“……전하.”
내 부름이 그에게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내리깔아 그의 손을 보았다. 카일은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하얗게 도드라진 뼈마디와 파르스름한 핏줄이 부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불쾌하고 모욕적이겠지.
자신의 삶이, 그 처절했던 시간이 누군가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해 버린다는 건…… 그렇게 애썼던 순간을 모조리 허상의 영역으로 내쫓는 것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나는 재차 그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손을 뻗어 떨리는 주먹을 가볍게 쥐었다. 딱딱하게 굳은 손은 피가 제대로 통하지 않아 차가웠다.
“슈.”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 내 존재감을 눈치챈 그가 숨을 느리게 뱉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를 악문 듯 목소리가 낮게 새어 나왔다.
“괜찮다는 말은 안 하셔도 됩니다.”
무어라 말하려던 그의 말을 가로막은 후, 내가 웃어 보였다.
“기분 전환하러 갈까요?”
“…….”
“이제 제가 좋아하는 음식 말고, 전하가 좋아하시는 음식으로 삽시다. 시장이 많으니까 음식도 여러 가지 있겠죠. 아니면, 물건을 살까요?”
나는 너스레를 떨며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받은 게 한두 개가 아니니 입 닦고 넘어가기도 무안한 참이었다. 기분도 안 좋아 보이는데, 이 정도쯤이야.
“가지고 싶은 거 있으시면 말씀하시죠. 뭐든지 다 사 드릴 테니까.”
당당하게 말하는 내 목소리에 카일의 목소리가 살짝 누그러졌다.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나는 보란 듯이 묵직한 주머니를 꺼내 보였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저, 돈 많거든요? 어디의 어느 대공작께서 용돈을 아주 두둑하게 챙겨 주신 덕에.”
카일은 인상을 찌푸리며 내가 들어 보인 주머니를 살폈다.
“돈을 거의 안 썼군.”
눈썰미 진짜 장난 아니네. 어떻게 들고 있는 모습만 봤는데도 돈을 얼마나 쓴 건지 아는 거야?
“마차를 타고 온 건 아닐 테고, 말을 빌렸어도 돈이 상당히 필요했을 텐데.”
“얻어 탔습니다!”
내가 재빨리 변명했다.
“좋으신 분들 만나서 돈도 아끼고, 외롭지 않게 말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왔습니다. 아무렴 귀한 돈인데 아껴 써야죠.”
너무 많이 알려고 들지 마라. 사람이 돈 한 푼 안 쓰고 며칠 거리를 하루 만에 뚝딱 올 수도 있지.
“귀한 돈인데, 내게는 써도 되는 건가?”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되물었다.
“카일 전하께 쓰는 돈을 왜 아낍니까?”
돈 준 사람한테 야박하게 굴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다, 인마. 나는 더 캐묻지 말라는 듯 얼른 그의 손을 잡아 복작복작한 가게 사이로 이끌었다.
“시간도 얼마 안 남았는데 이러지 마시고 보면서 얘기합시다, 보면서. 와. 저기 좀 보세요. 머리 장식인가? 번쩍번쩍하네. 저쪽은 천 파는 곳이고, 저긴 대장간…… 저쪽 거리는 북부랑 비슷하게 생겼네요. 사람 사는 곳은 다 비슷하다는 건가?”
하긴, 홍대나 이태원이나 압구정이나 외국인이 보기에는 다 그게 그거 같을 테니까.
어느새 그는 내게 보폭을 맞추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내가 이따금 좌판을 손가락질하거나 물건을 대어 보면, 고개를 젓거나 무어라 몇 마디 더하기도 했다.
나는 괜찮다며 만류하는 그의 손에 조그만 햄스터 인형 하나를 쥐여 주었다.
“햄스터 좋아하시잖습니까. 자, 머리맡에 놔두고 우울할 때 한 번씩 쓰다듬으세요.”
“나는 햄스터가 아니라, 캐슈넛을 좋아하는 거다.”
“캐슈넛이 햄스터잖아요.”
“다르다. 캐슈넛은 마수니까.”
그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그러면서도 손바닥만 한 햄스터 인형을 주머니에 넣었다. 말이랑 행동이 안 맞아떨어지시는데요.
“캐슈넛은 특별하다.”
그 말이 별안간 진지하게 들려서, 나는 문득 멈춰 선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캐슈넛은 다른 마수와 다르다고. 캐슈넛이니까 좋아하는 거라고.
‘……아, 웃었다.’
사뭇 부드러워진 카일의 얼굴에는 봄이 송이송이 내려앉은 듯 온화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나는 저도 모르게 넋 나간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웃는 건 반칙인데.
“가끔 보면, 그 녀석은 사람 같을 때가…….”
“가, 갑시다! 시간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나는 얼른 그의 손을 잡았다.
“또 뭐 있나? 기념품을 하나만 챙겨 드리면 제 면이 안 산다, 이 말입니다. 뭐 장신구 같은 건 없나? 그런 거 말이에요, 전하께서 저한테 사 주셨던…… 아, 행운의 마력 팔찌라던가. 안 팔려나?”
그러자 카일이 허공을 척 가리켰다.
“그걸 찾았나? 저기 있는데.”
“예?”
뭐가 있다고?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정말 있었다, 팔찌. 그것도 가죽끈에 푸른 보석을 매단 간단한 형태인데, 카일이 내게 준 것과 사뭇 비슷해 보였다.
요즘은 게르마늄 팔찌도 지점 내 가면서 파냐고.
<충격! 몸에 좋은 마력 흘러나옴!>
이것마저도 똑같았다.
“……이거라도 사 드릴까요?”
내가 팔찌를 살짝 들어 올리며 말하자, 카일이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아무 쓸모도 없는 것을 왜 사는 거지?”
“혹시 모르죠. 몸에 좋은 마력이 흘러나올지도.”
마침 옆에 서서 보석을 들여다보던 흰 머리의 남자가 즐거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마력이 담겨 있군그래.”
감미로우면서도 어딘가 서늘한 목소리였다. 마법사인가? 마력이 정말 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걸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뭐.’
나는 팔찌를 카일의 팔에 가볍게 채워 주었다.
“있어 봤자 뭐 얼마나 있겠냐마는, 그냥 부적 삼아 하나 가지고 계세요. 제 팔찌랑 비슷하잖습니까?”
“비슷한 건 보석뿐이다만…….”
물론, 전체적으로 내 팔찌가 더 비싸 보이기는 했다. 어쨌든! 그건 지금 바로 맞출 수가 없잖아.
“보석이라도 비슷하니 됐죠. 세트로 맞춘 것 같고 좋네요. 어때요?”
너무 시답잖은 거라 치우라고 할까? 하지만, 다른 건 뭘 사 줘야 할지 모르겠는데.
“네가 상술에 넘어가기도 하는군.”
“오늘만요, 변덕 삼아.”
“좋다.”
카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이걸로 하지.”
그는 그 팔찌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 한참이나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