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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나는 눈을 뜨자마자 ‘불러오기’ 한 뒤, 카일이 묵고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먼저 찾아온 건 나인데, 그는 마치 내가 오기만을 기다렸다는 태도로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겼다.
“나가지.”
아무래도 어제 상태가 썩 좋지 않았던 게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내 팔을 쥐어 잡아끌었다.
그러면서 한다는 말이…….
“맛있는 걸 먹여 주겠다.”
아니, 아무리 내가 밥은 먹고 다니자는 주의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맛있는 음식에 홀랑 넘어가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괜히 심술이 나서 뒤꿈치에 힘을 주고 버텼다.
“약혼을 기념해 축제가 열렸다더군. 아카시아꽃 튀김과 구운 감자가 유명하지.”
아니, 그러니까. 누가 먹을 것에…….
……근데, 아카시아꽃 튀김은 뭐지? 이름만 들어도 향긋하고 바삭바삭한 맛이 상상된다.
“양고기를 얹은 볶음면도 있고.”
아. 우동 면이면 맛있겠다.
“과일과 초콜릿으로 장식한 납작한 케이크와…….”
케이크도 팔아?
역시 수도는 다르다. 북부에는 약간 기름지게 튀긴 음식들 위주였는데. 하긴, 길거리에 카페 같은 게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라도 빵을 팔긴 팔아야겠지.
“오렌지를 직접 짜서…….”
“얼른 갑시다, 시간도 없는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고 했다. 그래!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절대로 입에 군침이 돌아서 따라가는 게 아니다. 절대로.
어차피 근처도 좀 돌아다니며 분위기 파악도 해야 하고, 나 없는 사이에 불안해했을 카일을 달래 주기도 해야 하니까…….
일단, 배 채우고 생각해 보자.
*
카일은 이 복잡한 골목을 마치 수십 번은 오간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걸어가며 나를 이끌었다.
한 손에는 아카시아꽃 튀김, 다른 손에는 구운 양고기가 큼직큼직하게 올라간 볶음면을 들고 나서야 나는 그가 나를 위해 이 시장 거리를 미리 살폈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래서 그렇게 구체적으로 말했던 거구나.’
얼핏 예상은 했지만, 새삼스레 실감하니 생각보다 감동적이었다.
[(❤´艸`❤)]
뭐, 왜. 그냥 밥 먹으러 다니는 거라고.
괜히 간질거리게 그런 표정 짓지 마라.
순간 이상한 오기가 생겨, 카일이 쥐여 주는 음식을 더욱 열심히 먹었다. 오로지 음식에만 정신이 팔린 사람처럼 튀김이며 꽈배기 모양 과자, 오렌지 주스와 사탕은 물론이고…….
“어라? 생크림…….”
나는 카일이 건넨 케이크를 먹다 말고 접시를 내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동그란 빵 위에 소복하게 올라간 크림을 응시했다.
포근하고 하얀 우유 크림에서는 내가 익히 기억하던 바로 그 맛이 났다. 시원하고 달콤한 맛이 입안을 기분 좋게 맴돌다가 스며들었다.
그래, 이게 생크림이지. 북부의 생크림은 시큼한 게, 생크림이라기보다는 사워크림에 더 가까웠다.
“이거예요, 생크림!”
내가 몸을 홱 돌리자 카일은 그런 내가 다른 사람들과 부딪치지 않도록 팔을 세워 보호해 주더니, 나를 한적한 곳으로 이끌었다.
“그래.”
“그래, 가 아니라. 이거 드셔 보세요. 맛이 다르다니까요?”
카일은 미심쩍은 표정으로 내가 내민 접시를 바라보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냄새 가지고 알겠냐, 크림인데. 직접 먹어 봐야 알지. 나는 혀를 차며 포크로 케이크를 듬뿍 뜬 뒤, 그의 입가에 갖다 댔다.
“얼른 먹어 보세요. 이게 진짜라고요.”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생크림을 받아먹었다. 그러곤 예상보다 단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너는 이런 걸 좋아하는 건가?”
“맛있잖아요.”
구름처럼 포근포근하고 달콤한 게 딱인데. 이 맛있는 걸 싫어하는 게 더 이상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케이크를 다시 먹기 시작하자, 카일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와 케이크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그래. 이걸 좋아한단 말이지.”
“네.”
“좋다.”
그러더니 세상에 더는 없을 근엄한 얼굴로, 우리에게서 몇 걸음 떨어져서 따라오던 병사들을 불렀다.
“예, 대공 전하!”
“부르셨습니까?”
“너희들은…….”
카일이 검을 고쳐 쥐며 케이크를 파는 가판대 앞으로 걸어갔다.
기사들이 진지한 얼굴로 카일의 뒤를 따랐고, 케이크를 먹던 나도 어영부영 그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영문 모르는 가게 주인만이 사시나무처럼 떨며 카일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이자를 모셔 가라.”
“저, 저기, 대공 전하. 제가 뭘 잘못했는지…… 그러니까, 말로 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지금 당장.”
“저…….”
카일이 진지하게 이어 말했다.
“가서 생크림 만드는 비법을 배워라.”
“……예?”
“북부로 데려간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군. 하지만 가족이 있을 수도 있으니, 그건 가게 주인의 뜻을 따르도록 해라.”
“예, 전하.”
“장사에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되니…….”
이어 카일은 검을 쥐지 않은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금화 몇 개를 내밀었다.
“이걸로 값을 치르지. 이 가판대에 올라온 모든 케이크를 사겠다.”
“저…….”
우물쭈물하는 가게 주인은 두려워해야 할지, 아니면 기뻐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카일과 나를 바라보았다.
……날 봤자 소용없는데. 난 그냥 생크림이 맛있다는 이야기만 했다고.
“정중하게 모셔라.”
“예, 전하!”
잠깐. 이거 혹시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요리법을 배워 가려는 건가?
나는 그 의중을 확인하듯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마침 그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기에 시선이 마주쳤다.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나?”
맞네.
이럴 때 보면 다정하다니까. 얼굴은 세상 무뚝뚝하게 생겨선.
“네, 좋아합니다.”
나는 그에게 씩 웃어 주고 앞으로 설렁설렁 걸어갔다.
자식, 귀엽게 구네. 나도 뭘 좀 챙겨 줘야 하나? 그러고 보니 시장에서 뭘 사 먹으면 대체로 내 손에만 들렸던 것 같다.
그나저나, 카일은 무슨 음식을 좋아하지?
이런 것도 원작에 있나? 뭘 좋아하는지 알면 같이 다닐 때도 좀 도움이 될 텐데. 이런 건 영 알아볼 생각을 못 했다.
‘야, 시스템. 카일은 뭘 좋아해? 아니면, 뭐…… 좋아하는 걸 볼 때 반응이 어떤지만 알아도 괜찮을 것 같은데.’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귀가 붉어집니다!]
귀가 붉어져? 좋아하는 걸 보면…….
“…….”
그 순간, 카일이 내게서 고개를 살짝 돌렸다. 뺨과 목덜미는 희었는데, 귀 끝이 미묘하게 붉어져 있었다.
설마, 날 보고 얼굴 빨개진 건가? 왜? 내가 뭘 했다고? 별말 안 했던 것 같은…….
아.
‘네, 좋아합니다.’
……정말?
상황과 맥락을 생각했을 때, 오해의 소지라고는 땅콩만큼도 없다.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정말 말도 안 되지.
……그래. 아는데. 말한 나도 알고, 들은 그도 분명 알 텐데.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카일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었고, 나는 애꿎은 신발을 바닥에 툭툭 두드려 댔다.
[현재 보유 현황 |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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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렇게 마주 서 있기만 하는데도 행복 수치가 눈처럼 쌓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며 충동적으로 입을 달싹였다. 그의 이름을 부르고 싶었다. 그래서 시선을 마주하고, 그 형태 없는 무언가를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용기가 순식간에 빠져나가 버려서 단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듯했다. 어색한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수 초간 다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을 때였다.
“곧 시작한대!”
“얼른 가자, 이러다 늦겠어.”
“테테는 처음 보는 거랬란 말이야. 빨리!”
먼발치에서 뛰어오던 아이들이 우리를 스치고 멀어졌다. 광장 쪽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아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어슬렁거리며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뭔가 대단한 구경거리라도 있는 건가?
그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을 계속 마주하기 어려워서, 나는 마치 도망치듯 때마침 찾아온 부산스러운 분위기로 주의를 돌렸다.
다행히 유일하게 남아 있던 수행 기사 한 명이 무슨 일 때문인지 설명해 주었다.
“벨리알 전하의 약혼식을 앞두고 서민 사이에서 인형극이 인기랍니다. 유명한 광대가 나와, 정교한 인형을 선보이며 연극을 한다더군요.”
“그래요?”
전에도 공연은 본 적이 없다. 본래 세상에서도 영화관 한번 갈 시간이 없어서, 매번 집에서 지난 영화나 뒤적거리다가 소파에 구겨져 자곤 했으니까.
“저희도 보러 갈까요?”
가벼운 제안이었다. 그 질문만으로도 정적이던 분위기가 사뭇 자연스러워졌다.
카일이 팔짱을 끼며 대꾸했다.
“오늘은 시간이 넉넉한 모양이지.”
“네, 뭐. 어쩌다 보니까.”
그는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어쩌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카일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지.”
꼭 에스코트라도 해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내가 불편한 구두나 드레스를 입은 것도 아니고, 주변에 예의범절을 따지는 귀족들이 가득한 것도 아닌데.
잠시 카일의 손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참으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어쩐지 앞으로도 그의 손을 잡을 일이 많을 것 같다는 예감. 그리고, 그것을 풀기는커녕 오히려 꽉 움켜쥐고 싶다는 생각.
“손 놓치시면 저, 길 잃습니다.”
엄살을 떨며 말하자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 하고 돌아오는 대답이 좋아서, 나는 그 손을 더 강하게 맞잡았다.
지금 그가 있는 이 풍경이 고생한 내게 돌아온 달콤한 보상이라는 생각을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