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42화 (4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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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딱 하루 정도만 참은 뒤, 그다음 날 아침에 수도에 고개를 내밀었다.

물론, ‘불러오기’ 하면서 집 안에 레플리카 햄스터를 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시스템에게 부탁해서 울음소리도 그럴듯하게 내도록 해 뒀으니까,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빨리 돌아가야겠지…….’

카일, 그 자식이 눈치가 좋아서 또 우리 마수가 이상하다느니 하며 수의사를 불러 댈지도 모른다. 대공작 앞에서 벌벌 떨 가련한 수의사를 위해서라도 최대한 짧고 빠르게 해결한 뒤, 돌아가야 했다.

“자, 그럼.”

황성 밖, 인적이 없는 수풀에 ‘불러오기’ 한 나는, 가장 먼저 시스템의 도움을 받아 캐스터네츠 상단의 위치를 알아냈다. 다행히 그렇게 멀지는 않아서, 곧장 가면 10분도 안 돼서 도착할 듯싶었다.

그러나, 진정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진짜, 지랄…….”

나는 눈매를 접어 은은히 웃었다.

어떻게 인생이 이렇게 꽉 막힌 하수구 같은지 모르겠다.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었대도 솔직히 이보단 기구하진 않을 거다.

[⁄(⁄ ⁄•⁄ω⁄•⁄ ⁄)⁄]

하…….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몇 번을 심호흡한 뒤에야 비로소 내 몰골을 내려다보았다.

한 땀 한 땀 손수 뜨느라 구멍이 나 있는 스웨터. 50미터 밖에서도 보일 것 같은 커다란 딸기 자수. 거기다, 황성의 따뜻한 바람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휑한 허벅다리까지.

금상첨화네, 금상첨화야.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내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소리 없이 포효했다.

이쯤 되면 햄스터로 있는 게 더 행복할 것 같다. 적어도, 스스로의 존엄성이 상처 입지는 않으니까!

“…….”

아닌가. 햄스터로 있는 게 더 존엄이 없나?

“……에휴.”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상황을 빠르게 인정하는 편이 좋았다. 해결해야 할 일이 몇 갠데, 여기서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으니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털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내 허리쯤 오는 담장과 소담하지만 아름다운 장미 화단을 낀 가정집이었다.

“평생 범법 행위 한 번 안 하고 산 사람인데, 내가…….”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그 집 담장에 바짝 붙었다. 그리고 까치발을 들어, 몇 번이나 휘적거린 끝에 겨우 빨랫줄에 널려 있던 반바지 하나를 잡아챘다.

바지만 좀 빌립시다, 바지만.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바지 바로 옆에 걸려 있는 셔츠에도 눈이 갔지만 꾹 참았다. 상단에만 도착하면 옷을 찾을 수 있을 테니까. 그럼 이 원수 같은 딸기 자수 스웨터와도 바로 이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 상단에 사람이 있어 봤자, 얼마나 있겠어?

*

“…….”

거지 같은 캐스터네츠 상단. 여기저기 지부를 두고 물건을 옮겨 준다고 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캐스터네츠 상단은 마인하르트 제국에서 네 번째로 큰 상단이며, 운송업으로는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합니다!]

나는 가슴팍을 퍽퍽 쳤다.

그렇게 중요한 건 미리 말했어야지, 미리! 그럼 셔츠까지 슬쩍했을 거 아냐! 기껏해야 접수하는 사람 두엇 정도나 있을 줄 알았는데!

“저기 봐…….”

“맨발에 딸기 무늬 스웨터야.”

“……진짜 특이하다.”

내가 특이한 게 아니라…….

아,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진짜!

마음 같아서는 이 딸기 자수를 박박 찢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아무것도 안 입은 진성 변태로 수도에 악명을 떨치게 될 것이다.

침착하자. 침착해야지.

“근데, 저 맨다리……. 설마, 바지를 안 입은 건가?”

인내심이 순식간에 바닥난 내가 소리쳤다.

“입었거든요?!”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구경났어? 따라오지 마! 수군거리지도 마! 그냥 나한테 관심을 꺼 달라고!

“……하아.”

낯선 사람들에게 변태 취급을 받는 것까지는 계획에 없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돈과 물건을 찾을 수 있었다.

정상적인 옷으로 갈아입은 나는 최대한 빠르게 황성으로 돌아갔다. 가지고 있는 돈이 한두 푼도 아니고, 잃어버리면 아깝잖아.

“어라, 슈. 벌써 왔어? 전하께서는 좀 더 걸릴 것 같다고 하셨는데…….”

황성에 들어서자마자 마침 정원을 거닐던 센과 마주쳤다. 운이 좋았던 셈이다.

나는 반가운 기색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동안 잘 지냈냐는 짧은 인사와 함께 가볍게 악수하려고 손을 맞잡던 순간이었다.

[밀린 기적 수치가 한꺼번에 정산됩니다!]

[인물, ‘세레나’가 삭제되었습니다.]

……뭐라고?

세레나가, 삭제돼?

내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럼 뭔데?

[원작에 없는 인물, ‘센’이 등장했습니다.]

[인물의 변화에 기여한 만큼, 기적 수치에 반영됩니다.]

내가 이 소설 속에 개입하게 됨으로써 겨울이 지나는 사이에 그녀의 운명이 바뀌긴 했다.

하지만 세레나가 삭제되었다니, 대체 무슨 뜻일까? 센은 황자인 벨리알과 약혼하게 되는데……. 설마, 원작과는 달리 이번에는 벨리알이 황제가 되지 않는다는 뜻인가?

혼란스러워하는 내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무자비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현재 기적 수치 31.0%]

[현재 기적 수치 34.5%]

[현재 기적 수치 37.0%]

[현재 기적 수치 39.2%]

“…….”

새파랗게 번쩍이는 그 빛에 조금 질려 버린 내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순식간에 올라간 기적 수치가 낯설게만 느껴졌다.

센의 운명이 바뀐 게, 센에게는 좋은 일일까? 이번에는 그녀가 카일을 죽이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걸까?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위협적일 정도로 푸른빛을 뿜어내는 시스템 창은 겹겹이 떠오르기만 할 뿐이었다.

[정보에 없는 인물입니다!]

[해당 인물의 이야기를 조회할 수 없습니다!]

이상한 말이었다.

애당초 이 이야기는 <겨울의 심장> 속의 내용이 내 등장과 행동으로 인해 재구성되는 거였다. 그런데, 아예 조회되지 않을 만큼 다른 사람이 되면, 어떻게 되는 거야?

‘세레나’는 황후를 칭하는 말이다.

그런데 방금, 이 이야기의 ‘세레나’가 사라졌다.

왜?

미래는 모르는 거잖아. 변할 수도 있는 거잖아. 마인하르트 제국의 황자는 세 명이다. 로렌츠, 벨리알, 그리고 카일.

카일이야 황위에 관심이 없다지만, 벨리알은 아니다. 아직 죽지도 않았고, 파혼한 것도 아닌데…… 왜 운명은 ‘세레나’를 없는 인물로 만든 거지?

“슈?”

센이 내게 팔을 뻗었다. 걱정 어린 그 표정에 나는 입술을 깨물며 뒤로 한 발 더 물러섰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대체 내가 없는 동안, 황성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지. 등장인물이 아니게 된 센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고?

센이 다가왔다. 나는 한 걸음 물러났다.

센이 다시 다가왔다. 나는 다시 한 걸음 물러났다.

“……잠깐만, 센. 미안해. 나는…….”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주춤거리며 물러나던 몸이 어딘가에 부딪혔다. 단단하면서도 따뜻했다. 머리 위에 드리운 그림자에 고개를 들자, 카일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슈.”

순식간에 시야가 돌아갔다. 그가 나의 어깨를 붙들고 저를 향해 몸을 돌린 것이다.

내 턱을 잡아 들어 올린 카일은 표정을 가만히 살피더니, 이내 반쯤 끌어안듯이 내 몸을 제게 바짝 붙였다.

“올 때 마차를 탔나?”

“……아뇨.”

적당히 말이나 당나귀를 타고 왔다고 둘러대야 할까 잠시 고민하는데, 카일은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적당한 핑계를 대기 위해 질문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 피곤하겠군.”

“……아. 하긴, 그렇겠어요. 중간에 따로 떨어져서 왔다고 했죠?”

센이 미안하다는 듯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미안, 슈.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우선 들어가서 좀 쉬자. 방은…….”

“내가 안내하지. 옆방이니까.”

“그러실래요?”

“음.”

나는 카일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단정하고 무뚝뚝한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는 여전히 내게 무엇도 묻지 않는다. 그저 내 표정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감싼 채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전하.”

“…….”

“……전하.”

“조금만.”

그가 내 걸음에 발을 맞춰 걸으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쪽 방이니까.”

수상한 점이 한두 개가 아니었을 텐데.

센에게 보여 주었던 부자연스러운 모습은 물론이고 마차도 타지 않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더 이르게 도착한 것, 말끔한 행색…….

그러나 카일은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는다. 지금 내 상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그 태도에 나는 조금 아연해지고 말았다.

덜컥.

문이 열리고, 우리 두 사람은 어둠 속으로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커튼이 쳐져 있어 가구의 윤곽만을 겨우 확인할 수 있었다.

“피곤해서 그런 거겠지.”

카일이 내 정수리에 턱을 대고 허리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한숨 자고 일어나면 나을 거다. 잠들 때까지 곁에 있으마.”

수상하지 않아서 그러는 게 아니다. 묻고 싶은 거야 정말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묻지 않는 건, 지금은 아직 그럴 때가 아니라고 여긴 까닭이리라.

“저는 괜…….”

카일이 낮게 웃으며 내 목소리를 잘랐다.

“별로 괜찮아 보이지는 않는데.”

“…….”

“피곤해서 그런 거다.”

카일은 그 핑계로 뭐든 속아 줄 생각인 거다. 적어도, 오늘만큼은.

“맞아요.”

결국,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피곤해서 그랬어요. 한숨 자면 낫겠죠.”

고개를 조금 돌리자, 허공에 뜬 시스템 창이 보였다.

‘불러오기’ 시간은 이제 10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카일의 품에서 벗어나, 순순히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그를 향해 말했다.

“걱정 마시고, 돌아가세요.”

“잠드는 것까지 보고.”

“…….”

나는 얼른 눈을 꾹 감았다. 정말 잠이 드는 것까지 확인할 기세라, 결국 자는 척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어색한데, 그가 이것마저 속아 줄지는 모르겠지만…….

침대맡으로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한 자리에 멈춘 카일은 내 이마를 조심스럽게 쓸어 주고선 입술이 닿을 만큼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닿을 것 같았던 입술은 닿지 않았다. 천천히 멀어진 그의 손이 내 이불을 조금 더 당겨 주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와 함께 멀어졌다.

“좋은 꿈 꿔라.”

문이 닫히고, 방 안이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나는 손을 올려 그의 손가락이, 그리고 숨이 닿았던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뜨겁다.”

그래. 뜨거웠다.

꼭, 그가 내게 열기를 옮겨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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