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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 도착하자마자 한 상단에 들러 물건과 돈을 잘 포장해, 황성 근처로 보내게 했다.
웃돈을 얹어서라도 상단 일꾼이 나를 찾아오게끔 하고 싶었지만, 그러다가 카일과 마주치기라도 하면 너무 피곤해지니까. 차선책을 선택한 것이다.
[캐스터네츠 상단은 각 지점으로 물건을 옮기는 일을 도맡고 있습니다. 원하는 지점에서 물건을 찾아가 보세요!]
시스템의 안내 덕에 카일이 애써 챙겨 준 돈을 잃지 않아도 됐다. 척 봐도 한두 푼이 아닌 것 같던데, 어렵게 번 걸 허투루 날리면 안 되지.
‘그나저나, 상단에서 이런 일도 하네.’
꼭 택배 서비스 같다.
이후 부지런히 돌아다니다 보니, 어느덧 ‘불러오기’의 시간이 끝나 간다. 여기 와서 새삼 생각하는 건데, 시간은 정말 금이다.
―찍.
마침 놓아두었던 레플리카 햄스터의 시간도 다 되었다. 눈 녹듯 사라지는 또 다른 캐슈넛을 바라보다 피곤이 물밀듯이 밀려와, 그대로 기절하듯이 잠들었다.
그 후,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덜컹거리는 마차 위였다. 주변이 어둡기에 검은 천을 덮어 두었나 싶었는데…….
―찌우욱. (우웩.)
미친 멀미.
내가 벽을 짚고 헛구역질을 하자, 검은 천인 줄 알았던 것이 움직였다. 카일이 마차에 앉은 채로 햄스터 집을 끌어안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괜찮으냐? 캐슈넛.”
―찌이익……. (괜찮아 보이냐…….)
“너도 멀미를 하느냐. 그 녀석이 안고 있을 때는 괜찮아 보였는데. 하여간, 이런 것도 슈와 닮았구나.”
어쩌겠냐. 안에 든 놈이 같은 놈인데.
카일이 햄스터 집 안으로 손을 내밀었다. 아무렴, 딱딱한 집 안에 있는 것보다는 이게 낫겠지 싶어 냉큼 그의 손바닥에 올라탔다.
굳은살이 많이 박이긴 했지만, 그래도 양손으로 감싸고 있으니 따뜻하고 폭신했다.
‘확실히 한결 낫네.’
나는 몸을 둥그렇게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다망한 대공작께서 황실에 도착할 때까지 햄스터 한 마리를 내내 품어 줄 순 없을 테니, 그의 손바닥에 올라 누운 지금 충분히 자 둬야 한다.
덜컹, 덜컹.
마차가 흔들렸다. 그렇게 북부에서 남부로, 겨울에서 봄으로 이동하는 나날이었다.
*
황성에 도착할 때 즈음, 놀랍게도 나는 거의 30퍼센트에 육박하는 기적 수치를 보유하게 되었다.
―찍. (정말 이래도 되는 거냐?)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캐슈넛. 그놈들도 목숨이 아깝거든 다시는 산적질을 하지 않을 것이다.”
―찌이익. (그렇겠지.)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황성으로 가는 길에 몇몇 마을을 들렀는데, 유독 한 마을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병사들을 풀어 물어보니, 최근 산적들이 마을로 내려와 행패를 부리고 금품을 갈취하는 사건이 심심찮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영지와 영지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인데다가 가난한 곳이라 누구도 도와주지 못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점차 뜯어 갈 만한 물건이 없으니, 산적들의 횡포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고.
상황이 이렇다 보니 자연스레 마을 사람들은 외지인을 썩 반기지 않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 만큼 먹을 것이 넉넉하지도 않았고, 외지인에게 도움을 청하기만 해 보라며 꼬투리를 잡는 산적들 때문에 피곤해지기 일쑤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경위를 알게 된 카일은 그 모든 일을 단번에, 그리고 명쾌하게 해결했다.
주먹으로.
“이쪽이 황성으로 오는 가장 빠른 길인데, 슈 그 녀석이 내려오다가 봉변이라도 당해서는 안 될 일 아니겠느냐.”
―찌직. (나 여기 있다.)
글자 그대로다. 카일은 마을을 주름잡던 산적 무리를 주먹 하나로…… 다 패서 정리했다.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얻어맞은 산적들은 카일에게 그동안 빼앗은 재물을 다 바치고는 산으로 도망쳤다.
다시 마을에 내려오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는 으름장에 굽실거리는 꼴이 퍽 볼썽사나웠다는데, 애석하게도 나는 햄스터 집 안에 들어 있는 신세라 전해 듣는 것이 전부였다.
뭐, 어쨌든 안 죽였으면 됐지. 솔직히 절도는 물론이고 살인까지 일삼던 놈들인데, 죽여도 어쩔 수 없는 거 아닌가?
“저들을 도와주었다고 생각하더군.”
―찍. (착각은 자유니까.)
내게 돈을 그렇게나 두둑하게 쥐여 줘 놓고서도 걱정되는 모양이다. 하긴, 돈 뺏는 놈이 도처에 득시글거린다고 하면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긴 하겠지만.
어쨌든, 이래저래 좋은 일이기는 했다.
마을 사람들은 안전해져서 좋고, 카일은 걱정 덜어 좋고, 나는 원작에 없는 일 덕분에 기적 수치 올려서 좋고.
잘 몰랐는데,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블레이크 영지 외의 사람들에게 제법 공포의 대상이었던 모양이었다.
황성에서 쫓겨나 북부로 갔을 때 무슨 사고를 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 일로 두려움이 경외로 바뀌면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으니, 기적 수치가 두둑하게 올라가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게다가 여관에 들를 때마다 햄스터 먹이를 알뜰살뜰 챙기는 모습에 작은 동물과 가난한 사람에게 따뜻하고 정의로운 사람이라는 소문까지 생긴 모양이었다.
“날이 많이 따스해졌으니, 바람 좀 쐬거라.”
카일이 마차의 창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나는 햄스터 집의 창살 쪽으로 바짝 붙어 킁킁거렸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따스해지던 바람은, 황성 근처에 가까워지자 꽃 냄새를 품은 채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마인하르트 제국은 봄이 빠르게 찾아온다더니, 3월쯤 되어도 벌써 꽃이 만개하는 모양이었다.
꽃 피는 계절에 약혼이라, 좋네.
비록 상대가 상대다 보니, 낭만적인 느낌은 많지 않지만.
“지루하느냐.”
카일이 문득 다정스레 물었다. 나는 뽀뽀를 갈기려는 놈의 입술을 세게 걷어찼다.
당연하지, 인마. 벌써 며칠째 ‘불러오기’도 못 쓰고, 얌전히 햄스터 신세인 건지. 이러다가 내가 인간이었다는 사실도 잊겠다고.
“그 녀석이 안고 있을 때는 내내 칭얼대는 일 없이 얌전했는데…….”
칭얼대다니? 그런 귀여운 말 갖다 붙이지 마라. 내 나이가 몇 살인 줄 아냐.
“너무 걱정 말거라. 며칠 뒤면 오겠지. 닷새? 아니, 부지런한 녀석이니 나흘이면 올지도 모르겠군.”
카일의 짐작대로 부지런 떤 척하고 사흘 정도로 잡는다고 하더라도……. 이 지긋지긋한, 순도 100퍼센트의 쥐생을 사흘이나 더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겹다, 지겨워.’
내가 신나게 투덜거리던 때, 마차가 천천히 멈추었다. 마침내 목이 빠져라 기다리던 목적지에 도착한 것이다.
나는 고개를 쭉 빼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차 한두 대는 거뜬히 드나들 수 있을 만큼 큰길에 줄지어 깔린 새하얀 벽돌, 그리고 그 길가를 감싼 봄꽃이 가득 핀 정원.
군데군데 전등이나 구조물 같은 것도 있었는데, 금을 펴 발랐는지 쬐는 볕을 받아 요란하게도 반짝였다.
‘누가 황성 아니랄까 봐.’
화려하기는 더럽게 화려하다.
물론, 그중에서도 가장 시선이 가는 것은 살면서 본 어떤 동화 속 궁전보다 화려하다 못해 사치스러운 황성이었다.
블레이크 성도 작은 편은 아니건만, 과연 황가의 궁전이라고 그 위엄부터가 남달랐다.
‘여기서 구경하긴 너무 먼데.’
나도 나가자, 나도.
나는 재빨리 카일의 손가락을 양손으로 붙들고 매달렸다. 햄스터 집에 넣지 말고, 손바닥 위에 얹어서 가라. 체통이야 좀 상하겠지만…… 답답하단 말이다!
“그래. 같이 가자꾸나.”
카일은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 바라보더니 손으로 조심스레 쥐었다.
다행히도 밖에 기다리는 이들이 많아서인지 내게 뽀뽀하거나 끌어안는 대신,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나를 상의 앞주머니에 넣어 주었다.
나는 고개만 쏙 내민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블레이크 대공작을 뵙습니다.”
센이 시녀들을 이끌고 직접 나와 있었다.
원래도 말끔하고 단정한 인상이었는데, 군더더기 없는 드레스를 걸치고 있으니 정말 어느 귀족 가문 아가씨 같았다.
갈색 머리카락을 높이 올려 묶은 센이 치맛자락을 올리며 허리를 숙이는 것으로 예를 표하자, 카일 역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환대에 감사한다.”
“오랜만에 뵙네요, 전하.”
“그래.”
카일의 표정은 사뭇 부드러웠다.
“잘 지냈나?”
센이 작게 웃으며 대꾸했다.
“황성에서 잘 지내지 않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모든 것이 풍족한 곳인걸요.”
그렇게 말하는 센의 표정은 너무 차분해서, 따듯한 행복함보다는 어딘가 서늘한 기운이 풍겼다.
이에 카일은 마치 이해한다는 듯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했다. 황성에서 잘 못 지낸 나머지 차디찬 땅으로 쫓겨난 본인이라서일까.
“글쎄, 생각보다 많았지.”
센이 아차 싶은 표정으로 입을 가리더니, 얼른 사과했다.
“죄송해요.”
“그대가 잘못한 일은 아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센은 손끝으로 제 목덜미를 가볍게 문지르다가 나를 보았는지, 그제야 내가 알던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캐슈넛도 같이 오셨네요?”
“아무래도 황성의 마수학자들이나 마법사들에게 진찰을 받아 봐야 할 것 같아서.”
“어머, 어디 아픈가요?”
“아픈 건 아니다.”
“그럼 다행이네요. 슈는요?”
그녀는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당연히 나도 동행했으리라 생각했을 텐데, 마차에서 짐을 내리는 인원 중에도 내가 없는 것을 보곤 조금 실망한 기색이었다.
“고향에 들렀다 오기로 했다. 며칠 뒤면 도착하겠지. 내 방 옆에 녀석의 방을 마련해 주면 좋겠는데.”
“이미 그렇게 했어요. 캐슈넛이 머물 곳은 아직인데……. 내일까지는 준비시킬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그래. 부탁하지.”
이후, 센은 차분한 걸음걸이로 성안으로 향했다.
방을 안내하거나 하녀들에게 일을 부탁하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하녀들도 딱히 센을 어려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금방 적응했구나.’
하긴, 똑똑한 녀석이니 그러고도 남지.
그렇게 센과 헤어진 우리는 준비된 방으로 들어섰다.
호화로운 가구와 탁 트인 전경은 과연 북부와는 반대의 느낌이 났다. 그간 북부에 익숙해져서 그런가, 마치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더 섬세하고, 정교하다고 해야 하나. 놀랍기는 하다. 창밖에 눈이 없다는 것도 어딘가 낯설기까지 하고.
“오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이것부터 좀 먹거라.”
카일은 곱게 접은 손수건 위에 나를 내려 두더니 가방을 뒤적거렸다. 해바라기 씨와 구운 땅콩, 황태 큐브, 잘게 찢은 오리고기……. 아니, 이런 것까지 가져왔냐고.
내가 이것저것 먹고 있자니, 이마와 등줄기를 쓰다듬는 손길이 이어졌다. 부담스럽다, 이놈아.
그래도 익숙해지는 게 무섭다고, 거절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온몸으로 표현하는 그의 애정이 어느새 당연해지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배를 적당히 채운 후 그를 멀뚱멀뚱 올려다보자, 카일은 나를 번쩍 들더니 이마에 다섯 번쯤 뽀뽀하고서야 침대 정중앙에 내려놓았다.
“오늘은 여기서 자거라. 내일 아침에는 필요한 것들이 마련될 테니.”
―찍. (난 침대 체질이라 상관없는데.)
햄스터용 침대 같은 걸 놔 달라고 해 볼까? 이렇게까지 큰 침대를 혼자 쓸 필요는 없고, 적당히 손바닥만 한 정도면…….
‘잠깐만.’
이 침대를 왜 나 혼자 써?
철컥.
카일이 등에 멨던 검을 풀어 끌어안았다. 이어 갑주가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칼을 품은 채로 침대에 등을 댄 채 앉는 게 아닌가.
그러고 잔다고? 정말?
“잘 자거라.”
그가 조용히 말하며 눈을 감았다.
―…….
나는 미동 없이 잠을 청하는 그를 조금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안다.
카일은 이곳의 누구도 믿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를 비참하게 죽이고, 어린 그를 차가운 땅으로 내쫓은 곳이 바로 이곳이니까. 목숨이 노려지는 건 물론이고, 죽을 고비 또한 여럿 넘겼을 테지.
그 무수한 기억 때문에 이제는 그때만큼 약하지 않고, 누구도 그를 함부로 대할 수 없음에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뇌리에 새겨진 것들은 생각보다 더 오래 사람을 잠식하니까. 다 이겨 냈다고 생각해도 부지불식간 떠오르는 것이 기억이라는 것은 나도 잘 안다. 지겹도록.
‘……빨리 돌아오고 싶다.’
캐슈넛이 아닌, 슈로서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적어도 이 넓은 황궁에서 그가 자신을 혼자라고 느끼지 않게.
나는 차갑고, 단단하고, 또 외로워 보이는 카일의 얼굴을 한참이나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시간이 조금 더 빨리 흘렀으면, 하고 기도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