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카일의 말대로 밤은 길었다.
장이 섰던 게 언제냐는 듯 모든 활기를 소거하고 펼쳐진 다음 날 밤은, 마치 사라지지 않는 북부의 추위 같았다.
어린아이들의 손에 들린 촛불은 불어오는 바람에 일렁거리고, 어둠 속에서 눈물을 훔치는 사람들의 입에선 작은 훌쩍임이 새어 나왔다.
적막한 밤이었다. 낮에는 애써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어둠의 장막을 빌려, 남몰래 머리를 들이미는 밤.
나는 타오르는 장작을 뒤로하고 정면에서 눈을 감은 카일을 바라보았다. 울지 않는 그 얼굴이 어째서 우는 것보다 더 슬퍼 보였을까.
두 시간이 하루처럼 느껴지는 오랜 밤이었다.
*
나는 햄스터 집에 앉아, 심각한 얼굴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러브러브 코너~❤]라고 쓰인 간판 아래에 익숙한 아이템이 주르륵. 아니, 안 익숙한 아이템까지 주르륵 늘어져 있었다. 평소에는 반투명한 파란색이었던 배경도 어쩐지 핑크빛으로 바뀌었다.
‘업데이트라도 했나?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내가 손으로 페이지를 휙휙 넘기고 있자니, 이제 막 깨어났다는 양 시스템이 떠올랐다.
[(ˉ﹃ˉ)]
야, 야. 졸지 마. 철야라도 했냐.
전부터 생각한 건데, 묘하게 인간을 흉내 내는 구석이 있다. 피곤해하는 것도 그렇고, 화를 내거나 부끄러워하는 것도 그렇고.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어 좋기는 한데.’
내가 헛웃음을 짓자, 시스템이 반짝거리며 또 다른 이모티콘을 띄워 보냈다.
[(づ ̄// ̄)づ]
손 모양 이모티콘이 반복적으로 한곳을 가리켰다.
나는 그 이모티콘이 가리키는 곳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자그마한 배너, 그리고 그 아래에 한 가지 아이템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고작 이거 하나 넣어 놓을 거면서 배너까지 만들었냐.’
그것도 이렇게 화려하게.
눈을 가느스름하게 뜬 나는 시스템이 밤을 지새워 가며 만들었을 배너를 살폈다. 안 보고 지나치면 서운해 하겠지.
어디 보자. 밸런…….
―찍…… (진심으로……?)
[오늘은 밸런타인데이입니다! 당신의 운명 공동체에게 사랑을 전해 보세요!]
야, 이…….
나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시스템 창을 노려보았다. 이런 거 만들 시간 있으면 좀 더 유용하고 쓸모 있는 걸 만들어야지! 이러라고 너한테 기적 수치 준 줄 알아? 엉?
나는 짝다리를 짚고 시스템 창을 향해 삿대질했다.
차라리 쿠키를 싸게 해 주든가! 내가 그거 사느라 이번에 얼마나 출혈이 심했는데!
[(>人<;)]
시스템이 잔뜩 위축된 이모티콘을 띄웠다.
……너무 혼냈나?
땀까지 뻘뻘 흘리는 걸 보니 안쓰럽기는 하다.
그래. 뭔가 해 보겠다고 고생한 부분은 기특하잖아. 의외로 좋은 옵션일 수도 있고. 인벤토리에 들어가는 아이템 같은데, 가지고 다니다가 필요할 때 써도 된다.
‘일단 확인이나 해 보자.’
나는 손으로 [아몬드 초콜릿]이라고 쓰인 아이템의 상세 정보를 확인했다.
최고급 아몬드와 갓 짠 우유, 그리고 양지바른 곳에서 자란 카카오…… 다 치우고, 그냥 겁나 맛있단다. 그래서 따라오는 능력치가 뭐냐 하면, [먹는 사람의 기분이 좋아집니다!]였다.
―찍. (나와.)
[ ε=ε=ε=┏(゜ロ゜;)┛]
나는 부리나케 도망가는 시스템 창에다 분노의 발차기를 날렸다. 지금 나더러 이걸 하트를 43개나 주고 사라고? 이게 소비자를 호구로 아나!
내가 씩씩대며 햄스터 집을 한 바퀴 뛰어다니는 사이, 굳게 닫혀 있던 서재의 문이 열렸다.
당연하지만, 카일이었다.
어제보다는 덜 피곤해 보여도 여전히 낯빛이 썩 좋지 않다. 신경이 곤두서 있어서 그런가. 어디 다친 곳은 없어 보이던데.
나는 걸음을 멈추고 시스템을 불러 세웠다.
‘야, 시스템.’
저 멀리 깜빡거리던 시스템이 [(⊙_⊙)?] 하며 가까이에서 떠올랐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내게 남은 하트를 확인했다.
60개였다.
‘열 개 더 줄 테니까, 초콜릿에 옵션 하나만 추가해 줘 봐.’
시스템이 턱을 문지르는 듯한 이모티콘을 띄웠다. 저런 건 어디에서 배운 건지. 상점 연 지 얼마 지났다고 그새 장사꾼 다 됐다.
‘별거 아니고, 그냥 피로회복 옵션이라도 좋으니까 뭔가 넣어 줘. 열 개나 더 주잖아.’
나는 눈을 부릅뜨고 시스템을 바라보았다.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는 이모티콘이 뜨는 동시에 [Loading……] 창이 떠올랐다.
카일은 그새 내게로 다가와 있었다. 나는 카일이 뻗은 손 위에 얌전히 올라타선 그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너도 사람인데, 힘들겠지.
하지만 한 기사단을 이끄는 단장이자 북부를 다스리는 대공작이기에 그간 힘들어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 못 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럴 때라도 내가…….
―…….
어어. 그래. 뽀뽀 갈겨라. ……털은 좀 그만 먹고.
“오늘도 귀엽구나, 캐슈넛.”
장장 십 분에 걸친 뽀뽀를 끝마친 카일이 찌그러진 내 털을 정리해 주며 말했다.
어쩐지 기를 쪽 빨린 것 같은 기분이다.
한동안 이 키스 세례를 못 받았어서 그런가. 평소보다 길게 느껴지는 건 물론이고 아주 숨이 턱턱 막히더라. 나는 영혼이 하얗게 빠져나간 모습으로 그의 손바닥 위에 엎어져 있었다.
그러자, 그런 나를 위로하듯 뜻밖의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전에 네 몸에 이상한 것을 주입했었지. 그때의 일은 사과하마.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을 거다. 그 녀석이 무리한 마력 주입은 네게 안 좋을 거라고 하더군.”
―찍찍! (그거지! 잘 생각했다!)
나는 벌떡 일어나 똑바로 앉았다. 그리고 칭찬하듯 그의 엄지를 작은 앞발로 토닥토닥해 주었다. 기특하다, 기특해. 말도 잘 듣고.
“그렇게나 좋으냐. 그래, 마석이 더디게 생기긴 해도 몸에는 아무 이상도 없다니 천천히 기다려 보는 게 답이겠지. 여차하면 황성에 있는 마수학자에게 데리고 가도 되니 걱정하지 마라.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너만은 살릴 테니.”
나는 네 목숨이 걱정인데, 너는 내 목숨을 걱정하고 있다.
누가 운명 공동체 아니랄까 봐 이런 쪽에서도 상통하면 어떡하냐. 나는 고개를 돌려 카일의 옆에 뜬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카일의 남은 수명, 약 한 달하고도 반.
그에게 남은 위기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절이 다 가기 전에 큰 사건이 하나 있으리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았다.
*
“큼.”
나는 카일의 문 앞에 서서 목을 한 번 가다듬었다.
이상하게 이 방문 앞에만 서면 긴장할 일이 생긴다. 차이가 있다면 전에는 잘못 때문에 긴장했는데, 오늘은 머쓱해서 긴장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시스템의 일 처리는 생각보다 빨랐다. 카일이 내게 뽀뽀를 갈기는 그 10분 사이에 옵션을 추가한 데다 가격까지 올려 놨더란다.
솔직히 가격 올리는 건 까먹었으면 했는데, 빨간 줄까지 죽죽 그어 놓고 기어이 53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로 인해 내 피 같은 하트는 이제 7개밖에 남지 않았다. 한때는 100개가 넘었었는데…….
앓느니 죽지, 앓느니 죽어.
나는 고개를 내젓고 똑똑, 가볍게 노크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들어오라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였군.”
카일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등 뒤에 숨긴 초콜릿 상자를 더 꽉 붙잡으며 책상에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기다려 주었다.
그렇게 웃지 마라. 기분 이상하니까.
나는 뜨겁게 느껴지는 귓바퀴를 무시하며 감췄던 초콜릿 상자를 내밀었다. 그가 의아한 얼굴을 하면서도 순순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뭐지?”
“열어 보시면 압니다.”
카일이 곱게 감긴 분홍색 리본을 풀고 상자를 열었다.
안쪽은 사실 나도 보지 못했는데, 동그란 모양의 분홍색, 하얀색, 검은색 초콜릿이 상자 주변을 채우고 있고 그 가운데는…….
“…….”
“…….”
야. 시스템.
야. 안 나와?
“직접 만든 건가?”
“……아. 어. 그. 네. 그렇게 됐네요…….”
커다란 하트 초콜릿 위에 초코 펜으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랑하는 카일 전하께, 라고.
나는 지끈거리는 내 머리통을 몇 대 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이걸 왜 확인을 안 했을까. 이걸 왜 그냥 줬느냐고. 그래도 안에 뭐가 어떻게 들어 있는지는 확인했어야 할 거 아냐!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돌아가면 기필코 시스템을 가만두지 않으리라. 요절을 내든가 멱살을 잡든가 둘 중 하나는 해야 속이 풀리겠다.
이런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일은 유심히, 한참이나 초콜릿을 바라보다가 이내 동그란 것 하나를 집어 입 안에 넣었다.
“디저트에도 소질이 있는 줄은 몰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것저것 좀 잘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웬 초콜릿이지?”
“……제가 살던 곳에서는 오늘, 감사하거나 존경하는 사람한테 초콜릿을 주거든요. 별건 아니고 달력을 보니까 갑자기 생각이 나서. ……아. 그냥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 행사 같은 거니까, 받아 두세요.”
민망하니 괜히 사족이 길어진다.
내가 횡설수설 말을 끝마치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다시 동그란 것을 집어 이번엔 내 입 안에 넣어 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네게 주었어야 하는데. 2월 14일인가. 기억하고 있겠다.”
“…….”
그가 웃는다.
근래 본 것 중 가장 편안한 미소였다. 누구보다 냉정하고 차갑게 생겨서는, 어떻게 저런 미소를 지을 수 있는지.
나는 주먹에서 힘을 풀고 아래에 쪼그려 앉았다. 덜컹거리며 의자가 밀려나는 소리가 들렸지만,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초콜릿 아이템의 효능 중에 심장을 뛰게 하는 옵션이라도 있나? 아니면, 쪽팔리다 못해 부정맥이라도 와 버린 건가.
쿵쿵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눈을 꾹 감았다.
입안에서 그가 물려 준 초콜릿이 사르르 녹는다. 달기는 더럽게 달아서, 그래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거겠지.
분명, 그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