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습격의 원인은 굶주린 와이번 떼였다.
긴 겨울 동안 허기에 시달린 마수들이 영지 근처까지 내려오는 건 그리 드문 일이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치고는 피해가 컸다.
성이 부서진 것은 물론이고 사상자도 적지 않게 나왔다. 카일이 직접 나선 지 한 시간은 지났건만, 대피소에는 여전히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아 불안한 침묵만이 가득했다.
“저런 와이번은 처음 봤어…….”
공포에 질린 음성이 내 정신을 퍼뜩 깨웠다. 나는 어둠을 더듬어 황급히 나아가, 한탄하는 이들의 틈바구니에 끼어들었다.
“평소의 와이번과 어떻게 달랐습니까?”
“아, 마수학자셨죠. 대공 전하와 가까운…….”
나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설명을 재촉했다.
“본래 와이번은 드래곤 일족 중에서도 하급 개체에 해당합니다. 성질이 포악하고 무리 지어 다니기도 하지만, 사냥 자체가 어렵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남자가 마른침을 삼키며 약하게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기사단의 창이 와이번의 몸을 찔렀을 때…… 피에서 끔찍한 악취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 피가 타고 흐른 창과 땅이 모두 부식되었어요.”
“더, 덩치도 여태 본 것 중에 제일 컸고요!”
“부리도 뾰족하고 날카로웠습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와이번과 비슷하지만 커다란 덩치, 피에서 악취가 나며, 죽어서도 그 피에 닿는 것은 모두 부식시켜 버리는 마수.
‘드레이크…….’
그건, 내가 개발한 게임에 나오는 몬스터 와이번이었다.
인벤토리에서 마수 도감을 꺼낸 나는 미친 듯이 페이지를 넘겼다. 그리고 와이번이 소개된 곳을 읽고 또 읽었다.
방금 들은 말은 다 사실이었다. 이곳의 와이번이 아니다. 이번에도 또 늪 염소 때처럼 이상 현상이 생긴 것이다.
“……하.”
하하.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냐. 나더러 이 죄책감을 어떻게 지라고.
*
다행히 블레이크 영지는 내 생각보다 강했다. 간밤에 대피소에서 떨며 잠 못 이루던 사람들은, 다음 날이 되자 눈물을 닦고 일어나 성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굳건한 사람들이었다.
성곽이 무너지고, 집이 부서지고, 심지어는 소중한 사람을 잃었음에도 그들은 슬픔을 갈무리하는 방법을 알았다. 모두가 그랬다. 내일을 살기 위해서 오늘을 노력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뻑뻑한 눈을 문지르며 저 멀리서 기사들을 지휘하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많이 수척해 보인다. 소란이 진정되는 데 시간이 꽤 걸렸으니 한시도 쉬지 못했을 것이다. 밤도 지새웠을 거고. 분명, 입에 물 한 모금도 대지 못했겠지.
나는 손바닥에 남은 쿠키 부스러기를 내려다보았다. 급해서 일단 먹긴 했는데, 그 난리 통 중에 몇 개를 샀는지 모르겠다.
이제 기적 수치는 20퍼센트 대를 겨우 유지하고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꽤 많이 쓴 후였다.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대피소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없는 일이었고, 혹시라도 모든 소란이 끝났을 때 카일이 나를 찾을까 봐. 그래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3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그렇게 먹었는데도 3분밖에 안 남았다니.’
나는 허탈하게 웃으며 다시 성안으로 들어섰다. 밝은 빛이 몸을 감싸고, 눈을 뜨니 익숙한 서재였다.
[(。﹏。*)]
시스템이 내 눈치를 보며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몸을 데굴 굴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자. 할 수 있는 일부터. 조급했다간 될 일도 안 된다. 죽기 직전에 느껴 봤잖아.
‘그래. 천천히…….’
나는 숨집에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
이튿날에도 성은 분주했다.
아마 며칠은 계속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것이다. 그 증거로 카일은 어제 서재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를 찾으러 내 방까지 갔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걱정하지 마라. 잘 있으니까.”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활시위를 당겼다.
팽팽하게 당겨진 시위와 팔이 동시에 후들후들 떨렸다. 최대한 힘껏 당겼는데도 흔들리는 초점을 다잡을 수 없었다. 카일이 도와주었을 땐 그리도 쉽게 되었는데.
“읏…….”
손에서 땀이 배어난 탓에 쥐고 있던 화살을 놓쳤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최대의 반동으로 날아갈 화살은 과녁 옆 나무에 빗맞아 픽 하고 떨어졌다.
소질이 없는 건지, 운동 신경이 제로인 건지. 아마, 둘 다여서 이 모양이겠지만.
나는 한숨을 삼키며 다른 화살을 꺼내 들었다.
벌써 스무 발은 쏜 것 같은데, 제대로 맞힌 것은 몇 개 없었다. 그래도 매일, 꾸준히, 커다란 재해에서 일상으로 돌아가는 사람들과 함께 나는 시위를 당겼다.
그것이 벌써 일주일째였다.
처음엔 ‘불러오기’ 하여 소란을 수습하는 데 손을 보태려다가, 이미 몇 번이나 비슷한 상황을 겪어 온 이들의 체계적인 움직임 속에서 내가 방해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냥 묵묵히 활을 잡으러 왔다.
덕분에 실력이 꽤 늘기는 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아직 전력이 되기에는 무리였다. 절반을 겨우 맞추는 정도니까. 하루에 고작 두 시간으로 실력이 그렇게 늘 리가 없나.
“여섯 발이라. 꽤 늘었군.”
손에 붕대를 감다가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퍼뜩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가왔는지, 카일이 정면을 바라보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바쁘신 것 아니었습니까?”
“수습이라면 많이 진척되었다. 마무리 단계이니, 내가 붙어 있을 필요도 없겠지.”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고요?”
“어제도 보러 왔었는데.”
“예?”
진짜 결단코 전혀 몰랐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다가 재빨리 어제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뭐 실수한 거 없었나? 시스템이랑 대화했던 건 아니겠지? 허공에 대고 주먹질은?
[o(*°///°*)o]
무언가 기대하는 듯한 시스템은 무시하고 멋쩍게 웃었다. 시스템 쟤는 날이 갈수록 이상한 주접 같은 게 느는 것 같다.
근데, 우리 전하께서는 뭐 하러 바쁘신 시간까지 쪼개서 몰래 나를 보고 가셨을까.
“아는 척이라도 하시지.”
“열중하는 데 방해가 될까 싶어서.”
그렇게 중얼거린 카일이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깃털이 닿는 듯한 그 조심스러운 손길에도 나는 미간을 좁히며 손끝을 움찔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근 일주일째 요령 없이 연습만 했다 보니 손이 퉁퉁 부르트고 벌겋게 변해 쓰라렸다. 회복이 빠르긴 하다지만, 매일 같은 자리에 같은 상처를 만들고 있으니 영 차도가 없었다.
“으…….”
“쉬이.”
카일이 나를 달래며 손바닥 전체에 연고 같은 것을 발라 주었다.
동그란 통에 담긴 탁한 색의 고체에서는 풀을 말려 끓인 듯한 냄새가 났다. 즉,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래도 카일이 입김까지 불어 가며 꼼꼼히 발라 주니 싫지는 않았다.
나는 하얀 손수건으로 상처를 덮어 묶어 주는 그를 올려다보며 안색을 살폈다.
얼굴이 여전히 피로해 보여서 신경이 쓰인다. 물론, ‘불러오기’를 사용하기 전에 캐슈넛으로 보기는 했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카일은 아침마다 꼬박꼬박 내 밥을 챙기러 왔으니까. 뭐, 바빴는지 뽀뽀는 안 하고 갔지만.
“무리해서 연습하지 마라. 급하게 한다고 빨리 늘 수 있는 게 아니다.”
“압니다. 하지만…….”
“상처가 아물어 단단해져야 그 위에 새로운 토대를 쌓을 수 있는 법인데, 낫지도 않은 손으로 자꾸 활을 드니 더딜 수밖에 없지 않나.”
다정한 그 목소리에 긴장했던 몸에서 힘이 풀린다. 물끄러미 내려다본 내 손은 어느새 말끔하게 치료돼 있었다. 닿기만 해도 아팠는데, 이젠 둔한 통증만 느껴질 뿐 손을 쥐었다 펴도 불편함이 없었다.
그러는 사이, 카일은 내가 사용한 활과 화살 따위를 부지런히 정리했다. 그리고 다치지 않은 손을 이끌어 제 쪽으로 살짝 당겼다.
“바쁘지 않다면 잠깐 들렀다 가지.”
“어디를요?”
“시장이 다시 섰다. 네가 전해 줬던 오리 요리와 누비옷도 파는 것 같더군.”
“아.”
나는 재빨리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남은 시간은 대충 30분 정도였다.
‘……잠깐 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요즘 캐슈넛으로도 통 못 만났고, 슈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굳이 카일 때문이 아니더라도 내가 전해 준 요리법은 잘 익혔는지, 옷은 또 어떻게 팔고 있는지. 성곽은 어떻게 고쳤고, 사람들 얼굴은 또 어떤지. 솔직히 궁금하잖아? 잠깐은 보고 와도 괜찮잖아?
나는 큼큼, 하며 목을 가다듬고 슬쩍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럼 딱 30…… 아니, 20분입니다.”
“그래.”
그가 웃음을 머금었다.
피곤해 보이는 미남이 웃으니 더 잘생겼다. 선 굵고 잘생긴 얼굴이 취향이었나 하면 그건 또 아닌데. 아니, 취향이고 아니고 이런 얼굴이 눈앞에 있으면 솔직히 침 떨어질 만하다.
시장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침을 습, 삼키자 그가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배가 고픈가?”
“……어어. 네!”
쓸데없이 기민하기는.
호선을 그린 채 굳은 입꼬리가 파들 떨렸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걸음을 조금 더 재촉했다.
“식사를 할 걸 그랬나.”
“에이. 길거리 음식 있잖아요. 그거 먹으면 되죠. 와. 맛있는 거 많아 보이네! 오, 꼬치구이도 있잖아?”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너스레를 떨었다.
노릇노릇 구운 마수 고기를 파는 가판대 앞에 서니, 그가 금액을 지불한다. 나는 내 손에 쥐어진 꼬치를 크게 베어 물며 활기를 띠는 시장을 둘러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며칠 전보다 많이 밝아졌다. 아직 여기저기 깨지고 덜 고친 부분이 있지만, 모든 수습이 잘 이루어진 모양이었다. 죽은 사람들의 장례까지도.
내가 꼬치를 손에 든 채 멍하니 있자, 그가 말했다.
“내일은 추모제가 있을 거다.”
긴 밤이 되겠지, 하고 덧붙여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담담하고 견고해서 오히려 슬프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