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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리고 목표물을 바라본 뒤, 시위를 당기면 된다. 팔은 수평으로 나란히 하고. 그래, 그렇게.”
나는 카일이 알려 주는 대로 활시위를 당겼다. 그리고 눈에 힘을 빡 주며 사시나무 떨리듯 바들거리는 팔에 평화를 가져다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다.
물론, 결과는 실패였다.
나는 그냥 사시나무가 되었을 뿐이었다.
[~(>―<~)] 뭐. 왜. 사시나무 처음 보냐. “집중하고 있는 건가?” 카일의 엄격한 질문에 내가 투덜거리듯이 대꾸했다. “집중의 문제가 아니거든요. 아무리 힘을 줘도 안 됩니다.” 이거, 불량 아냐? 내가 씨근거리자, 카일이 낮게 웃었다. “그럴 리가.” 옆에 서 있던 그가 내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더니 활을 쥔 내 손목을 가볍게 쥐고, 다른 손으로는 반대편 어깨를 쥐더니 힘을 실었다. “허리는 곧게. 어깨는 일자로.” 어깨를 고정하던 손이 팔꿈치로 내려갔다. 내 상체가 다시 불안하게 흔들리자, 그가 인상을 찌푸리곤 더 가까이 다가와 제 상체로 내 등을 받쳤다. 잠깐, 이 자세는……. “……저기.” 나는 고개를 살짝 들었다. 목소리가 작았는지, 카일이 허리를 살짝 숙여 제 얼굴을 더 가까이 댔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오히려 말할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건 꼭 뒤에서 끌어안은 것 같다고. “조금 떨어져서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괜히 무안해져서 크흠, 헛기침하며 물었다. 하지만 카일이 어림도 없다는 듯 딱 잘라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 시위도 제대로 못 당기지 않았나?” “네, 뭐…… 그렇긴 했죠.” “잔말 말고 앞을 보도록. 시선은 정면에. 숨은 느리게 쉬어라. 손끝까지 힘이 곧게 나아간다는 느낌으로. 오른팔을 놓기 직전에는 숨을 참는 게 낫다.” 사정없이 요동치던 팔의 떨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그의 힘이 더해지자 시위가 안정적으로 늘어났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화살촉이 정확한 지점을 노렸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쏜 화살이 과녁 정중앙에 멋지게 날아들었다. “아.” 카일의 도움 덕에 가능한 일인 건 알지만, 기쁜 건 별수 없었다. 내가 웃는 낯으로 그를 올려다보자, 카일 역시 입꼬리를 올리며 나를 보고 있었다. “잘했다.” 주변이 조용한 가운데, 그의 기쁨만이 고스란히 전해졌…… 잠깐. 주변이 조용해? 그제야 나는 사람들이 우리 둘을 위해 적당히 자리를 피해 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골프 치는 사장님처럼 팔을 휘두를 때마다 박수를 받을 일은 없으니 편하다지만, 이건 꼭…… 데이트하라고 눈치껏 자리를 마련해 준 것 같잖아. [현재 보유 현황 | ❤×60] 캐슈넛으로 있던 것도 아니고, 그가 캐슈넛 생각을 한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카일의 행복 수치는 조금씩 오르고 있었다. “…….” 우리의 시선이 다시금 허공에서 부딪쳤다. 그는 무언가 답을 구하는 사람처럼. 아니, 무언가를 갈구하는 사람처럼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차분하고 열렬한 시선이었다. 나는 그가 내게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은. 나는 고개를 돌리고 활을 내렸다. 그리고 괜한 헛기침을 한 후에 말했다. “시간도 좀 남겠다, 바람이나 쐬러 가실래요?” 내 속마음을 대번에 알아챈 듯 카일이 낮게 웃었다. “팔이 아픈 모양이군. 이제 겨우 한 번 쏘았을 뿐인데.”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보셔야죠.” “그래. 그럼, 승마를 갈까. 말 타는 것도 배울 필요가 있으니.”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한 뒤, 대꾸했다. “한 시간 코스로 부탁드립니다.” “대공작보다 바빠 보이는군.” “애석하게도 가끔 그런 편이죠.” 낮고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흘렀다. 그는 진심으로 즐거워 보였다. 승마를 가르치겠다는 명목이 무색하게도, 그는 나를 안아 올려 안장에 앉히더니 그도 따라 탔다. 내 체구가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닌데, 희한할 정도로 번쩍번쩍 잘 든단 말이야. 갈색 암말은 성 외곽을 따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조금 춥긴 했지만, 그것까지 내다본 카일이 제 망토를 내 어깨에 둘러 준 덕에 견딜 만했다. “겨울이 끝물이라고 해도 바람이 아직 차다. 블레이크의 추위는 봄까지도 이어지는 편이니,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릴 거다.” “제가 이 영지에 오래 있지 않았다는 걸 어떻게 아세요?” “바보 같은 질문이군.” 그가 살짝 기울어진 내 어깨를 감싸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네가 이곳에 오래 있었다면, 내가 너를 못 알아봤을 리가 없지.” “블레이크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없으시네요.” “그게 내 의무니까.” 누가 의무를 그토록 기껍게 짊어지냐. 하긴, 그러니까 카일 블레이크겠지. “그나저나, 벨리알 전하 습격에 관련된 단서는 좀 알아보셨습니까?” “……그래. 알 수 없더군.” 알쏭달쏭한 대답이었다. 뭐야? 그래서 알겠다는 거야, 모르겠다는 거야? 다행히도 카일의 설명이 곧 이어졌다. “세 구의 시체 모두 신원을 알 수 없는 병사들이었다. 습격당했다던 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었지.” “하지만 그들이 ‘병사’라는 사실을 알아내셨네요.” “그래.” 그 말은 곧, 배후가 사람을 썼다는 뜻이 된다. 하긴, 당연한 일이다. 목표는 벨리알이거나 카일이었을 텐데, 미쳤다고 누가 직접 움직일까? 실패하면 절대로 제명에 못 죽을 테다. “일단, 수도 근처의 용병단을 수소문했다. 최근 고위 귀족의 명령을 받고 움직였거나, 세 명 이상이 죽은 곳이라면 의심할 만한 가치가 있겠지.” “한동안 바쁘시겠네요.” “그래. 인력이 꽤 드는 작업이기도 하고. 캐슈넛, 그 녀석을 신경 쓰기도 벅차건만…….” 응? 캐슈넛? 나? ……왜? 그가 수심 가득한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마력을 주입했는데 튕겨 내더군. 혹시, 아는 바가 있나?” 아는 거야 있다. 말할 수 없어서 문제지. 보통 그런 일이 있으면 한 번쯤 자신의 햄스터를 수상하게 생각할 법도 하건만, 카일의 얼굴에는 진심 어린 걱정만이 가득했다. 역시, 팔불출 내공 어디 안 간다. 그나저나, 이걸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글쎄요, 특이 체질이려나…….” 어물거리던 내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렇다고 또 마력을 주입하진 마시고요. 몸에 안 좋은 영향이라도 가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안 좋은 영향이라는 말에 카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안에서 충돌…… 같은 게 일어날 수도 있다는 뜻인가?” 제법 예리하다. 물론, 시스템의 존재를 알고 말한 건 아니겠지만. “예. 그러니까 당분간은 놔두십시오.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귀찮게 굴지 마라.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별로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았다. 시스템을 잘못 자극했다가는 저번처럼 늪 염소 같은 게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조심해야지. 내가 나고 자란 땅은 아니지만, 그래도 남에게는 소중하게 일군 터전이니까. 그렇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내 ‘불러오기’ 시간이 끝나기 전에 성으로 복귀했다. 얼른 가자며 채근하는 내게 카일이 궁금해 죽겠다는 시선을 던졌지만, 햄스터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려 줄 수는 없었다. 사실 이것도 고민이기는 했다.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다는데, 대체 무슨 수로 내가 놈의 반려 햄스터라는 사실을 알려 줘야 하나……. 아, 역시 그때 말이 잘리면 안 됐는데. 이놈의 기구한 인생. ‘당분간만 더 이렇게 지내도 되겠지.’ 카일의 남은 생도 좀 늘어났겠다, 이 평범한 삶을 조금만 더 누리고 싶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북부의 ‘평범함’이 무엇을 이겨 내야만 얻어 낼 수 있는 건지 몰랐다. * “습격입니다, 전하! 지금 당장 대피해야 합니다!” “북쪽 성루가 무너졌습니다! 마법사의 지원이 필요합니다!” “……화, 화재입니다. 서쪽에서 불길이 포착되었습니다!” 사건은 갑작스럽게 일어났다. 어떤 전조도 없이 찾아온 일들이 북부를 강타하자, 블레이크 성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었다. 그 소란을 처음 접했을 때는 늦은 밤이었기에, 성에서 가장 안전하다고 봐도 무방한 대공작의 서재—그것도 햄스터 집 안—에 있었던 나는 그들의 두려움과 혼란을 곧장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와 놀아 주던 카일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리는 이유도 알지 못해, 좀 얼떨떨했다. 내가 이곳의 혹독한 현실을 실감하기까지는 딱 한 시간이면 충분했다. “성의 지하에 은신처가 있다. 나와도 좋다는 명령이 떨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절대로 나오지 마라.” 그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서 기회를 보자마자 ‘불러오기’를 썼건만, 나를 보자마자 한다는 말이 겨우 그거였다. 나는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가는 그를 올려다보며 뚱하게 물었다. “이번에도 제가 죽을까 봐 지하에 숨겨 두시려는 겁니까?” “…….” 카일이 눈썹을 찡그렸다. 짜증을 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쓴웃음을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래.” “그럼, 제게 활은 왜 가르치셨습니까? 죽음의 위기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 때문이 아니었나요?” “살아남을 가능성을 올려 주기 위함이었지.”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네가 어떤 상황에서든 위험과 맞서 싸우라는 뜻은 아니다.” “……저는 전하를 홀로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걱정하는 마음은 가상하지만,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그래도…….” “그래도?” 카일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렸다. “자신이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해. 객기만큼 목숨을 재촉하는 것도 없으니.” 말문이 막혔다. 그의 말이 옳다는 건 안다. 활도 제대로 쏘지 못하는 내가 북방의 패자, 카일 블레이크를 걱정하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 공동체라는 건, 설령 위험해진다고 하더라도 함께 맞서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명령에 불복하는 것은 용서하지 않겠다.” 간절하게마저 느껴지는 그 말에 나는 억지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인정해야 했다. 지금의 나는 그에게 어떤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