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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긴 마수는 앞으로도 푹 삶아 드시면 됩니다. 오래 삶아야 하긴 하는데, 영양 면에서도 그렇고 먹기도 훨씬 좋을 거예요.”
하녀들과 기사들이 동그랗게 모여 내 말을 받아 적었다.
다행히 그들은 내 개떡 같은 설명에도 찰떡같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떤 마수도 이렇게 조리하면 맛있겠다느니, 속에는 어떤 걸 채워야겠다느니, 부지런히 토론을 나눴다.
‘이쯤 하면 됐나. 오리 백숙도 거의 다 됐고.’
나는 주먹으로 어깨를 통통 두드리며 눈앞에 뜬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앞으로 5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먹어 보진 못하고 가겠네.’
나는 그새 친해진 성 사람들과 인사하고 구석진 창고로 향했다. 들어가서 문을 닫자마자 조금 먼 곳에서 카일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었다, 이놈아.”
나는 내 몸을 하얗게 휘감는 빛을 느끼며 웃었다. 그가 나를 찾는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
한 시간을 하루처럼 사니 피곤해 죽겠다. 나는 머리에 붙은 톱밥을 떼며 나른하게 하품했다.
‘불러오기’가 끝나고 얼마나 잠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눈을 뜨니 카일이 내 밥그릇에 따끈따끈한 오리 백숙 몇 점을 죽죽 찢어, 담아 주고 있었다.
―찍. (뭐 하냐.)
“깨웠다면 미안하구나. 그래도 마침 잘되었다. 따뜻할 때 먹는 게 좋다고 하더군.”
카일은 떡처럼 앉아 있는 내 앞에 밥그릇을 놓아 주었다. 나는 부스스한 몰골로 내가 만들었던 오리 백숙을 바라보았다.
‘음. 잘 익었네.’
확실히 백숙은 푹 삶아야지.
나는 카일이 잘게 찢어 준 고기를 양손으로 잡고 끝부터 야금야금 베어 먹었다.
반지르르한 기름기를 품은 야들야들한 속살이 입안에서 사르르 녹았다. 보통 오리보다 맛있는 것 같은데. 마수라서 운동량이 많아서 그런가?
내가 정신없이 고기를 먹어 치우고 있자니, 카일이 검지로 내 이마를 살살 쓰다듬으면서 흐뭇한 미소를 보내왔다.
“그 녀석이 개발한 음식이란다. 어쩌다 그런 녀석이 들어온 건지.”
―찍찍. (죽어서 왔다, 인마.)
“제대로 된 보답을 해야 할 텐데. 어떤 보답이 좋을지 모르겠구나.”
―찍찌찍, 찍. (돈이나 줘라. 돈이 최고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하는 카일을 두고 백숙과 쌀알까지 싹싹 비웠다. 작은 몸이라 그런지, 고작 한 줌만 먹었을 뿐인데 배가 터질 것 같다.
나는 등 뒤로 손을 짚고 팔자 좋게 늘어졌다. 카일은 그런 나를 귀여워 죽겠다는 눈으로 핥아 대다가, 이내 나를 손바닥에 올리고 서재를 나섰다.
“그동안 네게 신경을 못 쓴 것 같아서, 오늘은 오랜만에 함께 자자꾸나.”
카일이 꽃을 예쁘게 수놓은 손수건을 깔고 나를 눕혀 주었다. 그러고는 그 곁에 비스듬히 누워,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나를 한참이나 쓰다듬었다.
이러다 등짝 털만 벗겨지겠다 싶을 즈음에 웬일로 그가 먼저 눈을 감았다.
‘많이 피곤했나.’
그나저나, 팔은 좀 괜찮은 건지.
나는 몸을 일으켜 카일의 팔을 살펴보았다. 아직 붕대가 감겨 있기는 하지만, 아까 보니 사용하는 데는 큰 문제 없는 것 같던데.
굳은살이 박인 손끝을 따라 이어진 수많은 자상을 살펴보다가 꾹꾹 눌러도 보고, 빨리 나으라고 문질러도 주었다.
건강해라.
네가 건강해야, 나도 마음이 놓이니까.
*
북부 사람들은 마른 터전을 일으킨 베테랑답게 새로운 것을 곧잘 배웠다.
적응력도 얼마나 좋은지. 어제 가르쳐 준 백숙은 물론이고, 누비옷까지 벌써 척척 만들어 낸다. 가르치는 보람이 있구만.
나는 오늘도 오리 마수를 잡아 온 기사들 앞에서 백숙에 이어 죽까지 만들었다. 주방에 고소한 냄새가 가득 풍기자, 다른 일을 하던 사용인들도 모여 아주 북적북적했다.
“오…… 오오. 이거, 엄청 맛있는데요?”
“왜 이렇게 먹을 생각을 못 했을까! 튀긴 것보다 훨씬 낫잖아?”
“앞으로는 이렇게 드세요. 그리고 여기, 쌀로 누룽지를 해서 깔고 데우면 더 맛있게 먹을 수 있거든요?”
월세방 주인아주머니가 좋아하시던 음식이다. 신세 진 적이 있어서 한번 해 드렸더니, 그 뒤부터 자주 해 달라고 찾아오셨었지.
맛있을 거다. 요식업 아르바이트를 몇 년이나 했는데. 웬만한 음식은 다 그럴듯하게 할 줄 안다, 이 말이야.
“남은 고기는 육포로 만들면 되겠네요. 아. 오리털은 어제처럼 잘 꿰매서 누비옷 같은 걸로 만들고요.”
나는 바구니 가득 마수 깃털을 담아 한참 바느질 중인 하녀들 옆에 앉았다. 살갑게 인사를 붙여 오는 사람들의 얼굴에 생기가 가득했다.
그 틈에 있으니, 괜히 나까지 기분이 좋아진다.
‘이렇게 남들이랑 뭔가 같이해 본 게 얼마 만이더라.’
게임도 거의 혼자 만들었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는 삼촌 집에서도 칼같이 독립했으니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그럴듯한 추억이랄 게 하나도 없었다. 대학도 아르바이트하느라 바빠서 수업만 들었지.
‘참 재미없게도 살았네.’
나는 천과 천 사이에 깃털을 넣고, 바늘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도톰하게 밀봉된 천은 옷이 되기도 하고, 쿠션이 되기도 했다. 저 멀리서는 이불을 만드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흐뭇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때, 눈앞에 깜빡이며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앞으로 3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
아니, 벌써?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기애애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의 시선이 한순간에 내게로 집중되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설설 뒷걸음질을 쳤다.
“급한 일이 생겨서, 이만 가 보겠습니다.”
“벌써? 좀 더 있다 가시지!”
“이게 중요한 약속이라서요.”
그대로 뒤를 돌아서 식당을 나서려는데―.
[블레이크 영지민들에게 풍족한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북부의 대부’ 달성!]
[기적 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21.0%]
[패시브 효과, 북부의 일원이라면 누구든 당신에게 호감을 느끼게 됩니다.]
[‘불러오기’ 시간이 증가하였습니다.]
[앞으로 62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시스템 창이 한 번에 떠올랐다가, 내가 건드릴 틈도 없이 사라진다. 더없이 흡족하게 미소 지은 나는 몸을 돌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간다고 하지 않았나?”
“아. 보너스 시간이 생겨서.”
사용인 한 명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더니 갑작스럽게 고개를 홱 돌렸다. 나는 물음표 띤 얼굴로 눈썹을 한번 치켜올린 후, 바늘을 한 땀 끼워 넣었다.
그런데…… 뭐지, 기분 탓인가?
오손도손 떠들던 다른 사람들도 모두 찬물을 끼얹은 듯 식어 있었다. 꼭, 야자 시간에 떠들다가 선생님이 들어오면 공부하는 척하는 애들처럼…….
그때, 머리 위로 긴 그늘이 졌다.
“즐거워 보이는군.”
카일이었다. 네가 원인이었냐.
나는 고개를 젖히고 실을 꿰고 있던 천을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전하도 하실래요? 이런 손재주는 없으시려나.”
주위는 여전히 조용했다. 카일이 낮게 웃으며 내 등을 받치고, 동시에 무릎 아래로 팔을 넣어 가볍게 들어 올렸다.
“그래.”
“……아니. 들어 올리긴 왜 들어 올립니까?”
“잠시 빌려 가지.”
“어딜 가는데요!?”
내 말엔 대꾸도 하지 않고, 카일이 말했다.
나는 불만스럽게 그를 바라보다가 이내 어렵지 않게 그의 목적지를 깨달았다. ……미친. 서재냐? 서재에 꿀 발라 뒀냐!?
‘시스템! 상점 열어 봐, 상점!’
[☆*:.。. o(≧▽≦)o .。.:*☆]
[!견과류 상점!]
화려하게 반짝이는 네온사인을 뒤로하고, 땀을 뻘뻘 흘리며 러브러브 코너를 미친 듯이 눌렀다.
[╰(‵□′)╯]
알았다, 알았어. 다음부턴 한 번만 누를 테니까 일단 좀 띄워 줘라.
[러브러브 코너~❤]
나는 점점 가까워지는 서재와 시스템 창을 번갈아 바라보며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그보다, 나 지금 하트가 몇 개더라?’
전에 많이 쓰지 않았나?
[현재 보유 현황 | ❤×52]
“…….”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기억하기로 레플리카 햄스터는 지속 시간 30분에 하트 100개였다.
그래. 이게 다 내 업보다. 빌어먹을 햄스터 옷이랑 털실을 사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래서 사람이 저축이라는 걸 해야 한다. 생기는 족족 다 쓰지 말고, 위험할 때를 위해서 좀 아껴 뒀어야지!
나는 과거의 나를 저주하며 부르르 떨었다.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며 “어디 아픈가?” 하고 물었지만, 그저 고개만 몇 번 저어 주었다.
침착하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다잖아.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 (지속 시간 : 30분) | ❤×100]
구매할 수 있는 건 파란색, 구매할 수 없는 건 회색이다. 그리고 레플리카 햄스터는 물론 회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자. 우리 오늘만 따악 반값으로 하자. 15분에 하트 50개. 어때. 그 정도는 살짝 수정할 수 있지?
[ಠ﹏ಠ]
그게 어디 쉽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사람 좋게 웃으며 시스템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생각해 봐. 내가 들키면 너도 손해잖아.’
아직 네가 어째서 나를 도와주는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득이 있으니까 도와주는 거 아냐? 기적 수치나 하트, 내가 많이 쓸수록 좋은 거지?
[ ̄へ ̄]
참으로 심드렁한 반응이다.
그럼 어쩌겠는가. 방법을 바꿔야지.
나는 혀로 입술을 축이고 유들유들하게 웃었다. 자고로 누군가를 설득할 때는 인상이 중요하다.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더없이 활짝 핀 얼굴로 내 양손을 지그시 맞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상점 연타하는 게 빠를까, 네가 할인해 주는 게 빠를까.’
[(°▽°)]
잠시 굳은 듯한 이모티콘을 쓰던 시스템은 이내 [……Loading……]이라는 창을 띄우고, 머지않아 새롭게 상점을 열어 주었다.
불만스럽다는 이모티콘이 줄줄이 이어졌으나 손으로 휙휙 넘겨 치워 버렸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난 급하다고.
내가 레플리카 햄스터를 찾는 사이, 카일은 어느새 서재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다행히 타이밍은 자로 잰 듯 꼭 맞았다.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가 인벤토리에 지급되었습니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혼자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는지, 표정이 참 다채로워서.”
“…….”
입을 열고 다물길 반복하다가 마땅한 대답은 못 내놓고 헛기침을 했다.
카일이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운을 뗐으나, 때마침 누군가가 지나가면서 그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손에 쥔 책과 복장을 보아하니 마법사인 모양이었다.
“내일 오후, 서재에서 뵙겠습니다. 전하.”
“그래.”
응? 내일 왜 뵈는데? 뭔데? 마법사?
나는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어깨로 문을 밀어 서재로 들어서며 말했다.
“캐슈넛이 너무 자라지 않아서, 마력을 주입해 보기로 했다. 나도 마법을 쓸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섬세하게 조절하거나 타인의 마력을 보는 눈은 없어서.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좋을 것 같더군.”
“……아. 아아.”
내 인생이 롤러코스터라면 하강밖에 없을 것이다. 아니지, 이건 롤러코스터가 아니라 번지 점프다. 그것도 줄이 뚝 끊긴 상태로.
어떻게 이렇게 기구하냐.
가만히 놔둬도 알아서 자랄 테니 마력 주입 같은 건 하지 말라고 했어야 하는데. ……지금이라도 말할까? 아니지. 이제 와서 말하면 수상하기만 하다.
‘야. 시스템. 마력 같은 거 주입해도 괜찮은 거야? 아무렇지도 않아?’
[¯_(‘0’)_/¯]
……그래. 너도 모르냐.
나는 그의 품에서 내려와 한숨을 내쉬고, 레플리카 햄스터를 꺼내 숨집에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이젠 모르겠다. 될 대로 돼라. 나는 지금 눈앞의 불행을 해결하기도 벅차다.
“자, 우리 마수 어디 있나.”
내가 햄스터를 찾는 척하며 무성의하게 중얼거리자, 어느새 다가온 카일이 톱밥 사이를 휘적거리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렇게 다짜고짜 뒤지면 놀란다지 않았나.”
“아, 예…….”
카일은 찍, 하고 우는 레플리카 햄스터를 손에 살며시 쥐고 또 한참을 쳐다보았다. 하여튼, 쓸데없이 예리한 자식.
나는 레플리카 햄스터를 과하게 칭찬하며 애써 카일의 눈을 돌려놓았다. 아이구! 우리 마수! 아이고! 잘도 운다!
한참 주접을 떨어 댄 끝에, 다행히 15분이 지나기 전에 흡족해 보이는 그를 끌어 앉혀 차를 마실 수 있었다. 겸사겸사 바늘이랑 천을 쥐여 주고 누비 만드는 법도 알려 주었다.
적적하면 그걸로 시간 보내십쇼. 애꿎은 햄스터 괴롭히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