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캐슈넛, 잠시. 가만히 있어라.”
드디어 올 게 왔나.
톱밥에 누워 전등 빛으로 선탠을 즐기던 내 몸이 카일의 투박한 손에 무기력하게 들어 올려졌다.
그는 평소보다 더 조심스럽게 나를 쥐고, 어디서 빌려 온 건지 모를 줄자 같은 것으로 내 팔이나 다리, 몸통의 둘레를 재기 시작했다.
―찍. (에휴.)
나는 대 자로 뻗어 카일이 열중하는 모습을 눈에 담았다. 손이며 팔에는 붕대를 둘둘 감고 있는 주제에 쉬는 날이 생기자마자 이 모양이다.
좀 쉬어라. 얌전히 누워나 있으라고.
나는 털실 사이에 몸을 파묻고 시큰둥한 얼굴로 카일이 펼쳐 놓은 <직접 만들어 봐요! 햄스터 옷 79선>을 바라보았다.
아니, 봤다가 질끈 감았다.
카일이 만들겠다고 고른 옷은 등짝에 큼지막한 딸기를 수놓은 분홍색 망토였다. 나는 애써 상황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 주지 말 걸 그랬다. 아니면, 적어도 주기 전에 확인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때는 [폭신폭신 햄스터 털실로 만든 옷은 인벤토리에 소유할 수 있습니다!]라는 바이럴 마케팅에 속아 무작정 구매해 버렸는데,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d=====( ̄▽ ̄*)b]
뭘 좋아하고 앉았냐.
나는 시스템 창을 향해 발차기를 하며 씩씩거렸다. 내가 허공에 대고 시비를 건다고 생각했는지, 카일이 잠시 손을 멈추더니 내 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심심해도 조금만 참거라. 금방 끝날 테니까.”
그러고는 아몬드 한 알을 쥐여 주는 것이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삐딱하게 돌아누웠다. 그리고 아몬드를 야무지게 씹으며 카일을 구경했다.
‘그래. 이미 이렇게 된 거, 뭐 어쩌겠냐.’
시스템한테 물어본 바로는 내가 ‘불러오기’로 인간이 되면 저 옷이 커진다고 한다. 어쨌든 급할 때 나체로 있는 것보다 망토 한 장이라도 걸치는 게 낫지 않은가.
문제는, 카일이 지옥에서 올라온 똥손이라는 점이지만.
‘……저게 옷이냐? 거적이지?’
나는 심각한 얼굴로 그가 만들어 내는 수세미를 바라보았다. 저거로 설거지하면 잘 닦이긴 하겠다. 아무튼, 옷으로는 못 입는단 소리다.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나더니 바깥에서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가겠습니다.”
“아니. 들어오지 마라.”
카일이 손을 삐끗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커다란 문이 약간 열렸다가 끼익하며 도로 닫혔다.
“……바쁘십니까?”
“사람 죽는 일이 아니면 서재에 절대! 결단코 들어오지 마라.”
카일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뭘 그렇게까지 말하냐. 그냥 햄스터 옷이나 뜨고 있으면서.’
아무리 너라도 이런 모습은 부하한테 보이기 싫은가 보지? 그래, 너한테도 사회적 체면이라는 게 있는데…….
어쨌건, 문밖에 있던 기사는 군기가 바짝 들어 “예!” 대답하고는 서둘러 멀어졌다.
이로써 한동안은 누구의 방해도 없이 고요할 것이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저 가련한 기사가 성 사람들한테 단단히 이르겠지. 죽는 한이 있어도 지금은 서재에 들어가지 말라고.
나는 배를 벅벅 긁으며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카일은 다시 뜨개질에 집중하고 있었다.
[현재 보유 현황 | ❤×14]
실력은 더럽게 없지만, 네가 좋으면 됐다.
‘네 행복이 곧 내 행복이지, 뭐.’
실이 줄어 갈수록 행복 수치는 조금씩 조금씩 늘어났다. 나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실뭉치에 몸을 파묻었다. 포근하고 따뜻한 온기 덕분에 가물가물 눈이 감겼다.
그리고, 흐린 시야로 시스템 창이 반짝 떠올랐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50일 남았습니다.]
15일가량이었던 수명이 한 달 이상 훌쩍 뛰었다. 나는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다가 이내 스르륵 눈을 감았다.
아직 갈 길이 멀지만, 적어도 이번 겨울은 나겠다. 이 황량한 북부에서 그와 함께 봄을 볼 수 있을 만큼은.
*
잠에서 깨어나니 어느새 햄스터 집 안이었다.
나는 극단적으로 팍 눌린 한쪽 뺨을 더듬다가 나른하게 하품했다. 그리고 재빨리 내 몸을 확인했다.
‘휴…….’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아무것도 입혀지지 않았다.
내가 잠들기 전에도 거의 완성한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영 못 입힐 물건이었나 보다. 나는 작은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게 꼭 맞는 그네에 털썩 앉았다.
‘이제 문제는 이 망해 버린 기적 수치인데…….’
나는 시스템 창을 열어 내가 가진 기적 수치를 확인했다.
[현재 기적 수치 19.0%]
‘아주 싹싹 끌어다 썼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로는 ‘불러오기’를 써도 한 시간이 고작이다. 적어도 두 시간은 돼야 돌아다니기 편한데. ……대체 30분일 때는 어떻게 다녔지?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 한다고…….
[=3 =3 =3]
안다. 나도 안다고. 그때는 도망만 다녔던 거.
그것도 처음엔 카일의 셔츠를 입고, 두 번째는 메이드복을 입고서였다. 셔츠는 아무한테도 안 들켰다지만, 메이드복은 사용인들은 물론이고 카일한테까지 들켰다. 거기다 한순간의 실수로 반려 변태가 되기까지…….
―…….
갑자기 아연해져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때를 생각하면 카일이 만든 거적은 양반이 아닐까? 팔을 어디다 끼워야 할지 모르겠기는 해도. 목을 넣었다가는 숨을 못 쉴 것처럼 생겼긴 해도.
……역시 안 괜찮다.
나는 머리를 흔들어 잡생각을 쫓아냈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찍! (내 기적 수치!)
그게 문제라고!
[\(〇_o)/]
나는 깜짝 놀란 듯한 시스템의 이모티콘을 무시하고 그네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햄스터 집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곰곰이 생각했다.
애초에 기적이라는 게, 꼭 죽을 사람을 살리는 것만이 기적일까?
여태 카일의 수명을 늘리는 데만 급급해서 신경 쓰지 못했지만, 사실 그와 센의 관계를 가깝게 만들었을 때도 약간이지만 수치가 올랐었다.
그 말인즉, 어쨌건 미래를 더 나은 방향으로 틀면 기적 수치로 계산이 된다는 거다.
아무렴.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모든 흐름이 운명이라면, 지금보다 괜찮은 삶을 사는 것 역시 운명을 바꾸는 게 되니까.
나는 카일이 넣어 준 인형을 베고 벌러덩 누웠다.
[_(:з)∠)_]
고민을 거듭해 봤자 그럴듯한 답은 나오지 않는다.
이럴 땐 마법의 단어가 있지.
내일의 일은, 내일의 내가 알아서 하자.
당장은 방법이 없어도 아득바득 살다 보면 어떻게든 되더라. 그걸 찾지 못한 사람들은 무너지는 거다. 이 땅의 사람들처럼.
<겨울의 심장>에서 블레이크 영지는 카일을 잃은 뒤, 천천히 쇠락해 갔다.
정리되지 않은 마물들이 남하하는 동시에 구심점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공포에 질려 영지를 떠났고, 물자의 보급이 끊어져 더는 생명이 살기 힘든 폐허가 됐다.
뭐라더라. 잠깐 넘겨본 후반부에서 블레이크 영지를 두고 사람들이 하던 말이 있었는데. 분명…….
[서리 귀신이 나오는 폐성. 사람들은 차갑게 얼어붙은 성을 가리켜 그렇게 칭했다.]
그래. 서리 귀신이 나오는 폐성.
나는 고개를 들어 깔끔하게 정돈된 창문과 미약하지만 온기가 느껴지는 훈훈한 내부를 둘러보았다. 곳곳에서 성을 아끼는 여러 사람의 정성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센도, 그리고 그녀와 일하던 하녀들도 모두 성에서 일하는 것을 즐거워했다. 카일이 엄격한 군주가 아니기도 했거니와 어쩐지 하녀들과 기사들까지 전부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 같은 모습이었지.
그렇기에 더 신경이 쓰였다. 만약에 내가 카일을 살리는 데 실패한다면, 이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휴…….”
나는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복도를 걸었다.
이래저래 지내면서 정이라도 들었는지, 이왕이면 블레이크 영지 사람들도 카일 한 사람에게만 의존할 게 아니라 스스로 겨울을 나는 방법을 찾았으면 했다.
구심점이 무너져도 주저앉지 않게. 물론, 카일은 무슨 수를 써서든 살릴 생각이지만.
“어휴. 잡는 데 한참 걸렸네.”
“날아다니는 마수는 사냥이 힘들어.”
복도를 하염없이 걷던 나는 손에 새 같은 짐승을 쥐고 있는 병사들과 딱 마주쳤다.
“어! 마수학자님! 몸은 괜찮으십니까?”
“어? 네, 네! 괜찮죠. 완전 괜찮습니다.”
“돌아오셨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는데…… 와, 그 절벽에서 떨어지시고도 정말 대단하십니다.”
나는 얼떨떨하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어서 몰랐는데, 잘 보니 이전에 같이 정찰을 나갔던 신입 기사들이었다.
“어디 다녀오시는 길입니까?”
“마수 사냥입니다. 위험한 마수는 아니지만, 이게 또 마을에서는 꽤 별미라서…….”
기사 중 한 명이 들고 있는 마수를 내 눈앞에 내밀었다. 하얀 깃털에 오동통한 몸체.
‘음.’
그러니까, 오리다.
아무리 봐도…… 오리다.
마수라고는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살이 잘 오른 오리다.
잠깐. ……오리?
“잠깐, 잠깐만. 그거 어떻게 하시게요?”
“어…… 구워 먹든가 튀겨 먹든가 해야겠죠?”
구워? 튀겨? 뜨끈한 국물에 푹 삶아서 몸보신하는 게 아니라?
그러고 보면 북부 음식은 거의 다 튀기거나 구운 것 위주였다. 맛있긴 한데, 전체적으로 너무 기름졌다. 사시사철 기온이 낮은 블레이크 영지에서는 그런 것보다 국물 요리가 더 좋을 텐데. 조리법이 없는 건지 뭔지.
“그거, 저한테 주세요. 제가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네?”
나는 꼬질꼬질한 기사 두 명을데리고 주방으로 갔다. 그리고 하녀들에게 주방 사용을 허락받은 뒤, 팔꿈치까지 셔츠를 걷었다.
자취 경력이 무려 7년이다. 백숙이야 금방 하지.
나는 칼을 들고 오리의 목을 뎅강 잘랐다. 그리고 끓는 물에 바로 넣을 수 있도록 모든 손질을 끝마쳤다.
참고로 이건 아르바이트 다닐 때 배웠다. 최저 시급도 안 주던 쓰레기 사장이었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배웠었지. 특히, 노동청에 시급 미지급 건으로 신고하는 방법을 톡톡히 배웠다.
“이건 버릴까요……?”
오리 배 안에 쌀을 채워 넣고 있는데, 옆에서 손질을 거들어 주던 기사가 수북이 담아 둔 깃털을 보고 물었다.
“아니, 이 귀한 오리털을 왜 버려요! 북부 사람들은 추위도 안 탑니까? 옷 만들어 입어야지!”
자고로 파카는 오리털 파카가 최고다.
나는 오리털이 담긴 바구니를 소중하게 챙겼다. 그리고 하녀들에게 가져가 손짓 발짓으로 설명했다. 털을 이만큼 모아서 누비를 하면 옷이 더 따뜻해진다고.
과연, 오랫동안 블레이크 영지를 맡아 온 하녀들은 곧잘 내 의도를 눈치챘다. 재미있어 보인다며 삼삼오오 모여선 바느질을 시작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전생에 힘들게 살았던 게 다 도움이 되는구만.
나는 뿌듯하게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물이 끓어서 마수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기사의 외침을 듣고서야 얼른 주방으로 돌아갔다.
어쩐지 북적북적한 게 명절이라도 되는 것 같아서 이상할 만큼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