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툭, 떨어진 몸이 도톰하게 쌓인 톱밥 위에 한 바퀴 떼굴 굴렀다. 나는 바닥에 대자로 뻗어 한숨을 내쉬었다.
‘불러오기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이거라도 없었으면 꼼짝없이 죽을 뻔했다. 불행한 사고사는 한 번이면 족하다. 특히 떨어지면 시체도 못 찾을, 그런 곳에서는.
―찍. (에휴.)
그보다, 카일이 걱정인데.
단단한 듯하면서도 정이 많은 성격이다. 하물며 지켜 주겠다고 말한 상대를 눈앞에서 놓쳐 버렸으니 상심도 꽤 클 것이다. 돌아간다고 말하긴 했지만,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믿기 어려운 말이고.
그렇다고 거기서 견과류 상점을 열거나 그와 함께 떨어질 수는 없었다. 상점을 열기엔 이미 늦었고, 그와 함께 떨어지기는 싫었다.
너만 나를 지키는 게 아니라, 나도 너를 지켜야 하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복잡 미묘한 기분은 영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찜찜함을 느끼며 이리저리 돌아눕다가 작은 손으로 옆구리를 벅벅 긁었다.
그래도 이젠 익숙한 장소라고 이렇게 있으니 노곤하게 잠이 쏟아졌다. 많은 일이 있었던 만큼, 체력도 바닥이 나 버렸나 보다.
결국, 불가항력으로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돌아오면 사과해야겠지.’
그렇게 사라져서 미안하다고.
*
벌컥.
평소보다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한참 잠들어 있던 나는 그야말로 펄쩍 뛰어올랐다. 살살 좀 다녀라! 햄스터 간이 얼마나 작고 연약한데!
“전하.”
서재로 들어온 사람은 카일과 그의 기사들이었다.
부상을 돌보지도 않은 건지 카일의 팔은 여전히 불편해 보였다. 옷도 흙먼지나 피 따위로 얼룩져 있고, 전체적인 행색은 엉망이다 못해 무시무시해 보였다.
쾅―!
성큼성큼 걸어 들어온 카일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리고 양손으로 테이블을 짚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느 때보다도 험악한 기세에 뒤따라온 몇몇 기사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이 보였다.
확실히 방 안의 온도가 1도쯤 내려간 것 같다. 나는 톱밥을 끌어다 내 몸에 덮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전하. 벌써 이틀째 주무시지도 않으셨습니다. 우선은 휴식을 좀 취하시는 것이…….”
문간에 있던 기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카일은 그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낮게 중얼거렸다.
“물러가 있어라.”
저들끼리 시선을 나누던 기사들이 고개를 숙이고 서재를 나섰다.
묵직한 문이 닫히자, 세상은 그야말로 고요해졌다. 그 가운데 홀로 선 카일의 목소리는 더 낮은 곳으로 침잠했다.
“……네가 아니어도 되었을 텐데.”
마음이 불편했다.
새삼스럽지만, 혹독한 북부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해 규격 외의 존재들과 싸워 온 그는 벌써 숱하게 많은 이들의 죽음을 겪었을 것이다. 나는 감히 상상할 수조차 없는, 책에서조차 읽은 적 없는 많은 일이 있었겠지.
<겨울의 심장>에서 세레나가 묘사했던 카일의 첫인상도 그랬다. 수많은 죽음을 어깨에 진, 불쌍한 남자.
내 앞에서는 늘 주접이나 떨고 뽀뽀나 해 댔다 보니 솔직히 실감을 못 하고 있었다.
필요한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다는 그의 주위에 왜 사람이 많지 않은지. 그가 이런 식으로 잃은 사람은 또 얼마나 많은지.
조금만 기다려, 카일.
조금만 더.
늦지 않게 찾아갈 테니까.
*
그동안 정말이지 캐슈넛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만 보길래 몸을 비비며 살갑게도 굴어 보고, 내 인생 최초로 먼저 뽀뽀도 해 주었다.
그러고도 침울해 보이는 게 신경이 쓰여, 나중엔 마카다미아를 들고 와 그의 앞에서 먹방도 찍어 주었다. 요즘 기름지고 좋은 것만 먹어서 입이 고급이 됐는지 당장 내던지고 고기나 달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래도 꾹 참고 다섯 개나 먹어 치웠다.
야. 키우는 햄스터가 푸드 파이터가 됐으면 쳐다보는 시늉이라도 해라. 나, 잘 먹고 있잖아.
배가 불러서 그의 손바닥을 짚고 푹 퍼지자, 카일이 드디어 유의미한 반응을 보였다. 손가락으로 정확히 내 이마를 두 번 쓰다듬어 주고, 나를 숨집에 넣어 주었다.
그러니까, 결국엔 전부 쓸데없는 짓이었다는 거다. 나는 서재의 불을 끄고 나가려는 카일을 바라보며 투명한 벽에 바짝 붙었다.
―찍! (야!)
―찍찍! (재롱부려 줬잖아!)
그러나 카일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내 외침도 듣지 못하고 그냥 문을 닫아 버렸다.
이게 대충 한 시간 전의 일이다.
나는 고민을 반복하다가 결국, ‘불러오기’를 썼다. 그리고 옷장에서 적당한 옷을 꺼내 입고 카일의 방으로 향했다.
원래는 내일 아침에 그러니까, 카일이 성에 오고 난 다음 날 나타나려고 했었다. 절벽에서 떨어진 사람이 영지에 먼저 도착해 있으면 수상하잖아. 어떻게 살아남았냐는 의심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빨리 왔냐는 의심까지 받으면 두 배로 피곤해진다.
그래서 일단은 캐슈넛의 모습으로 재롱을 부려서 기분을 풀어 주려 했던 건데.
“휴.”
나는 카일의 방 앞에서 한숨을 쉬었다. 아직 잠들기엔 이른 시간이라 만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시간에 남의 침실이라니. 미심쩍다 못해 변태 같아 보이긴 하지만, 이미 반려 변태로 찍힌 마당에 다를 것도 없다.
똑똑.
예의상 노크는 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나는 문고리를 내렸다. 벌써 불을 껐는지 방 안은 불빛 하나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걷어 둔 커튼에서 희미한 달빛이 새어 들어왔다.
벌써 자나.
역시 내일 올 걸 그랬다, 생각하는데.
“슈?”
어둠 속에서 나타난 카일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나는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막 씻고 나온 듯, 가운을 걸친 그의 머리칼이 젖어 있었다.
야, 인마. 기척 좀 내고 다녀라.
“대체 어떻게…….”
적잖이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마치 귀신이라도 본 양, 눈앞에 있는 내가 진짜인지 살피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손목을 놓나 싶더니―.
“너, 뭐야.”
대뜸 멱살이 붙잡혔다.
‘얘가 왜 이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다. 나는 양손을 펼쳐 들어 ‘나는 무해합니다’ 하는 제스처를 취했다.
“이제 반려도 못 알아보십니까?”
부러 농담을 섞어 태연자약하게 말했다. 그러나 카일의 얼굴은 여전히 흉흉했다.
“마법사인가? 어떻게 돌아왔지?”
“……무슨 소립니까?”
“계단에서 떨어질 뻔했을 때도 그렇게 사라지더니. 대체 어떤 마법을 썼길래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냐고 묻는 거다.”
나는 잠시 얼빠진 얼굴로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고 있자니 눈높이에 시스템이 반짝 떠올랐다.
[무법 지대와 가장 가까운 ‘서리의 마탑’에서 이상한 동향이 목격되었다. 카일은 오랜 숙적인 북서부 마법사단과 담판을 지을 생각마저 했다.]
‘북서부 마법사?’
카일이 나를 마법사라고 의심한다는 건가?
하긴, 그 높이에서 떨어지고도 살아남으려면 기적이거나 마법을 썼거나 둘 중 하나긴 하다. 하물며 상처도 하나도 없으니까. 시스템한테 부탁해서 좀 만들어 놓을 걸 그랬나…….
“진정하십쇼. 일단, 이것 좀 놓고.”
나는 내 멱살을 쥔 카일의 손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그는 수상한 것을 훑는 듯한 시선을 하면서도 어쩐지 조금 기뻐 보였다.
[현재 보유 현황 | ❤×10]
……멱살을 잡은 채로도 행복할 수 있다니. 내가 살아 돌아온 게 그렇게 기쁘냐.
“묻고 싶은 게 많아 보이는데, 딱 세 개만 물어봐요. 다 대답해 드립니다. 아. 일단 마법사냐는 질문에 대답해 드리자면, 아닙니다.”
그가 잠시 날카로운 눈으로 나를 보았다. 뚫리겠다, 뚫리겠어.
“어떻게 살아 돌아왔지? 그 절벽은 아래가 보이지 않을 만큼 깊다. 네가 떨어지고 수색에 나섰으나, 내가 줬던 망토밖에 발견하지 못했어. 그런데 이렇게, 멀쩡히 살아 돌아왔다고?”
“이거요.”
나는 오른쪽 손을 들어 올렸다. 영롱한 파란색 보석이 매달린 팔찌가 은은한 색으로 반짝였다.
“행운을 가져오는 팔찌라더니, 정말인 것 같더라고요. 떨어지다가 운 좋게 나뭇가지에 걸렸습니다. 착지는 수풀에 했고요. 그래서 무사히 목숨 부지한 거죠.”
물론, 구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가 댁 반려 햄스턴데 불러오기라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인간이었다가 햄스터로 돌아왔습니다, 라고 할 순 없잖아.
카일은 여전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래도 일단은 납득해 보려고 애쓰는 모양이었다.
“믿을 만한 근거는 없는 거 압니다. 그래도 좀 믿어 봐요. 난 전하 편이라니까.”
“입에 발린 소리는 누구나 할 수 있다. 믿으라는 말도 마찬가지야.”
“그럼, 제 목숨까지 걸었다면 믿을래요?”
“무슨 뜻이지?”
그제야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그 손을 조심히 잡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제가 전하한테 목숨을 걸었다고요. 전하의 미래가 곧 제 미래다, 이 말입니다.”
그가 이상한 사람 보듯이 나를 봤다.
안다. 사기꾼 같을 거. 나도 이렇게 말하기 싫은데 둘러댈 말이 없잖아. 그리고 저 말이 사실이기도 하고.
“마지막 질문은 유효한가.”
“예. 하십쇼.”
카일은 답지 않게 망설이고 있었다. 나는 인내심을 가지고 그의 침묵을 기다려 주었다. 다행히 오래지 않아,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친 곳은?”
“…….”
말문이 막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방금까지 의심하고 있었던 상대에게 하는 말치곤 참 무르다.
나는 괜히 목덜미를 문지르다가 헛기침과 함께 대답했다.
“……큼. 다친 곳, 없어요. 그냥 좀 긁힌 정도고. 저, 회복력 좋은 거 아시죠? 금방 낫습니다.”
그러니까 제 몸 좀 그만 살피십쇼, 전하.
나는 애써 그의 시선을 무시하며 시스템 창을 살폈다.
오래가는 도토리 쿠키랑 헐레벌떡 아몬드 휘낭시에까지 먹었더니 기적 수치가 아주 바닥을 친다. 10퍼센트 대까지 내려가 버려서 자연스럽게 불러오기 시간도 1시간으로 줄어 버렸다.
[앞으로 15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시간도 늦었고, 전하도 주무셔야 하니까 저는 슬슬 가 보겠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에 찾아왔네.”
너스레를 떨며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다. 오해도 풀었고, 할 말도 다 했고. 한 시간 정말 알차게 썼다.
그러나 내 뒷걸음질은 문까지 닿지 못했다. 카일이 멀어지는 내 손목을 붙잡고 단단히 버텼기 때문이었다.
“……정말 가둬 둘까.”
글쎄, 소용없다니까.
나는 잡힌 손목을 힘주어 당기며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아쉽게도 통금이 있어서요.”
무려 한 시간짜리 통금이다.
“정 적적하면 그거나 하면서 기다리시죠.”
나는 턱짓으로 침대맡에 있는 뜨개질 세트를 가리켰다. 시선으로 내 턱짓을 따라가던 카일은 어림도 없다는 듯 팔을 당겨 나를 품에 안았다.
……야, 야. 뭐 하냐.
“네 방까지 갈 것 없다.”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푹신한 침대가 내 어깨를 떠받치는 것이 느껴졌다.
15분 남았다니까!
[(/へ\*) ]
주책맞게 부끄러워하지 마라.
‘이걸 진짜 어떻게 하냐.’
나는 꾸물거리다가 그를 밀쳐 내기 위해 양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 그대로 굳었다.
“…….”
그가 잠들었다.
누운 지 1분도 안 되었는데 카일이 잠에 빠졌다. 눈을 감은 채로 고르게 내뱉는 숨이 한없이 느리고 부드러웠다.
지치긴 했을 것이다. 예상외의 일이 벌어졌으니 돌아오는 내내 신경이 곤두서 있었을 테고, 부상도 있었고, 돌아와서도 내 걱정을 하느라 내내 안심하지 못했을 테니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안심한 얼굴로 잠드는 건 반칙 아닌가.
나는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고단해 보이는 얼굴을 15분간 그저 바라보다가, 다시 바라보다가.
[앞으로 10초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잘 자, 카일.”
네 곁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