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고블린이다! 떨어지는 바위에 피해 입지 않도록, 절벽 근처에서 떨어져라!”
우리는 어느새 마수 무리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것들은 바위나 나뭇가지, 절벽 틈새에 제 몸을 숨기고 음산한 목소리로 킥킥거렸다. 얼핏 듣기만 해도 수가 상당히 많아 보였다.
기사들이 동요한 목소리로 웅성거렸다.
“유독 많은 것 같은데?”
“그러게, 이상하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오거나 위협하는 놈들이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흔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부기사 단장님.”
나는 긴장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협곡을 채운 수십 마리의 고블린이 당장에라도 뛰어내릴 것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고블린.
감청색 피부로 뒤덮인 작은 마수는 심술궂은 표정으로 이쪽을 보며 매부리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새카만 눈은 꼭 악마처럼 보였다.
‘영화나 소설로만 보던 것을 직접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
떨 시간이 어디 있냐. 어떻게든 해 봐야지.
기사들이 대형을 갖추어 모여들기 시작했다. 전투 인력이 아닌 사람들을 신입 기사들이 둘러싸고, 그 곁을 정규 기사들이 감싸며 보호했다.
“학자들을 엄호해라! 더 바짝 붙어.”
“거기! 그쪽에 있으면 화살에 맞는다. 더 뒤로 가!”
“……네!”
“겁나는 놈은 뒤로 빠져!”
어떤 신호도 없이 전투가 시작되었다. 기사들은 칼을 뽑아 들고, 고블린은 포효하며 달려들었다.
날붙이가 휘둘러지는 소리, 마수의 울음, 흙먼지가 일어나도록 몸을 움직이는 소리가 가득했다.
그 소란 속에서 나는 카일의 등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혼자서 열 명의, 아니, 스무 명의 기사들의 몫을 해냈다. 그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사방에 고블린의 검은 피가 비처럼 뿌려졌고, 수많은 사체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 말대로였다. 담백하게 이어지는 문장에는 어떤 과장도 없었다.
카일은 느린 춤을 추듯이 움직였다. 중력을 거스르듯 허공으로 떠오른 몸은 절벽을 짚고 가볍게 돌거나, 마치 뿌리라도 내린 듯 그 자리에 굳게 서서 검을 횡으로 긋기도 했다.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묵직하고 서늘한 분위기의 영화라도 되는 것처럼 움직이는 모습에 오히려 현실감이 사라져 버렸다.
솔직히 대단했다.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의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강한 남자가 왜 세레나의 손에 죽었을까?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할 것 같은데.
[오직 한 자루의 검으로, 불굴의 투지와 압도적인 강인함으로 북부를 제패한 자. 척박한 황무지에 ‘블레이크’라는 이름을 붙이고, 마수에게서 빼앗은 영토에 갈 곳 잃은 이들의 터전을 만든 이.]
몇 줄의 글로는 다 설명하기 어려운 위엄이 그에게 있었다. 투쟁의 흔적이 쌓아 올린 단단한 뒷모습은 그 어떤 바람에도 감히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고블린의 습격은 생각보다 금방 정리되었다. 연구자 몇 명이 사체에서 필요한 것을 챙겨 자루에 담았고, 기사들은 다시 말에 올랐다.
길게 이어진 협곡은 고요했다. 사람들은 그 정적에 안도한 듯 다시 저들끼리 몇 마디씩 말을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서 오직 나만 불안했다.
‘……이게 아닌데.’
<겨울의 심장>의 내용에 따르면 카일의 부상을 초래한 건 마수의 습격이 아닌, 북부 지대에 숨어 있던 의문의 병사들로 인한 것이었다.
‘……그럼, 진짜 습격은 이다음이던가? 언제였지?’
가물가물한 원작 내용을 떠올리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더 알려 줘. 더 정확히 알려 달라고.
[(ㅠ×ㅠ )=( ㅠ×ㅠ)]
전부 알려 주는 건 아무래도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일전에 시스템이 했던 말 중, 그런 말이 있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하면 보상 수령 조건이 까다로워질 수밖에 없다고.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밸런스 문제인가 보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조심하세요.”
나는 말에 올라탄 카일에게 말했다. 옷자락에 묻은 피와 먼지를 툭툭 털던 그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고블린이라면 다 죽였다만.”
“고블린 말고요. 진짜 무서운 건 사람이잖습니까.”
수천 마리의 마수조차 당해 내지 못하던 널 죽인 것도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여전히 인상을 구기며 그를 올려다보자, 카일이 검지로 내 미간을 꾹 눌렀다.
“그래.”
“…….”
“조심하겠다고 했다.”
꾸욱. 그가 미간을 재차 눌렀다. 그제야 나는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래. 지금은 내가 있으니까.
‘그러니까 괜찮겠지.’
아니, 괜찮을 것이다.
*
그로부터 세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나는 도토리 쿠키를 세 번 더 먹었다. 결국 세 번째에는 카일이 숨겨 둔 도토리라도 먹냐고 물었다.
……뭐, 비슷하기는 했다. 눈치 빠른 자식.
[현재 기적 수치 22.0%]
고블린을 만났던 협곡 주변을 빙 돌아서 위로 올라온 우리는 말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길이 가파르기도 하고, 말이 발을 헛디디거나 놀라서 달리면 곧장 사고로 이어질 수 있는 지형이기 때문이었다.
“슬슬 돌아갈까.”
“예, 전하. 이만하면 신입 기사들도 많이 배웠을 겁니다. 해가 지기 전에 돌아가시죠.”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그래, 집에 좀 가자. 나는 초조한 표정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30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돌아가는 시간이 있으니, 한두 개는 더 먹어야 할까. 안전지대로 들어가기만 하면 잠시 볼일이 있으니 내려 달라고 한 뒤, 인적 드문 곳에서 돌아가는 게 낫겠다. 옷만 잘 숨기면 괜찮을 테니까.
여전히 습격은 없었다. 마수를 몇 마리 만나긴 했지만, 무리에서 떨어진 변종 와이번이나 회색 곰은 금세 처리되었다.
특히 ‘마수 도감’을 읽은 내가, 변종 와이번의 왼쪽 날개 가시에 독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뒤로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지기만 했다.
‘그보다 슬슬 습격이 올 때가 됐는데.’
……설마, 습격이 일어나지 않는 건가? 하지만 뭐가 달라졌길래 있던 사건이 사라지지? 내가 바꾼 건…….
‘샹들리에.’
벨리알이 샹들리에에 맞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카일의 사이가 예상만큼 나쁘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니 벨리알은 지금 당장 카일을 죽이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카일의 말대로 그는 대공작을 미워하지만, 찍어 누를 수만 있다면 제거할 필요까지는 느끼지 못하니까.
‘그럼, 수명도 늘어났나?’
나는 기대감을 담아 카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5일 남았습니다.]
여전히 그의 삶은 얼마 남지 않았다.
‘습격도 없는데, 대체 왜…….’
쿵.
그때, 지반이 흔들리는 소리와 함께 말이 불안한 목소리로 울었다. 기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다시 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o((⊙﹏⊙))o!]
[□ □□가 □□되었습니다! 균열에서 □□ □□가 □□□□□]
[규격 외]
[위험]
카일은 당연한 것처럼 내 앞으로 나서며 검을 들었다. 나는 동시에 네 개나 떠오른 시스템 창을 확인하다가 오싹한 느낌에 고개를 들었다.
“저게…… 뭐야?”
“이게, 무슨…….”
주춤주춤 물러나던 기사들의 낯빛이 희게 질렸다.
저건 분명, 북부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마수였을 것이다.
거대한 검은 뿔은 염소나 양의 형상을 닮았고, 주둥이는 이상할 정도로 길며, 털에 뒤덮여 있지만 날카롭게 돋아난 발톱으로 바닥을 억세게 쥔 괴물.
그것이 길게 포효하며 두 다리로 섰다.
“……저, 저런 건 본 적도 없어.”
“북부에서 살 만한 놈이 아닌데…….”
나는 기사들과 다른 의미로 놀랐다.
“미친.”
저게 왜 여기 있어?
모를 리가 없었다. 저건 북부에 있을 만한 괴물이 아니다. 숲 깊은 곳에서 늪을 마시며 살아가는 괴물로, 호전적인 성격 때문에 주변 지역에서는 일종의 재난처럼 통한다.
늪 염소.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그러니까, 내 직장 동료들이…….
‘야, 시스템.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내가 개발했던 게임의 몬스터가 왜 여기 나와!’
[혼선]
[잠시 세계에 개입하는 시간을 줄입니다.]
[이 이상 개입하게 되면 □ □□의 힘이]
시스템이 짧게 깜박이더니 사라졌다.
대체 어디 간 거야?
나는 그만 황당해졌다. 아무래도 저 빈 곳은 ‘늪 염소’를 의미하는 것 같다. 내가 시스템을 이용해 이 세계에 간섭한 영향 때문에 내가 기억하던 것이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걸까.
나는 혀를 차며 마수 도감을 인벤토리에 욱여넣었다. 어차피 이 세계에 있어야 할 놈이 아니니, 이 책 어디에도 저것을 쓰러뜨릴 방법 같은 건 없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있다.
“무엇인지 몰라도 상관없다.”
카일이 검을 곧게 뻗었다. 얼굴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 결의가 얼마나 단단한지는 알 수 있었다.
외길에서 모르는 괴물을 맞닥뜨렸더라도 그것이 그가 여태 만났던 다른 것보다 강해서 그 규격을 가늠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카일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가 여기서 물러난다는 것은, 이 땅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았으므로.
“전원, 물러나라!”
카일과 늪 염소가 격돌했다. 그는 양손으로 바투 쥔 칼을 휘두르며 뛰어올랐다.
하늘과 땅을 모두 찢어발길 것처럼 울부짖는 마수에게 달려든 카일은 그것의 왼팔을 찢었다. 쿵, 바위가 떨어지는 것보다 더 큰 소리가 울리고 흙먼지가 여기까지 날렸다.
“……말도 안 돼.”
잘린 곳에서 시커먼 피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것들은 뭉글뭉글하게 뭉치며 새로운 팔이 되었다.
분노한 늪 염소가 상체를 세우고 팔을 크게 휘둘렀다. 예리한 손톱이 톱처럼 나무를 가르면서 크게 바람이 일었다.
기사들이 혀를 내둘렀지만 카일은 놀라지 않았다. 묵묵히 검을 고쳐 쥐고 다시 달려들 뿐이다.
붉은 검기가 사선으로 날아가며 마수의 목덜미에 상처를 남겼고, 카일은 마수의 몸뚱이를 타고 날아 반대편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늪 염소는 팔을 뒤로 뻗어 카일을 움켜쥐려 했다. 엽전 모양의 눈동자는 이쪽을 보고 있는데도, 마치 뒤까지 내다보는 듯했다.
“……눈!”
생각났다. 내가 외쳤다.
“전하! 눈! 이마를 찌르십시오! 미간보다 한 뼘 위에 불룩한 부분!”
늪 염소는 눈이 세 개다. 이마에 숨어 있는 마안은 피부를 뚫고 그 너머를 볼 수 있다. 그래서 시야에 사각지대가 없고, 다루기 까다로운 녀석이다.
“활을 써라!”
블레이크 기사단 중 명사수로 꼽힌다는 이가 시위를 팽팽하게 당겼다. 숨도 쉬지 않고 목표를 겨누던 기사가 마수의 이마를 정확히 꿰뚫었다.
찢어지는 듯한 울음소리가 협곡을 뒤흔들었다. 마수가 광분해서 이쪽으로 팔을 휘둘렀다.
“네 상대는 나다.”
어느새 내 앞까지 훌쩍 뛰어온 카일이 뻗어져 오는 팔을 잘라 냈다. 시커먼 피가 바닥에 흥건하게 흘렀다. 이 고약한 냄새만 아니었다면 조금은 속 편히 응원했을 텐데.
아까처럼 팔은 다시 자라났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어깨에서 반짝이는 조그만 것을 보았다.
“어깨요!”
“뭐라고?”
나는 카일에게 가까이 다가가, 뒤에서 그의 턱을 쥐고 오른쪽으로 살짝 돌렸다.
“저쪽 보세요. 지금 피가 솟아 나오는 쪽에서 조금 더 왼쪽. 아니, 그것보다 더 위에 아주 조그맣게 빛나는 녹색 점. 자세히 보면 비늘 모양일 겁니다.”
“…….”
“보이세요?”
저 비늘은 실제로 어떤 조건이 있어야만 부술 수 있는 특수 아이템이다. 무기나 방패를 만들 때 들어가는 값비싼 물건이기도 했다.
그런 재미가 게이머들을 끌어들일 거라는 기획부의 회의 결과 때문이었지. 덕분에 그걸 적용하는 우리는 죽을 맛이었지만.
어차피 지긋지긋해서 하지도 않을 게임, 이런 정보는 알아서 어디에 쓰나 싶었는데…….
“마력을 담아서 부숴야 합니다. 창 같은 건 못 다루십니까?”
카일이 낮게 웃었다. 감탄과 승부욕이 뒤섞인 목소리는 작았다.
“내게 못 다루는 무기가 있겠나.”
그는 근처의 기사에게 창을 빌려 그곳에 제 마력을 담았다.
창끝에 집중된 마력은 붉게, 다시 붉게, 더욱 붉게 타오르다가 이내 그 모든 빛이 모여 새카매질 정도로 짙은 색을 머금었다.
그리고 화살처럼 쏘아진 창이 늪 염소의 어깨를 스쳤다. 그것이 불편한 듯 괴성을 내질렀다.
아쉽게도 약점을 단번에 꿰뚫지 못했다. 그러나 카일은 포기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맹렬하게 달려들었다. 앞발에 맞아 날아가도 다시 일어섰고, 바위에 등을 부딪쳐 잔기침을 토해 내면서도 검을 쥐었다.
카일 제인 마인하트르는 검을 휘둘렀다. 창을 던졌다. 흠뻑 쏟아지는 피 때문에 무거워진 망토를 내던졌다. 두 다리로 땅을 디디고, 날아오르고, 다시 내려앉고, 바닥에 구르고…….
그건 긴박감 넘치거나 멋진 액션 같은 게 아니었다. 소설로 읽을 적, 얄팍하게나마 멋있을 것 같다고 상상하던 그런 것과는 달랐다.
그건 그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그의 전부를 걸고 임하는 처절한 혈투였다.
그 간절함에 나는 어떤 말도 쉽사리 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식으로 살아왔을 그가, 그의 삶이, 아득할 만큼 눈부시게 보였다.
“카일.”
[지금 개입하면 위험,]
나는 시스템 창의 경고를 무시한 채 상점을 열었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 본능적인 예감이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헐레벌떡 아몬드 휘낭시에 |기적 수치 3% 소모|달리기 속도가 빨라집니다.]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바꿀 수 있다. 나는 그것을 위해 이곳에 왔으니까.
그러나 운명이라는 것에는 관성이 있어서, 기어이 자신이 정해 둔 흐름대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곤 한다.
지금처럼.
“내가, 진짜…… 큰마음 먹고 3퍼센트 써 준다.”
히든 퀘스트, ‘운명 공동체’로 얻은 기적 수치 3퍼센트. 네 인생에 걸어 들어왔기에 얻은 값을 돌려준다고 생각하면 억울하지는 않다.
나는 휘낭시에를 한입에 욱여넣고 대충 씹은 뒤 삼켰다. 밀가루 덩어리가 목구멍을 긁는 감각이 불쾌했다.
그러나 먹먹한 속을 달랠 시간도 없었다. 나는 순식간에 그에게 뛰어갔다.
한쪽 팔이 잘린 늪 염소가 반대편 팔을 두르며 몸을 웅크리더니, 벼랑 끝까지 내몰린 카일에게 달려들었다. 아마 그를 쳐서 낭떠러지 아래로 날려 보낼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렇게는 안 되지.
나는 재빨리 그를 가로챘다. 돌진하던 늪 염소가 그대로 방향을 잃고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지는 것이 얼핏 보였다.
하지만 우리도 부딪친 충격을 피하지 못하고 바닥을 굴렀다. 그가 반사적으로 내 몸을 감싸려 했지만, 부상 때문인지 미끄러지는 나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내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 벼랑 끝에 걸린 것이다.
“슈!”
카일이 재빨리 오른손을 뻗어 내 손목을 쥐었다. 맞잡은 손이 축축했다. 흘끗 보니 아무래도 팔을 좀 다친 듯 피가 묻어났다.
“조금만 기다려라. 금방 올려 줄 테니까.”
카일의 뒤편에서 기사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콰득, 하고 그와 내가 버티고 있는 지반이 크게 흔들렸다.
“가까이 오지 마라!”
카일이 등 뒤를 향해 재빨리 외쳤다. 아무래도 전투의 영향으로 지반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진짜 벼랑 끝에 몰렸네.’
나는 한숨을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매달린 사람을 끌어 올리기는 쉽지 않다. 하물며 부상을 입은 상태라면 말할 것도 없다. 그래도 이만큼 버티는 걸 보면 상처가 심하지는 않은 모양인데.
다행이다. 어디서 맥없이 죽진 않겠네.
“괜찮으니까, 놔요.”
“미친 소리 하지 마라.”
“이대로 고집부리면 우리 둘 다 떨어져서 죽는다니까요.”
나는 살 수 있다. 떨어질 때 ‘불러오기’를 해제하면 되니까.
하지만 그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카일까지 살려 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아이템을 쓸까 생각도 했지만, 설명도 없이 쓰기에는 상황이 좋지 않은 데다 기적 수치를 너무 많이 쓰게 된다.
머릿속으로 계산을 반복하는 동안, 카일의 팔이 떨리고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먼저 놓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나는 결국 그를 어르듯이 퍽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돌아갈게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기적의 힘으로.”
나는 자신 있다는 듯이 씩 웃으며 속으로 딱 셋을 셌다. 그리고 카일이 입을 달싹이는 순간, 그의 손을 놓았다.
몸이 까마득한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점점 작아지는 그의 얼굴을 보던 나는 결국 웃음을 멈추었다.
카일은 뻗은 손을 거두지도 않고 떨어지는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얼굴이 창백하다 못해 희게 질려 있어서, 어쩐지 나마저 가슴이 싸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흩날렸다.
안개가 눈앞을 불투명하게 뒤덮고, 새하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
[‘불러오기’를 해제합니다!]
그런 표정 짓지 마, 카일.
다시 돌아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