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27화 (27/129)

27

“죽을 것 같네…….”

진짜 글자 그대로였다. 다리가 아프다 못해 감각이 없었다. 나는 흐린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세상이 흙빛으로 보였다.

말 타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 몰랐다. 달리는 건 말이 달리는데, 왜 내가 이렇게까지 힘든 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심지어 땅이 울퉁불퉁해서 그런지 멀미까지 난다. 아…… 진짜 살려 줘.

“조금만 힘내거라.”

목이 닳도록 앓는 소리를 냈더니 등 뒤의 카일이 위로하듯이 말했다.

물론, 위로는 안 됐다. 앞으로 꼬박 몇 시간은 더 말 위에서 보내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지금이라도 ‘불러오기’를 해제하고 햄스터 집에서 적당히 뒹굴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에효. 내 팔자야. 고단하고 기구한 내 팔자야.

우중충한 표정으로 고삐만 겨우 쥐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까악, 하는 소리가 울렸다. 북부 까마귀들이 하늘을 둥글게 돌며 기분 나쁘게 울어 대고 있었다.

“왜 짖고 난리야, 불길하게.”

“……보통 새가 짖는다고 표현하나?”

“말 안 되면 다 짖는 거죠, 뭐.”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며 고개를 내려 앞을 바라보았다.

성을 나와 평야 지대를 벗어나니 침엽수가 빼곡히 들어찬 숲이 나왔다. 지대가 썩 좋은 편이 아닌 데다 군데군데 협곡을 지나야 하기도 해서, 말들이 두 마리씩 줄지어 나아가야 할 정도였다.

“그렇게 걱정할 것 없다.”

카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 표정이 어두워 신경이 쓰인 모양이다.

“신입 기사들을 데리고 나선 정찰이니만큼, 삼림 지대까지만 가볍게 살피고 돌아갈 것이다. 작정하고 나서는 토벌이나 조사가 아닌 이상, 작은 산 너머까지 향하는 일은 많지 않지.”

“작은 산……?”

동산 다 얼어 죽었냐? 두 번 작았다가는 단체로 실족사하겠다.

나는 십여 걸음 너머로 펼쳐진 까마득한 낭떠러지를 보며 혀를 찼다.

“그 너머에는 뭐가 있는데요?”

“마수 말인가?”

“아, 아뇨. 딱히 마수보다는…… 마을 같은 게 있나 싶어서.”

그 말에 카일은 별 실없는 소리를 듣겠다는 듯 웃었다.

“북부에 사람이 살 만한 터전은 블레이크 영지가 유일하다. 뭐, 마수들이 모인 마을은 있겠군.”

“……그건 정말 반갑지 않은 소식이네요. 그럼, 지리적으로는 뭐가 있는데요?”

“이 삼림 지대를 넘어가면 까마득한 벌판이 있는데, 군데군데 얼음덩어리와 바위가 있어 암석 지대라고도 부른다. 그 너머로는 다시 큰 산이 이어지고, 이후로는 바다가 이어지지.”

세차게 부는 바람에 그가 소매를 들어 내 얼굴을 가려 주었다. 세세한 배려가 몸에 밴 듯 자연스러웠다.

나는 고개를 젖혀 그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칼바람에도 눈 하나 까딱하지 않는 것을 보니, 추위에 어지간히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얼어붙은 바다 너머로는 웬만해서는 가지 않는다. 거기까지 다다르기도 힘들거니와, 가서도 썩 좋은 꼴을 볼 수 없어.”

바다가 얼어 봤자 그냥 바다 아닌가? 나는 그게 이상해서 그에게 질문했다.

“왜요? 무법 지대라도 됩니까?”

“그래. 마인하르트 제국이 감당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바다 너머에서는 나조차도 목숨을 아껴야 해.”

대체 뭐가 있길래?

여러 가지 경우의 수를 생각하고 있자니, 내내 조용하던 시스템이 나와서 설명을 도왔다.

[북부 바다 너머의 지역은 ‘마법사의 영토’라고 불립니다.]

‘마법사의 영토, 라. 이름만 들어서는 상당히 점잖게 들리는데…….’

하지만 카일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아닌 듯했다. 뭐,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오늘 갈 것도 아니잖아.

“전하. 북동쪽 길로 돌아갈까요?”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카일이 잠시 말을 멈추고 길을 가늠했다.

앞으로 이어지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 있었다. 북동쪽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과 북서쪽 협곡으로 내려가는 길로 보였다.

북동쪽이라는 단어에 기사들이 술렁거렸다. 불안감이 담긴 웅성거림이 바람을 타고 흘렀다.

카일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와이번 둥지가 있는 지역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또한, 산란기이므로 북동쪽을 피한다. 전원, 서쪽 협곡으로 우회한다!”

……우회한다면, 시간이 더 걸린다는 뜻인가?

나는 떨떠름하게 ‘불러오기’ 시간을 확인했다.

[앞으로 20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협곡 한복판에서 갑자기 사라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서 웬만하면 자리를 지켜야 하는데……. 오늘 기적 수치 다 털리겠네. 아이고, 내 목숨.

나는 재빨리 ‘견과류 상점’을 들어가 쿠키를 샀다.

[오래가는 도토리 쿠키 |기적 수치 1% 소모 | ‘불러오기’ 시간 1시간 연장]

[현재 기적 수치 25.0%]

모쪼록 20퍼센트대만 유지해 보자고. 부지런히 좀 다닙시다, 대공 전하. 기왕이면 여섯 시간 내로 영지에 도착하면 참 좋겠는데.

그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먹었다. 와작, 하는 소리에 카일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뭘 그렇게 숨어서 먹지?”

가는귀 진짜 좋으시네. 모른 척 좀 해라.

“제 목숨입니다.”

순도 100퍼센트의 진심이었다.

“별 소릴 다 듣는군.”

물론, 카일은 농담으로 들었다.

진담이라니까. 목숨 팔아 산 도토리 쿠키라고. 고소한 것 같으면서도 다 먹고 나면 입안이 좀 텁텁한 게…….

“뭐, 어쨌든 못 나눠 드린다고요.”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황당하다는 듯한 태도다.

“필요 없다. 그보다…….”

그가 내 턱을 살짝 쥐어 옆으로 돌렸다. 내가 웅얼거리는 발음으로 “뭔데요.” 하고 묻자, 카일이 턱을 쥔 채로 이리저리 돌리며 위치를 잡았다.

“저쪽. 덤불 숲이 보이나?”

하릴없이 두리번거리던 내 시선이 덤불 안에서 반짝이는 무언가에 멈추었다. 동글동글한 눈동자 몇 쌍이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바닥으로 받쳐 안으면 딱 괜찮을 법한 털 동물이었다. 강아지보다는 작고, 쥐보다는 좀 크면서, 동글동글한 귀 사이의 이마에 조그만 뿔이 돋아나 있었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동물인데, 이상하게 낯익은 게…….

“북부 들쥐다.”

뭐라고요?

“성장기가 와서 심장에 마석이 잘 생기면 저렇게 되지. 북부 마수치고는 작은 편에 속한다.”

아니지, 보통 쥐가 저 크기면 많이 큰 거지.

“먼저 건드리지 않으면 비교적 얌전하다. 캐슈넛을 처음 만난 곳도 이 근방이었지.”

카일의 말투가 순식간에 아련해졌다. 성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말랑하고 귀여운 마수를 떠올리는 그의 표정이 차츰 부드러워지더니…….

야, 됐다. 그 말랑하고 귀여운 마수, 네 앞에서 근육통으로 개고생하고 있는 거 안 보이냐?

[현재 보유 현황 | ❤×198]

취소.

많이 그리워해라. 딱 하트 두 개만큼만 더.

“합사를 해 볼까…….”

……잠깐. 미친, 뭘 해?

카일의 중얼거림에 내가 황급히 대답했다.

“아뇨!”

“…….”

“절대 안 됩니다. 마수끼리 합사라뇨?”

“북부 들쥐는 원래 무리 지어 활동할 텐데.”

“그건 북부 들쥐고, 캐슈넛은 반려 마수잖아요. 다른 개체보다 성장도 느려서 아직 심장에 마력도 안 모였는데, 합사했다가 홀라당 잡아먹힐 일 있습니까?”

아무리 집이 넓다지만 나눠 쓰고 싶은 생각은 마수 똥만큼도 없다. 룸메이트 결사반대.

“캐슈넛이 죽어 나자빠지는 꼴을 보고 싶거든 저기서 한 마리만 데려다가 넣어 보세요.”

그날은 너 죽고 나 가출하는 거다. 알았지?

내 살벌한 눈길에 카일이 아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득력이 있군. 알겠다. 돌아가는 대로 마법사들과 회의해서 마력을 주입해야겠어.”

설마, 부작용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마력 주입도 필요 없다고 했다간 너무 사기꾼 같을까. 나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북부 들쥐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근데 나, 평범한 햄스터 아닌가?’

그도 그럴 게 심장에 마석도 없고, 성장할 기미도 안 보이잖아. 아마 저렇게 크는 날은 안 올 텐데…… 안 큰다고 걱정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역시…….”

카일이 북부 들쥐들을 보며 말했다.

“캐슈넛만큼 귀여운 녀석은 없군.”

햄스터 오타쿠 같으니.

[현재 보유 현황 | ❤×200]

그래도 네가 행복하니 됐다.

덕분에 마수 도감을 살 수 있었다. 나는 기지개를 쭉 켜는 척하며 ‘마수 도감’을 슬쩍 꺼냈다.

“자자, 어디 보자…….”

“그게 뭐지?”

“마수학자들의 필수품이자 교과서. 바로 마수 도감이죠. 성격은 좀 심술궂어도 일 처리는 나름대로 잘하는 스승님께서 비싼 돈 받고 팔아 치우신 책입니다.”

[┗|`O′|┛]

왜, 뭐. 솔직히 안 싸잖아. 내 하트 다 털어먹었으면 조용히 해라.

그는 내가 책을 편히 볼 수 있도록 속도를 조금 늦춰 주었다. 협곡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주변이 어두워져서,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대형을 바꾸어 불을 밝히고 사각을 메우며 나아가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고블린, 오거, 와이번…… 곰, 유니콘? 별것이 다 있네요. 북부 독뱀, 숲 인어? 숲에 왜 인어가 있지?”

세상에 진짜 별것이 다 있다. 대한민국은 정말 평범한 곳이었다.

“아, 여기 있다. 북부 들쥐.”

들쥐라는 말에 궁금해진 카일이 도감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북부 들쥐는 그리 위협적이지 않은 개체 중 하나로, 별 볼 일 없는 신체 능력을 자랑…… 와, 말이 심하시네.”

시스템, 일 이렇게 할래? 누가 별 볼 일 없어?

이건 분명 복수하는 거다.

[( ̄︶ ̄)]

“그리고?”

“다른 마수에 비해 마석이 생기는 과정이 복잡하지만, 자리 잡게 되면 간단한 마법을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대체로 대지 속성의…….”

중얼거리며 책을 읽던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 탓이었다.

이거, 나중에 나더러 무슨 마법 같은 것도 쓰라고 할 것 같은데…… 아니지? 아니어야지. 햄스터 팔자 된 것도 서러운데.

[(⊙ˍ⊙)]

‘아니, 뭘 새삼 놀란 표정…….’

쾅!

그때, 우리의 열 걸음쯤 앞으로 거대한 바위가 떨어지면서 바닥이 진동했다.

설마…….

“방어 대열로 바꾼다!”

카일이 팔을 뻗어 내 마수 도감을 덮었다.

“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모두 군사 명령으로, 불복해서는 안 된다.”

전신이 오싹하게 식어 가는 느낌이었다. 내가 네, 하고 대답하기도 전에 카일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말에서 내리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등에 메어 둔 검이 검집을 빠져나오며 창백하게 빛났다.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