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26화 (2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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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뜨기도 전부터 서재는 부산스럽기 짝이 없었다.

카일은 그렇게 좋아하던 뽀뽀도 열 번에서 세 번으로 줄이더니, 이내 내 존재를 잊은 것처럼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오타쿠는 아니어서.

“그 물건은 이쪽으로 옮기고. 옷도.”

“예, 전하.”

“그래. 그렇게 하고. 보고서는?”

“정리되었습니다, 전하.”

“음. 좋다. 그럼, 이제 그 녀석을 불러오도록.”

“마수학자 말씀입니까? 방에 있을지 모르겠는데…… 전하께서 말씀하시기를, 방에 있는 시간보다 없는 시간이 더 길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카일은 인상을 찡그리며 희미한 미소를 그려 냈다.

“그래도 함께 가겠다고 했으니, 기다리고 있겠지.”

“예, 전하. 곧 불러오겠습니다. 그럼 전하께서는…….”

“나는 잠시 마수학 보고서들을 살펴보고 있겠다.”

이내 그는 나를 쓰다듬으며 다녀오겠다고 인사한 후, 마수학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생존과 관련된 문제이니만큼 카일의 얼굴은 전에 없이 진지했다. 작은 지식이 생사를 결정하기 때문이겠지.

레플리카 햄스터를 두고 갈까 싶었는데, 안 그래도 되겠다. 나는 그의 눈치를 힐끔 살핀 뒤 ‘불러오기’를 썼다.

‘지금 기적 수치가 약 26퍼센트…….’

아무리 정찰 중간에 돌아온다고 하더라도 한나절에서 반나절은 걸릴 것이다.

도토리 쿠키를 얼마나 먹어야 할지 모르겠네. 묶음 판매는 안 하나? 그래, 뭐…… 일단 가서 생각하자. 안 되면 돌아간 척하면 되니까.

나는 툴툴거리며 ‘불러오기’를 사용했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이제는 익숙하게 옷을 챙겨 입고, 마치 처음부터 그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병사를 따라 이곳으로 돌아왔다.

내가 서재 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카일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책을 읽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 진지하다 못해 경건해 보이기까지 할 정도였다.

“북부의 바람은 매섭다.”

그가 탁자 위의 상자를 턱짓했다.

“이곳에서 챙겨 입도록. 바로 출발하지.”

나는 상자를 확인해 보았다.

가죽으로 된 튼튼한 부츠와 모자가 달린 긴 외투, 꽤 가볍게 제작된 듯한 활과 화살통까지 야무지게 챙겨 두었다.

“활과 화살은 이번 정찰에서 쓸모가 없을 거다. 하지만 화살통을 고정하는 가죽끈은 하도록 해. 익숙해져야 하니까.”

그 말은 지독하게 불편하다는 뜻이냐.

나는 구시렁거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쩌겠는가. 편한 걸 찾고 싶었으면 애당초 성안에만 얌전히 처박혀 있었으면 될 일이었다.

“저도 준비한 게 있는데요.”

언제 줄지 눈치만 보다가 결국 타이밍을 못 잡았는데, 이참에 답례하는 척하면 될 것 같다.

나는 조심스럽게 외투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척하면서 상점을 불러왔다.

[러브러브 코너~❤]

이놈의 코너 이름은 백 번을 봐도 적응이 안 될 것 같다.

‘어쨌든, 어디 보자. 햄스터용 물건이…….’

[폭신폭신 햄스터 털실! | ❤×10]

[작고 소중한 뜨개용 바늘 세트 | ❤×10]

[직접 만들어 봐요! 햄스터 옷 79선 | ❤×20]

야, 야! 야!

가격이 왜 이래! 죄다 0이 하나씩 더 붙었잖아! 이거 순 사기꾼 아냐?

[o(TヘTo)]

돈은 내가 뜯기게 생겼는데, 가여운 표정은 자기가 짓는다. 황당할 따름이다.

‘그래도 기적보다는 하트 상황이 넉넉하니까, 살 수는 있겠지…….’

앞으로 그냥 싼 값에 나오면 미리미리 사 둬야겠다. 사람 뒤통수를 이렇게 치네. 어쩔 수 없다는 것 같은 그 눈물, 집어넣어라.

[현재 보유 현황 | ❤×185]

내가 정체불명의 털실을 카일에게 차곡차곡 안겨 주고 있자니, 러브러브 코너에 새로운 물건이 하나둘 들어왔다.

[마수 도감 | ❤×200]

그래, 이거지!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혹시 이런 아이템을 주려고 상점을 계속해서 갱신하는 거고, 그럴 때마다 하트나 기적 수치가 필요한 건가?’

그런 거라면 저런 식으로 바가지를 씌워도 조금은 인정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적어도 이런 물건들 때문에 도움을 얻고 있는 건 확실하니까.

다만, 문제가 있다면…….

[현재 보유 현황 | ❤×185]

……하트가 모자라다.

모자라다고. 바가지만 안 씌웠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허공에 삿대질하고 싶은 걸 꾸역꾸역 참았다.

“왜 그러지?”

<직접 만들어 봐요! 햄스터 옷 79선>을 보고서만큼이나 진지하게 읽고 있던 카일이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 그게……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선물은 마음에 드십니까?”

“이런 옷을 좋아할지 모르겠군. 아, 이건 확실히 귀여운데.”

그는 책의 한쪽 면을 펼치더니 내게 보여 주었다. 딸기 모양 자수를 놓은 분홍색 망토가 코앞에 떡하니 펼쳐졌다.

“아…….”

아니, 자식아. 좋아하겠냐? 전지적 햄스터 시점으로 말하건대, 한 대 맞을 거다. 왜냐면 내가 바로 그 햄스터니까.

79개의 도안 중에 왜 하필이면 딸기냐고. 다른 거 없어? 설마, 도안이 다 이따위인 건 아니겠지?

저놈의 딸기. 저 원수 같은 딸기. 스물일곱 살을 먹도록 저런 망측한 프린팅은 실수로라도 걸쳐 본 적이 없다.

“……조, 좋아하겠죠. 근데, 그런 게 취향이십니까?”

“그냥. 이걸 걸치고 있는 캐슈넛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좀 기뻐지는 것 같군.”

카일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나는 얼른 하트 개수를 확인해 보았다.

[현재 보유 현황 | ❤×186]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제 확실해졌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를 행복하게 하면 하트가 생긴다. 그리고 그걸로 내 위기를 모면하거나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살 수 있다.

특히, <마수학 도감>.

이 책에는 분명히 북부 마수의 특징이나 사냥 방법, 약점, 각종 활용법이 적혀 있을 터. 그러니까, 정찰을 앞둔 지금 상점에 추가된 거겠지.

내 생각이 맞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 시스템 창이 가만히 떠올랐다.

[행복한 순간으로 불행한 순간을, 그리고 위험한 순간을 이겨 내세요!]

[행복은 또 다른 이름의 기적이랍니다. (๑˘ꇴ˘๑)]

그래, 알겠다고. 하겠다고.

나는 조그만 코바늘을 촤르륵 펼쳐 보이며 그에게 사용법을 알려 주었다.

예전에 봉사 활동 갔다가 수세미 같은 걸 만들어서 판 적이 있어서 코바늘뜨기는 대충 알고 있다. 당시에는 세상 쓸모없는 재주인 줄 알았는데 이렇게 쓰네. 역시 인생은 모르는 거다.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알려 드릴 건데…… 이런 구성입니다. 초심자인 전하를 위해 제가 특별히! 이것저것 꼼꼼하게 챙겨 왔죠.”

“흠.”

“지금은 정찰 나가야 하니까, 그냥 구경만 하고 넣어 두세요. 너무 요란한 건 말고…… 그놈의 딸기도 좀 덮어 두시고요. 간단한 옷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떠 보시죠. 스웨터도 떠 보고, 바지도 떠 보고.”

“불편해하지는 않겠지?”

한두 번은 참아 준다.

“너무 억지로 입히지만 않으면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머릿속으로 무언가를 열심히 상상하는 듯했다.

[현재 보유 현황 | ❤×195]

……미친.

너무 열심히 상상한 거 아니냐? 대체 뭘 상상한 거야? ……아니, 아니다. 궁금해하지 말자.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다.

“그래도 한동안은 조용하겠죠?”

나는 그와 걸음을 맞추어 아래로 내려오며 말했다. 내가 벨리알에 대해 이야기한 것을 깨달은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큰 사건이 없었으니 한동안은 조용할 거다. 길면 일 년, 짧으면 석 달은 이대로 잘 버텨 내겠지.”

“무슨 연례 행사인 것처럼 말씀하시네요.”

“다를 것 없다.”

카일이 내 어깨를 감싸, 다른 기사들에게 밀리지 않게 했다.

솔직히 편했다. 특혜를 누리는 기분도 들었다. 그렇다고 황송했다는 건 아니다. 분명 받을 만큼 돌려줄 테니까. 기적이든, 행복이든. 어떤 이름으로든 말이다.

“그는 나를 미워한다. 내가 그의 핏줄을 원망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지. 다만, 나를 확실하게 찍어 누를 수만 있다면 딱히 제거해야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할 거다.”

신나게 괴롭혀서 제 발아래 깔아 두려 하지만 죽이지는 않는다.

이유를 뻔히 알 것 같았다. 나는 얄미워 죽겠다는 듯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북부를 관리하기는 싫은 거죠. 하긴, 뭐. 자기가 할 것도 아닌데.”

“그래.”

딱 경비병으로 두겠다는 건가? 안 그렇게 봤는데, 아니, 사실 좀 그렇게 보긴 했는데 진짜 재수 없네.

“이쪽으로 와라.”

카일은 나를 번쩍 안아서 검은 말 위에 태웠다. 어제 탔던 말과는 높이부터가 달라서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나는 팔을 들어 고삐를 어정쩡하게 쥐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카일의 얼굴이 평소와는 살짝 다르게 느껴졌다.

그는 익숙하게 말에 오르더니, 내 뒤에서 팔을 뻗어 고삐를 단단히 쥐었다. 등에 그의 가슴팍이 닿으니 묘하게 안정감이 느껴졌다.

“기대.”

카일이 무뚝뚝하게 말했다. 양쪽 팔을 내 몸에 붙이자 자연스레 그의 품 안에 들어간 꼴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아늑했다. 체구 차이가 그렇게 크게 나는 편이 아닌데도, 탄탄하게 자리 잡은 그의 몸은 제법 기대는 맛이 났다.

“그럼, 사양 않고.”

초심자 주제에 뻗대서 힘 뺄 필요 없지. 나는 마음 놓고 그에게 기댔다.

“도통 긴장이라는 걸 하지 않는군.”

“제가 여기서 같잖은 사양이나 하면서 뚝딱거리면 전하만 피곤해지십니다.”

“맞는 말이지.”

카일이 선두로 나서서 움직이자, 그 뒤로 기사들이 나란히 도열했다. 다각, 다각. 흙먼지가 일어나며 말들이 일제히 걷기 시작하자 땅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캐슈넛 말입니다.”

나는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 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는 데 요령이 없다. 나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하는 것조차도 버거워서 허덕거렸는데, 남을 돌보는 건 오죽할까.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그냥 조그만 마수잖습니까. 반려동물로 들일 줄은 몰랐거든요. 게다가 마법사에, 수의사에, 저한테까지도 이렇게 잘 대해 주시는 걸 보면 어지간히 아끼시는 것 같은데…… 그게 신기해서요. 북부에서 마수는 대개 해치워야 할 과제나 정복해야 할 적으로 통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널 행복하게 할지 모르겠다. 다만, 네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었다. 널 이해해 보고 싶었다.

“블레이크의 사람들은 북부를 개척하지만, 동시에 북부와 공존한다. 인간은 자연을 정복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자연에 소속된 존재야. 그리고 파괴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지.”

카일은 덤덤하게 이어 말했다.

“마수는 위험한 존재다. 방심하다가는 순식간에 사람의 목숨을 앗아 가고, 수년간 일군 터전을 짓밟는다. 캐슈넛도 예외는 될 수 없다. 만일 반려로 들이기에 위험한 존재가 된다면, 그때는 방생하거나 처리해야겠지.”

아니, 그러지 마세요. 안에 사람 들었어요.

“하지만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어린 것을 죽게 둘 수는 없었다.”

내가…… 아니, 그러니까 ‘캐슈넛’이 죽을 뻔했다고?

“무리에 홀로 떨어져 있었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것이 무력하게 떨고 있었지. 내가 그것을 줍지 않았더라면, 아마 한 시간도 견디지 못하고 죽었을 거다.”

“불쌍했습니까?”

“그래. 이상한가?”

“아뇨, 뭐…….”

이상할 리가 있나. 그건 그의 선택이고, 객관적으로 보아도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북방의 패자에게 이런 인도적인 면모도 있을 줄이야.

“고맙다고요.”

짧은 침묵 속에서 카일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하다는 듯, 그러나 기쁘다는 듯 묘한 시선이었다.

“캐슈넛도 그렇게 생각할까?”

“당연하죠.”

“어떻게 장담하지?”

“그야…… 마수학자니까?”

그리고 네 하나뿐인 반려 햄스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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