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캐슈넛. 이제 정말 다녀오마. 마구간에만 다녀올 테니,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손바닥에 나를 올린 카일이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찍 (얼른 가라.)
“자주 자리를 비워서 미안하구나. 본격적으로 마력을 불어넣기 전에 너를 더 신경 써야 하는데.”
―찌찍. (꺼지라니까.)
처음 나가겠다고 말한 지 10분이나 지났다.
나는 작은 앞발로 카일의 얼굴을 냅다 밀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내 반항쯤은 반항으로도 못 느끼는지, 뽀뽀를 다섯 번이나 더 하고 나서야 느지막하게 나를 놓아주었다.
‘드디어 끝났네.’
진이 다 빠진다. 망할 햄스터 오타쿠 같으니.
카일은 나를 숨집에 살포시 내려놓은 후, 몸을 돌려 서재를 빠져나갔다.
엉망으로 헝클어진 털을 정리하던 나는 고개를 쭉 빼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다가 이내 불러오기를 사용했다.
‘시스템! 알지? 그 방으로.’
[o(* ̄▽ ̄*)ブ]
눈앞이 하얗게 번지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엊그제 카일에게서 얻어 낸 새로운 내 방이었다.
나는 새로 산 옷을 갖춰 입고 방을 빙 둘러보았다. 크게 난 창문, 아늑한 벽난로, 푹신해 보이는 침대와 나무로 짠 옷장과 책상. 바닥에는 따뜻한 러그까지.
아무도 안 쓰던 방이라고는 생각할 수도 없게 먼지 하나 없이 말끔했다.
“신경 많이 써 줬네.”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흘리고 옷장을 닫았다.
그날 나가서 샀던 옷은 옷장에 모두 걸려 있었다. 작은 조명과 종이, 펜 같은 건 내가 산 물건이 아님에도 책상에 올라와 있었고, 이불과 베개도 마찬가지였다. 아, 슬리퍼도 있네.
도톰한 커튼을 걷어 바깥을 내다보던 나는 이내 침대에 드러누웠다. 가만히 천장을 보고 있으려니 처음 계약한 월셋집이 생각났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아르바이트를 뛰어서 혼자만의 힘으로 얻었던 집이었다. 고시원만큼 좁았는데, 얻을 때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삼촌이 돈 한 푼 주지 않아서 진짜 힘들었지.
그러니까, 배수현으로 살아온 지난 인생에서 여태 단 한 번도 누가 이런 식으로 지원해 준 적이 없었다. 어릴 때부터 줄곧 혼자였으니까. 뭐든 혼자 견디고 노력하는 게 당연했다.
“……그래서 그런가. 기분이 이상하네.”
나를 위해 돈이며 집은 물론이고, 하물며 지켜 주겠다고까지 말하는 카일의 호의가 낯설었다. 그땐 당연한 것처럼 요구하긴 했지만, 막상 손안에 쥐고 보니 싱숭생숭하다.
“받은 게 미안해서라도 널 꼭 살리긴 해야겠다.”
혼잣말로 중얼거리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침대 바로 옆에 놓인 탁자가 보였…… 응? 잠깐만.
“야, 이…….”
나는 벌떡 일어나 탁자에 놓인 팔찌를 들어 올렸다. 모양이 <충격! 몸에 좋은 마력 흘러나옴!>이라고 등쳐 먹던 그 팔찌와 똑 닮아 있었다.
“어쩐지 키가 작니, 몸이 약해 보이느니 하더니만!”
나는 가슴을 퍽퍽 치며 팔찌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당장 가서 환불하라고 해야지. 아무리 돈 많은 놈이라지만, 어디 가서 등쳐 먹히는 건 못 참는다. 심지어 싼 값도 아니었잖아.
“대공작 자식아!”
나는 문을 열고 방을 나섰다. 마구간에 간다고 했던가? 딱 기다려라. 당장 환불해 준다.
*
언제 따뜻했냐는 양 축제가 훌쩍 지나간 블레이크 영지는 쌀쌀함이 감돌았다. 그러나, 지금은 북부의 매서운 바람보다 내 안에 내재한 분노가 더 차디차다.
나는 성큼성큼 걸어 마구간으로 향했다. 예상대로 카일은 그곳에 있었다. 손에 각설탕을 한 움큼씩 쥐고, 축사에 있는 말에게 손수 먹여 주는 중이었다.
우선 심호흡을 하고 옷깃을 정리했다. 우연히 만난 척. 우연히 만난 척. 어디 있는지 말해 주지도 않았는데, 찾아온 것처럼 굴면 좀 그렇잖아.
“……큼큼. 여기 계셨네요.”
나는 헛기침을 하고 카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 기척을 느낀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얼굴 보기 어렵군.”
“예, 뭐……. 제가 워낙 공사가 다망해서.”
“새 방에서 묵지 않았던데. 방이 마음에 안 드나?”
“아뇨, 아뇨. 그럴 리가요. ……아니, 근데!”
몇 마디 더 나누려 했지만, 방 얘기가 나오니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주머니에서 그 게르마늄 팔찌를 불쑥 꺼내 흔들었다.
“이게 뭡니까! 시장에서 파는 걸 진짜 사 왔어요? 그거, 딱 봐도 사기잖아!”
“사기?”
“몸에 좋은 마력이니 뭐니 흘러나오는 게 말이 돼요? 아니, 그런 게 있어도 시장에서 막 팔 리가 없잖습니까!”
“시장에서 산 물건이 아니다.”
“뭐요?”
카일이 낮게 웃으며 내 손목을 쥐었다. 그러고는 내 손에 들린 팔찌를 가져가 작은 고리를 풀었다.
“어제까지 서탑에 머무르고 있던 마법사에게 부탁해서 만든 팔찌다. 마력이 흘러나오는 기능은 없지만, 착용자에게 행운을 불러온다더군.”
“…….”
그렇게 말한 카일이 내 손목에 팔찌를 채워 주었다.
은색 체인에 파란색 보석으로 포인트로 둔 팔찌는 가벼우면서도 아름다웠다. 내 손목에 있기엔 썩 아까운 물건일 만큼.
게르마늄 팔찌라고 생각해서 세세하게 뜯어볼 생각을 못 했는데…….
“근데, 이렇게 귀한 물건을 왜 저한테 주십니까?”
“대연회에서 떨어진 샹들리에 때문에 네가 다쳤는데, 아무것도 못 해 주었지 않나. 늦었지만, 사죄와 감사의 표현이다. 받아 둬.”
그가 내 손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서 행운의 팔찐가? 앞으로는 그런 일에 휘말리지 말라고?
“이미 방도 주셨으면서.”
“그건 캐슈넛을 돌봐 주기로 했으니까.”
“……아무튼, 주신다니 사양은 안 합니다. 비싼 거 같은데 나중에 다시 돌려달라고나 하지 마세요.”
일부러 가볍게 말하며 고개를 돌렸다. 괜히 낯간지럽네.
“근데, 마구간에는 왜 오셨습니까? 직접 관리할 필요 없잖아요.”
“네게 한 마리쯤 필요할 듯해서 보고 있었다.”
카일이 각설탕을 놓아두고 갈색 암말을 쓰다듬었다. 말이 그의 손안에 얼굴을 비비며 기분 좋게 울었다.
“저, 승마 못 합니다.”
“배우면 되지.”
“누가 가르쳐 줘요?”
카일이 그게 무슨 당연한 소리냐는 듯이 바라보았다.
“내가.”
“……안 바쁘십니까?”
“한 시간 정도는 낼 수 있다.”
곧, 그가 갈색 암말이 있는 합사의 문을 열었다.
나는 주춤거리며 한 걸음 물러났다. 까마득하게 어릴 때 동물원에서나 봤지,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건 처음인데.
그는 익숙하게 안장을 얹고 말의 고삐를 쥐었다.
“올라타.”
“제가 아직 등이 좀 아파서…….”
“천천히 움직일 테니 걱정하지 마라.”
나는 말을 빤히 바라보다가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러다 결국 왼발로 안장의 등자철을 밟고 말 위에 올라탔다. 그래도 작은 말이라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무서운 느낌은 없었다.
안장의 손잡이를 꽉 붙잡자 카일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순한 말은 그가 이끄는 대로 마구간 바깥으로 향했다.
‘……이거, 묘하네.’
분명 단단한데, 바닥이 위태롭게 울렁울렁 움직이는 것 같다.
“근데, 왜 저한테 잘해 주십니까? 뭐 누구랑 닮았다는 이유만으로는 지원이 과한데.”
파랗고 청명한 하늘을 보면서 생각 없이 중얼거렸다. 카일이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내 말은 조금 더 길어졌다.
“그렇잖아요. 암만 대공 전하께서 돈이 많다, 이 성의 주인이고 북방의 패자다 해도 이런 것들이 당연할 리가 없잖습니까. 세상에 공짜가 없다는 건 저도 압니다. 이렇게 받은 호의에 아무런 목적이 없을 거라는 생각도 안 해요.”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대가 없는 친절이 없다는 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상대한테 받아 낼 게 있으니까 잘해 주는 거잖아. 아까 방에서 느꼈던 낯설고 싱숭생숭한 기분도 여기서 비롯된 것일 테다. 너는, 대체 나한테서 뭘 받아 내고 싶길래.
카일은 잠시 고심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이유가 없다고 해도 믿지 않을 테지.”
“…….”
“그저, 외로워 보여서.”
무어라 말하려 입을 열었다가 그냥 다물었다.
‘……외로워 보였다고.’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고 손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열다섯도 되지 않았을 무렵이었지. 나 또한 혈혈단신으로 북부를 헤매면서 아무도 믿지 않게 되었다. 믿음은 약점이 되고, 호의는 곧 함정으로 돌아왔으니까. 그래서 무엇이든 혼자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북부의 겨울은 혹독했고,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지. 결국, 도움이 필요했다.”
카일의 목소리는 덤덤했다. 그는 잠시 옛날을 회상하는 듯하다가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어떤 인간도 홀로 살지 못해. 아무리 대단하든, 아무리 강하든. 사실 모든 족속이 그렇지. 그 위대한 드래곤조차도 새끼 때는 무리의 보호를 받는다. 어엿한 성체가 된 후에도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인간 사회에 섞여들기도 하지. 그러니 나 또한 도움이 필요한 이를 품고, 손이 부족할 때는 도움을 받아. 네게도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대단히 이상적인 말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한 갈래로, 또 다정하게 흘러갈 리가 없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 있었다.
하지만 도움을 준 사람이 당신을 배신한다면? 그래서 그 결과로 당신이 죽게 된다면? 그때도 너는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입안이 썼다. 카일이 원작에서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알기에 더 마음이 안 좋았다.
이유도 모르게 답답한 가슴을 내리누르느라 조금 뒤에야 목소리를 짜냈다.
“그러면, 죽지 마세요.”
약간 퉁명스럽게 말하자 말 위에 앉은 내 몸을 내려 주며 카일이 웃었다.
“그래. 약조하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의 삶에 새로운 존재가 각인되었습니다.]
[히든 퀘스트, ‘운명 공동체’ 달성!]
[기적 수치가 상승하였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26.0%]
나는 파랗게 뜬 시스템 창을 뒤로하고 카일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나 역시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의 운명이 서로 묶여 있다는 이유를 떠나서도, 너는 그럴 만한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