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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24화 (2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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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마에 손날을 대고 고개를 들었다. 구름 한 점 없는 북부의 하늘에 해가 쨍하니 떠 있었다.

“날씨 좋다.”

나는 더없이 환하게 웃으며 오늘따라 따뜻한 블레이크 영지의 아름다움을 눈에 담았다.

일렬로 깔린 새하얀 벽돌. 양쪽으로 늘어선 가판대. 그 뒤로 늘어선 소박하면서도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상점들.

그래. 상점들.

나는 옆구리에 찬 돈주머니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묵직하다. 카일의 말대로라면 이걸로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다 주세요, 라고 해도 거뜬하다고 했다.

정말 그렇게 쓸 생각은 없지만, 돈은 다다익선 아니던가. 배수현으로 살아 있을 때도 이만큼의 호사는 못 누렸다.

……정확히는 누리기 직전에 죽었지.

“그럼 갑시다, 짐꾼.”

고개를 흔들어 잡생각을 흩고 카일을 돌아보았다. 평소보다 가벼운 차림의 그는 나를 내려다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고 있었다.

그렇게 봐도 소용없다. 그럼 짐꾼으로 부르지, 데이트하자고 부르겠냐. 애초에 네가 먼저 따라오고 싶다며.

떨떠름한 반응의 카일을 뒤로하고 나는 묵직한 돈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누가 뭐래도 오늘, 이거 다 쓴다. 다 쓰고 죽는다.

한 번 죽고 나서야 깨달은 건데, 돈은 자고로 수중에 있을 때 탕진하는 게 맞다. 북부 대공처럼 벌어서 햄스터처럼 쓰는 게 뭔지 보여 주지. 세상에서 가장 흥청망청 써 주겠다.

“천천히.”

그가 튀어 나가는 내 뒷덜미를 잡았다. 신나게 나아가던 내 몸이 뒤로 쭉 끌려 나왔다.

나는 인상을 팍 쓰고 다시 그를 보았다. 이미 입에는 말린 고기를 파는 가판대에서 받은 시식용 육포가 물려 있었다.

“…….”

“으으. 믈 븝느끄.”

왜요. 뭘 봅니까.

“……아니다. 그거나 마저 먹어라.”

와. 미친 것 같다. 이런 소스는 어떻게 만들지? 세상에 이런 맛이 존재해도 되나?

당장 사.

나는 육포 두 뭉치를 샀다. 반짝반짝한 금화를 건네자, 카일이 물건을 대신 받아 챙겼다.

시식용 육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옆 가게로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착용만 해도 몸이 건강해지는 팔찌!’를 판단다. 옆에 둔 빳빳한 종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충격! 몸에 좋은 마력 흘러나옴!>

……게르마늄 팔찌냐? 색깔도 비슷해 보이는 게…… 딱 봐도 사기네.

반면, 옆에 선 카일은 어느새 흥미롭다는 듯 팔찌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햄스터가 할 만한 크기로는 없나?”

있겠냐고.

그보다 채워 줄 생각하지 마라. 그놈의 마력이 뭐라고. 마석이 다 뭐라고. 아이고, 내 팔자야.

‘희귀하게 마석이 안 생기는 특수 체질 마수가 있다는 말을 지어낼 걸 그랬나.’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다음 가게로 끌고 갔다. 일 분이라도 더 내버려 뒀다가는 주문 제작이라도 할 기세였다.

“어디 보자. 멀끔한 옷도 사고.”

“망토가 따뜻합니다! 두툼하면서도 무겁지 않아요!”

“목도리, 목도리 사세요!”

“맛있는 마수 꼬치!”

“땅콩 과자가 한 봉지 사면 한 봉지 더!”

시장의 활기에 내 표정은 자연히 밝아졌다.

좋아 보인다 싶은 건 일단 다 샀다. 짐은 차곡차곡 대공 전하의 팔에, 아. 아니지. 오른팔에 걸지 말고 왼팔에 거십쇼. 비싼 오른팔이잖아.

“튼튼한 북부 코끼리 가죽으로 만든 신발!”

“기능성 바지! 블레이크 기사단이 제일 좋아하는 훈련복!”

못 참지.

“새콤달콤한 귤 사탕 있습니다. 삼십 년 경력의 장인이 만든 수제 사탕 보고 가세요!”

아, 이것도 못 참지.

“크레페입니다. 축제 완판 기념으로 따악 하루만 더 팔아요!”

절대 못 참지.

“아, 좋다.”

나는 그야말로 돈을 물 쓰듯이 썼다. 묵직했던 주머니가 점점 가벼워지고, 카일의 양손에는 짐이 가득 들렸다.

“왜요?”

양손에 크레페를 든 채 묻자, 카일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생각보다 소박하다 싶어서.”

상점 도장 깨기 중인데, 이게 소박하냐.

역시 북부대공쯤 되면 이런 소비는 햄스터의 발악 같은 걸로 보이는 모양이다. 가게를 사 버려야 놀라운 수준인 건가?

“오늘은 제가 쏩니다. 크레페 드실래요? 안에 라즈베리 들었는데.”

맛있어 보이길래 내 거 사다가, 내내 짐꾼 노릇을 한 그를 모른 척하기 미안해서 두 개 샀다. 아, 이 인심이란. 역시 대한민국. 사람 안 굶기는 나라지.

그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그걸 들 팔이 없다.”

“……아. 그러네.”

그의 양손에는 짐이 가득했다. 전부 내 몫이었다. 좀 미안해지네. 짐꾼으로 데려온 게 맞긴 하지만…….

그래도 일단 이 땅의 주인이자 북방의 패자 아닌가. 아까부터 그가 내 뒤를 말없이 계속 따라오는 바람에, 그를 알아본 상점 주인들의 눈이 곧 튀어나올 지경이었다.

“하는 수 없지.”

잠시 고민하던 나는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그대로 쭉 뻗어 카일의 입 앞에 크레페를 가져다 댔다.

그는 이런 상황 자체가 낯선지 그저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왜, 그럼 어떡하라고. 어디 가서 팔 하나도 사 오랴?

“뭘 그렇게 봅니까?”

“의외라서.”

카일이 고개를 숙여 내가 들고 있던 크레페를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한 귀퉁이가 사라졌다. ……짐 들고 다니는 게 많이 힘들었나?

“내게 음식을 직접 먹여 준 건 네가 처음이다.”

[이런 건 처음이야~ 이런 건 처음이야! 〜( ̄▽ ̄〜)(〜 ̄▽ ̄)〜]

설치지 마라.

“전하가 무슨 마수도 아니고, 좀 먹여 줄 수도 있지.”

“보통 어려워하더군, 나를.”

“매일 보면 별로 안 어려워요.”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남들 앞에서야 근엄한 대공작이겠지만, 내게는 격의 없이 뽀뽀나 해 대는 햄스터 오타쿠 아닌가. 어렵게 여기는 쪽이 더 이상하다.

“우리가 매일 봤던가?”

아차.

“……최근에는 매일 봤죠. 아무렴요. 어제도 뵙고, 그저께도 뵙고.”

나는 얼른 더 먹으라며 그에게 크레페를 가까이 대 주고, 내 몫의 크레페를 먹었다. 어디 보자. 염소 우유로 만든 생크림에 크랜베리…….

“셔!”

내가 포효하자 카일이 움찔했다.

“……생크림 처음 먹어 보나?”

“아뇨, 수십 번은 먹었죠. 생크림은 포근포근하고 고소한 맛이어야지, 왜 이렇게 십니까? 게다가 대체 신맛에 신 크랜베리를 올린 건 무슨 생각이래요? 두 배로, 씁, 침 나오네. 두 배로 시잖아요!”

카일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이더니 크레페를 한 입 더 먹었다.

“원래 생크림은 이 맛이다.”

그런 그를 따라 나도 한 입 더 먹었다.

역시 시다.

“아닌데요. 원래 크레페는 혀 떨어질 정도로 달아야 맛이지.”

뭘 모르시네, 진짜. 생크림은 구름처럼 포근포근한 게 매력이라고. 그게 진짜라니까?

그래서 나는 오후 아홉 시 반이면 회사 근처 카페에서 생크림 케이크를 한 조각을 배달시켜 먹곤 했다. 열 시 마감이라 딱 마지막 주문인 셈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지독하게 힘든 날 그걸 먹으면 피곤한 게 사르르 녹았다.

그때는 진짜 힘들기만 했는데, 지나고 나니 그런 것도 추억이 되네.

“그런가…….”

카일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싫으면 버리고 다른 걸 먹지.”

“무슨 소립니까? 아깝게. 그리고 셔서 그렇지, 못 먹을 건 아니거든요.”

“그래. 많이 먹어라.”

카일은 어느새 크레페를 다 먹더니 내 손목을 가볍게 쥐고 이리저리 돌렸다.

“작고 말랐군.”

무슨 개소리냐. 대한민국 평균보다 좀 더 큰데. 어디 가서 절대 작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다. 깔창 하나 끼면 180센티미터다. 두꺼운 놈 말고, 얇은 놈으로.

“전하 눈에 크면 거인 아닙니까?”

그가 낮게 웃었다.

“고기도 많이 먹도록. 아무리 내가 지킨다지만, 정찰에 나가려면 제 몸 정도는 건사할 수 있어야 한다. 블레이크 영지에서는 기사나 병사뿐만 아니라 지원 부대도 체술 훈련을 받아.”

카일이 제 입술에 묻은 크림을 혀로 핥으며 물었다.

“다룰 줄 아는 무기는?”

“없죠.”

“특기는?”

“……글쎄요…… 언어?”

C언어도 언어니까.

“그거 말고.”

“많이 먹기?”

개발하던 게임 망하면 먹방이나 하라고 백반집 아주머니가 추천해 주셨다.

“하아…….”

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왜, 꼽냐.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짐덩이 같냐.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내게 시스템과 원작이 있는 한, 네 미래는 창창하다니까. 좀 사짜 같은 발언이지만 믿어 봐라.

“왜요?”

내가 도발하듯이 말했다.

“저 하나 못 지킬까 봐 벌써부터 걱정이십니까?”

북방의 패자라는 별칭이 울겠다. 피의 대공작이니 뭐니 하는 게, 애꿎은 사람들 죽여서 얻은 명성은 아닐 거 아냐? 민간인 하나 못 지킬 퇴물이면 영주 자리도 내줘야지.

내 말에 담긴 은근한 도발을 눈치챈 카일의 눈썹이 삐딱해졌다. 그가 흥미롭다는 듯이 웃었다.

“은근히 사람 성질을 건드리는 구석이 있군.”

“칭찬 고맙습니다.”

원래 직장인은 잘 싸운다. 클라이언트랑 싸우고, 상사랑 싸우고, 야근이랑도 싸운다. 내가 칼만 안 들었지, 어디 가서 지고 그러지는 않는다고.

“이건 어디로 옮기면 되지?”

이것저것 부지런히 먹으면서 돌아오다 보니 벌써 블레이크 성 앞이었다. 그는 나보고 이번에는 직접 오르라는 듯 계단을 눈짓했다. 알아, 안다고. 누군 다리 없냐.

나는 거북이처럼 느릿느릿하게 계단을 오르며 대꾸했다.

“대충 안 쓰는 창고에다 처박아 둘 겁니다.”

“하인들 숙소가 아니고?”

“아, 네. 자리가 없어서. 휴게실도 센이 있을 때나 들어가는 정도였고요.”

“…….”

여기저기 눈치껏 끼어 다니는 신세인데 휴게실에 이 짐을 어떻게 다 놓겠냐.

카일이 어디서 보냐고 할 때는 서재에 들어가기 싫어서 휴게실을 점거했지만…… 센이 떠나 버린 지금, 아무리 낯짝이 두꺼워도 거긴 좀.

“방을 하나 주지.”

카일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게 그렇게 준다고 해서 떡하니 줄 수 있는 거야?

“……네? 진짜요?”

“잊었나 본데, 내가 이 성의 주인이다.”

아. 그랬지.

“창문 큰 방으로 부탁합니다.”

기왕 받을 거면 좋은 걸로 받는다. 사양은 다음 생에 하겠습니다.

그렇게 오늘 상점을 털었던 물건은 새로 배정된 방에 차곡차곡 쌓였다.

역시, 세상은 돈과 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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