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차가운 바람이 걷히고 햇볕도 따뜻한 날이었다.
나는 성 입구에 마련된 마차와 그 앞에 선 벨리알, 그리고 센을 차례로 바라보았다. 센은 두툼한 벨벳 망토를 두르고 연갈색 머리카락을 틀어 올린 채 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겨울의 심장>에서 읽은 묘사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 북부의 태양 아래에 선 그녀는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과연. 자존심 센 황자님도 반할 만하다. 아니, 오히려 센이 아깝지.
“감사했습니다, 대공 전하. ……이렇게 갑작스럽게 떠나게 돼서 정말 죄송합니다.”
카일은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센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음에도 센의 얼굴에는 희미한 미소가 퍼졌다. 정적 속에서 그녀를 향한 염려와 응원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카일 블레이크는 그런 사람이었다. 냉혹하고 무뚝뚝한 태도와 달리, 자신의 사람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아끼는 마음을 가진 사람.
센이 환하게 웃었다.
“저는 어디서든 잘 지낼 겁니다. 거두어 주셨던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그래.”
카일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러나 그 짧은 대답과 시선에서는 한때나마 자신의 영지민이었던 그녀에 대한 마음이 느껴졌다.
나와 센은 대화를 더 나누지 않았다. 어차피 묻고 싶은 것은 모두 물었고, 듣고 싶은 말 또한 모두 들었다. 그러니 서로 후련한 시선을 한번 주고받은 것이 전부였다.
벨리알도 은근히 얌전했다. 그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샹들리에 사건 때 저를 구해 줘서 고맙다며 짧게 인사했다. 카일에게 조금 으스대는 시선을 보내며 오만한 말투로 몇 마디 건네기는 했지만, 서재에서 보았던 것처럼 날카로운 분위기는 아니었다.
카일 또한 떠나는 마당에 귀찮은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지, 정중하게 손을 내미는 것으로 벨리알을 배웅했다.
그래, 그래. 센 데려가서 좋겠다. 가서 눈물 뽑지 말고 잘 살아라. 복수 좀 하겠다는데 초 치지 말고, 카일에게 거드럭대지도 말고.
나는 벨리알에게 어서 꺼지라는 눈길을 보냈다. 다행히도 그는 내 바람대로 금방 꺼져 주었다. 멀어지는 마차를 보며 사람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뭔 일 나는 줄 알았다.”
“내 말이. 십 년은 늙은 것 같네…….”
“난 아직도 샹들리에가 꿈에 나와. 젠장…….”
카일이 나를 기특해 죽겠다는 시선으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앓느니 죽지. 내 등짝으로나마 막아서 다행이다.
다만, 내 시선은 아직도 마차에 고정되어 있었다. 점점 멀어지다가 이내 검은 점이 된 몇 대의 마차를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던 탓이다. 왜 그게 꼭 안개에 집어삼켜지는 것처럼 보였는지.
‘……됐다. 걱정은 무슨.’
하루의 대부분을 반려 햄스터로 살아가는 이놈의 쥐 팔자가 제일 문제지.
“서재로 잠깐 가자고 하셨죠? 마수 보러.”
나는 얼른 가자는 듯 카일에게 눈짓했다. 하루에 겨우 두 시간뿐이다. 시간은 금이니까 빨리빨리 가자고요, 대공 전하.
성안의 길이라면 이제 다 내 손바닥 안에 있다. 회사 어디에서도 식당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아내던 전생의 유능함이 빛을 발한 덕분이었다. 기력 없는 직장인은 한 걸음이라도 덜 걷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어디 보자. 이쪽 길이 제일 빠르던가?”
나는 성큼성큼 앞서 걸어갔다. 물론 그의 앞에서는 뱁새가 황새 앞에서 우쭐하는 꼴이었겠지만, 그는 나를 따라잡는 대신 한 걸음 뒤에서 따라오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내 서재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올라갔다. 나선형으로 이어진 계단을 오르고, 다시 오르고, 오르고…….
……내 걸음이 점점 느려지기 시작했다. 정확히 계단을 열다섯 개 이상 올랐을 때부터였다. 현대 직장인의 체력까지 확실하게 ‘불러오기’ 했구나…….
“제기랄. 무슨 에스컬레이터도 없이…….”
“뭐라고?”
카일이 성큼 다가왔다. 내가 툴툴거리며 대꾸했다.
“뭐, 그런 게 있습니다.”
에스컬레이터도 모르냐. 에이, 쯧. 북부 촌놈 같으니.
“계단이 저절로 움직이면서, 걸을 필요도 없이 알아서 사람을 올려 주는 거죠.”
“…….”
카일이 세기의 헛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바라보더니, 이내 내 몸을 번쩍 안아 들었다.
“계단은 벽돌로 지어서 저절로 안 움직이겠지만, 어쨌든 몸이 편했으면 좋겠다는 거군.”
“아니, 저기요…….”
사람을 짐짝처럼 들어 올리네.
나는 카일을 한 번, 아득히 먼 계단 위를 한 번 바라보다가 빠르게 반항을 접어 두었다. 그래. 모로 가도 서재로만 가면 됐지, 뭐.
그가 안정감 있게 계단을 오르는 동안, 나는 재빨리 상점을 열었다.
[러브러브 코너~❤]
……이건 언제 봐도 적응 안 된다.
[현재 보유 현황 | ❤×323]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 (지속 시간 : 30분) | ❤×100]
아니, 마지막으로 봤을 때 320개였잖아. 3개는 어디서 벌어 온 거야? 혼자 증식이라도 하나?
아무리 늘었다고 해도 겨우 삼백 개 남짓이다. 레플리카 햄스터를 사려면 백 개가 필요하니까…… 거의 삼 분의 일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비싸네, 비싸.
나는 괜히 허공을 째려보았다.
가격 좀 어떻게 해라.
[(〃` 3′〃)]
왜. 솔직히 저렴한 편은 아니잖냐. 거기다 지금 당장 필요한 레플리카 햄스터만 비싸다.
……어? 설마.
[(*゜ー゜*)]
눈 피하지 마라.
나는 미간을 좁히고 시스템을 노려보다가 떨떠름하게 레플리카 햄스터를 구입했다. 그러자 분홍색 하트로 장식된 시스템 창이 요란하게 떠올랐다.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가 인벤토리에 지급되었습니다!]
‘아니. 아니지!’
인벤토리 말고, 햄스터 집에 넣어 줘야지! 내가 주머니에서 손 빼는 시늉을 하면서 ‘짜잔, 당신 햄스터, 여기~’ 했다가는…… ‘짜잔’이 끝나자마자 목 날아갈 거라고. 카일 성격 몰라!?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가 인벤토리에 지급되었습니다!]
치사하게, 진짜.
“하아…….”
내가 땅이 꺼지도록 한숨을 내쉬자, 카일이 나를 안은 팔을 살짝 흔들었다.
“왜 그러지?”
“먹고살기 힘들어서요.”
“돈이 부족한가?”
“풍족하지는 않죠. 그러니까, 마수 봐주는 값으로 돈이나 두둑하게 주십쇼.”
그러자 카일이 한쪽 팔로만 나를 안은 채 다른 팔로 서재 문을 열며 말했다.
“먼저 도움을 청한 이상, 적당히 보상할 생각은 없다.”
그래. 빙의되느라 첫 정산금도 못 썼고, 기적 수치도 벌기 힘들고, 러브러브인지 라부라부인지 모를 것도 3분의 1이 날아간 마당이다. 그러니 돈이라도 만져 보자.
“기대하겠습니다.”
나는 그와 함께 햄스터 집 앞에 섰다. 그는 당연하게 숨집이나 조형물을 들추며 캐슈넛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없겠지, 이놈아. 여기 있으니까.
나는 속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내가 네 반려 햄스터라고 말도 못 하고. 어? 말도 못 하고!
아무튼, 이리 나와 봐라.
“그렇게 다짜고짜 뒤지면 마수가 놀라잖습니까.”
카일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리가 있군. 미안하다.”
아마 후자는 캐슈넛에게 한 모양이다. 뭐, 그것도 나긴 하지만.
나는 비켜 보라며 그를 슬쩍 밀어내고는 톱밥 근처를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최대한 티 안 나게 레플리카를 꺼내야 하는데…….
“그냥 만져도 된다.”
그가 자부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캐슈넛은 화장실을 가리거든. 천재적이지 않나?”
……미쳤냐? 화장실 안 가리면 그게 짐승이지 사람…… 그래, 네 눈에는 천재로 보일 수도 있겠다.
나는 착잡한 시선으로 그를 잠시 바라보았다. 카일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조금 있으면 말도 할 것 같더군. 얼마나 귀엽고 영특하던지.”
[현재 보유 현황 | ❤×224]
스스로 말하면서도 이상하지 않냐? 마수가 사람 말을 할 리가 없잖아. 우리 애가 벌써 아빠라고 했어요! 이거야?
팔불출이 따로 없다. 떠올리는 것만으로 행복한 거냐고…….
“그러다가 전하네 마수가 말이라도 하면 아주 날아가시겠어요.”
카일은 잠시 조용해졌다. 아무래도 캐슈넛이 말하는 모습을 상상하는 듯했다. 상상할 게 뭐가 있냐. 지금 여기서 이렇게 쫑알거리고 있는데.
나는 그가 딴짓하는 사이, 재빨리 숨집에 손을 넣고 레플리카 햄스터를 꺼냈다.
“아, 여기 있네.”
천연덕스럽게. 천연덕스럽게.
나는 마술사다. 전생에 마술사였다. 비둘기 한 마리와 천과 모자로 대한민국을 뒤집어 놓던 마술사다. 북부대공 한 명쯤 속여 넘기는 건 코 푸는 것보다 쉽다.
나는 레플리카 햄스터를 손에 얹어 놓고 이리저리 둘러보며 살피는 척을 했다.
‘음.’
가짜 햄스터치고는 생각보다 정교하다. 숨도 쉬고, 눈도 깜박이고, 팔다리도 적당히 움직였다. 진짜 햄스터 같은데 생각보다 순하다.
내가 레플리카를 뒤집어서 배를 살피는 시늉을 하자, 카일이 이상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좀 다른데…….”
순간 움찔했다. ……이 차이를 알아? 뭐가 다르지? 생긴 게 다른가? 아니면, 행동?
내가 시스템에게 눈치를 주자 레플리카 햄스터가 찍, 하고 조그맣게 울었다. 이거 봐라. 얘도 운다. 심지어 목소리도 똑같다.
하지만, 카일은 그 목소리에 더욱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 아픈가? 이렇게 조용할 녀석이 아닌데.”
“어떻게 압니까?”
시스템을 시켜서 그 차이를 좁힐 생각이었다. 자, 구체적으로 피드백 바랍니다.
하지만 카일의 대답은 다소 뜬금없었다.
“사랑으로 알지.”
“사랑…….”
카일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진짜 적응 안 된다.
[현재 보유 현황 | ❤×225]
기적 수치와 달리, 하트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해도 알아서 생긴다. 그래, 힘내라. 언제 또 비싼 아이템이 생길지 모르니까.
나는 카일을 힐끔 보고, 그에게서 살짝 등을 돌리며 레플리카 햄스터를 흔드는 시늉을 했다.
“어디 볼까, 우리 마수.”
등 뒤에서 카일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 마수다.”
뭐래. 소유격 떼라. 질투 난다는 시선 보내지도 마시고요.
“딱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건강해 보여요. 다만, 살이 좀…….”
내가 그렇게 많이 먹었나? 말하려니까 좀 억울해진다.
“통통한 편인데, 큰 문제는 없을 테니 그냥 놔두세요. 성장기 앞뒀으니 채식, 이런 거 시키지 마시고. 탈 날 수 있으니까 생식 같은 것도 시키지 마십쇼. 밀웜, 뭐 이런 거 주시는 거 아니죠?”
카일이 움찔했다.
“……설치류는 그런 걸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사냥도 할 겸.”
“야만스럽게 그게 뭡니까. 혹시, 잘 키워서 북부에 방생하는 게 목표입니까?”
레플리카 햄스터를 숨집 안에 슬쩍 넣어 두며 일부러 깐깐하게 말했다.
“그런 이상한 거 주지 마시고, 사람도 잘 먹을 법한 걸로 주세요. 익힌 소고기, 닭고기. 뭐 이런 것 말입니다. 마수들은 의외로 기름진 것도 잘 먹으니까, 꼭 삶기만 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 삶으면 맛이 없다고. 간도 해 달라고 하면 너무 티 나려나?
“과일 같은 것도 주세요.”
카일은 내 말을 경청하며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지. 그나저나 센이 없으니 그런 것들을 구하기가…….”
그가 슬쩍 나를 본다. 네가 도맡아 줄 수 없냐는 눈길이다. 어차피 이 모습으로 카일과 안면을 트는 것도 중요하니까, 하루에 두 시간이면 충분하겠지.
나는 선심 쓰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까짓거 해 준다. 반려 햄스터로서의 삶의 질을 위해서라도.
“고맙다.”
카일이 솔직하게 말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그래, 덕분에 한시름 놓았다. 캐슈넛을 돌봐 주는 값으로 달리 바라는 게 있나?”
고민할 게 어디 있냐.
모든 고생의 대가는, 역시.
“돈.”
나는 엄지와 검지를 구부려 동그라미를 만들어 내었다.
“돈이면 됩니다.”
“…….”
“기왕이면 두둑하게.”
자, 블레이크 영주님 주머니 좀 털어 보자. 반려 햄스터를 키우려면 돈이 많아야 해. 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