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아직도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르겠어.”
센이 한숨을 푹 쉬었다.
“벨리알 전하께서도 생각보다 친절하셔. 함께 황성에 가면 겉돌지 않게 이것저것 챙겨 주신대.”
나는 샌드위치를 베어 물다 말고 콧방귀를 꼈다.
‘챙겨 주기는 개뿔.’
어쭙잖게 끼어들면 더 겉도는 거 모르냐. 황자가 일개 하녀를 보호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결혼이라도 하면 모를까.
“뭐가 고민이야? 내가 카일 전하면 네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응원할 것 같은데.”
다소 심드렁한 대답인데도 센은 그저 감동인지 양손을 맞잡은 채로 나를 초롱초롱하게 바라보았다.
나는 햄과 치즈를 넣고 튀긴 샌드위치를 야무지게 씹으며 그녀의 시선을 외면했다.
“단단히 마음먹고 갔는데, 원하던 걸 제대로 하지 못할까 봐…… 그게 걱정인 것 같아.”
손에 묻은 빵 부스러기를 핥아 먹던 나는 그녀를 힐끔 바라보았다. 원하는 게 복수라며. 왜 제대로 못 해? 권력이 없으니까?
하지만 표정을 보니 단순히 가는 길이 가시밭길이어서 그런 건 아닌 듯했다. 그보다는 좀 더 본질적인 막막함을 느끼는 것 같은데…….
귀찮음과 궁금증 사이에서 후자가 이기고 말았다. 나는 못 이긴 척 슬쩍 추임새를 넣었다.
“왜 제대로 못 해? 넌 똑똑하고 야무지잖아. 권력 없어서 고생하는 건 잠깐이지. 내가 아는 너라면 어떤 위치라도 뭐든 해낼걸.”
그래.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센은 그런 사람이다. 여기까지가 네 자리야, 하고 선을 그으면 보란 듯이 그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
나는 그녀에게서 결의를 느꼈다. 어떻게든 삶을 살아가겠다는, 자신의 가치를 누구도 함부로 해칠 수 없게 하겠다는 결의.
그래서 카일이 죽었다는 이유로 듬성듬성 보던 이 이야기를 덮으면서도 불안하지는 않았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아도 센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테니까. 뒤를 돌아보며 후회할 시간에 앞으로 한 걸음이라도 더 나아가서 결국은 바라는 것을 손에 거머쥘 테니까.
<겨울의 심장>이 동화였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누구든 그런 마지막을 꿈꿀 자격이 있잖아. 너도, 나도. 그리고 카일도.
그때, 원작의 내용이 조심스레 떠올랐다.
[“벨리알 전하. 이건 운명일까요? 선황제 폐하를 꼭 닮은 당신과 어머니를 닮은 제가 이렇게 지독하게 얽히는 것이요. 말씀해 보세요. 이건 운명일까요? 우연일까요? 아니면…… 악연인가요?”]
처음에는 왜 이 대사를 띄워 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째서 뜬금없이 센이 벨리알에게 이야기했던 걸 보여 주는 거지?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시스템은 절대로 쓸데없는 걸 보여 주지 않는다. 작은 거라도 의미가 있기 마련이다. 아주 사소하더라도 이유가 있겠지.
[(´▽`ʃ♡ƪ)]
아니, 이모티콘은 말고. 그건 보통 쓸모없잖아.
[(´。_。`)]
나는 이모티콘을 쓱 치우고 아까 보여 준 문장을 다시 곰곰이 읽기 시작했다.
‘운명, 우연, 악연…….’
사람의 인연은 그런 식으로 말끔하게 정리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렇기에 벨리알이 그 말에 어떤 대답도 내리지 못했겠지. 그러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닐 텐데…….
아. 센이 친모를 닮았다고.
“센.”
나는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어머니의 복수를 하고 싶다고 했나?”
“응. 여러 사건 때문에 몰락하기는 했지만, 원래 남작 가문 사람이라고 하셨어. 세레나 후보에도 오르셨다고 했고. 하지만…… 그런 거 있지? 귀족들의 싸움일 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는 잘 몰라. 어쩌면 권력 때문에 알면서도 다들 모르는 척했을지도…….”
아, 이제 알겠다.
내 목소리에 확신이 실렸다.
“그럼, 가.”
“응?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누가 네 적인지, 누가 너를 없애고 싶어 하는지. 놓치지 말고 똑똑히 봐.”
센의 적은 그녀를 반드시 알아볼 것이다. 그녀가 친모와 똑같이 생겼으니까. 그녀를 알아보고, 그 존재를 황성에서 지우고 싶어 할 테지. 센의 친모를 쫓아내 죽였던 것처럼.
그리고 센이 했던 말로 짐작해 보자면 그 적 중 한 명은 벨리알의 친모이자 선대 세레나인 황후일 것이다.
“그걸로 될까?”
“응. 그리고…….”
벨리알의 친모를 상대하러 가는 거라면, 반드시 벨리알과 함께 가야지.
완벽하게 짓밟았다고 생각한 것이 수많은 계절을 지나 다시 돌아왔을 때의 충격을 직접 안겨 주는 것만으로도 복수는 첫발을 내디딘 거다.
“벨리알을 잡아.”
그 감정의 이름이 무엇이라도 좋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그가 세레나의 단서가 되어 줄 것이다.
센은 잠시 내 말을 곰곰이 생각하는 듯했다. 친절한 설명은 되지 못했지만, 적어도 그 안에 깃든 확신만큼은 전달했다.
이내 그녀는 나를 믿기로 한 모양이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모습만 보여 줬는데도 용케 고개를 끄덕인다. 사뭇 대담한 태도였다.
“좋아. 그렇게 할게.”
“추운 거 싫어하더니, 잘됐네.”
그럼 한동안 센을 못 보려나. 다시 만나면 그녀는 ‘세레나’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원작의 흐름대로. 어쩌면, 그녀의 의지대로.
센의 운명을 더 바꾸고 싶지 않았던 나는, 이제 그녀의 인생에서 걸어 나올 시간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잘 지내라. 아프지 말고.”
“슈.”
센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언젠가 네가 도움이 필요할 때, 나도 널 꼭 도와줄게.”
나는 얼떨결에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누군가에게 도와주겠다는 말을 들은 것이 너무 까마득한 옛날이라서, 그 말이 꼭 못 알아들을 외국어처럼 들린 탓이다. 삼촌이 보험금 다 떼먹고 도망친 후로는 누구도 못 믿고 살았는데.
“좋아. 그때 가서 빼지나 마.”
나는 웃어 주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네게도 행복한 결말이 운명처럼, 혹은 기적처럼 찾아오기를.
[센이 올바른 복수 대상을 찾을 확률이 증가했습니다!]
[카일 블레이크의 생명에 위협이 되는 요인이 줄어들었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23.0%]
사람을 살리는 기적만으로 모두가 온전해진다면, 그거야말로 정말 기적 같은 삶이 아닐까.
*
역시 햄스터 팔자가 편하다. 먹고살 걱정 안 해도 되고, 카일만 없으면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수도 있고.
이제 기적 수치도 좀 벌었겠다…… 영구 감소다 보니 살 만한 게 많지는 않지만, 뭐가 있는지는 알아 둬야 유사시에 쓰기가 좋겠지.
일전에 ‘오래가는 도토리 쿠키’처럼 상황을 뒤집을 만한 절묘한 한 수가 될 수도 있을 거다.
어디 보자…….
‘가진 거 다 내놔 봐.’
[(⊙ˍ⊙);;;]
왜, 뭐. 견과류 강도 처음 보냐?
준비한 거 이리 내. 아니, 준비 안 된 것도 다 이리 내. 좋은 일 하면서 살고 있잖아. 서로서로 좋게 가자고. 어?
‘그러고 보니 리뉴얼 오픈이라고 했지?’
못 봤던 2페이지가 궁금했다. 아직 카일이 돌아오지도 않았겠다, 천천히 훑어봐야겠네.
[☆*: .。. o(≧▽≦)o .。.:*☆]
[!견과류 상점!]
그래, 그래. 애썼다.
[달칵달칵 피스타치오 껍질 |기적 수치 2% 소모|1회용 만능열쇠. 어떤 잠금장치든 열 수 있어요!]
[감쪽같은 아몬드 타르트 |기적 수치 5% 소모|1시간 동안 타인으로 변신할 수 있습니다.]
와.
비싸긴 한데 이용할 만하다. 시간이 좀 짧은 게 흠이지만, 이미 나는 짧디짧은 ‘불러오기’마저도 완벽하게 이용하는 천재 햄, 아니, 인간이시다.
페이지를 더 넘기려니까 눈앞에 또 다른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NOW LOADING…….]
‘……아직 덜 만들었냐.’
하긴, 개발이 쉬운 건 아니지. 천천히 해라.
시스템 창을 이리저리 훑어보던 나는 오른쪽 구석에 하트 모양 버튼이 새로 생긴 걸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여기도 상점인가?
[러브러브 코너~❤]
‘아.’
기적 수치 다 채우기 전에 시스템 딱 한 대만 때려 봤으면 좋겠다. 나는 울컥 올라온 감정을 잠재우며 러브…… 아무튼, 그걸 눌렀다.
[폭신폭신 햄스터 털실! | ❤×1]
[작고 소중한 뜨개용 바늘 세트 | ❤×1]
[직접 만들어 봐요! 햄스터 옷 79선 | ❤×2]
[외로움을 달래는 레플리카 햄스터 (지속 시간 : 30분) | ❤×100]
이번엔 화폐 단위가 기적이 아니다.
‘하트? 이게 뭔데?’
[현재 보유 현황 | ❤×312]
[‘러브러브 코너’에서 산 물건은 ‘아이템’으로 인식됩니다! 맞춤형 조절 가능!]
뭔데 하트가 이렇게 많아!? 난 모은 적도 없다고!
‘이거, 설마…….’
*
인생아…….
나는 귀퉁이가 썩은 귤 같은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다정함에 감복하며 끈을 붙든 앞발에 힘을 주었다.
“잘 타는구나, 캐슈넛.”
그가 넘쳐흐르는 흐뭇함을 숨기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내 엉덩이에 꼭 맞는 나무토막에 앉아, 그 나무토막에 이어진 두 개의 끈을 쥐고 앞뒤로 무력하게 흔들렸다.
카일이 가지고 온 그네였다.
대체 어떤 자식이 샀냐. 센, 너냐? 이게…… 도와줬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네…….
[||ㄱ―||]
안다. 지금 내 표정이 그 모양인 거. 너도 알고 나도 아는데, 저 자식만 모른다.
카일은 어울리지도 않는 추임새를 넣으며 내가 탄 그네를 연신 흔들었다.
“옳지. 다리를 더 뻗어 보거라. 지금 손에다 힘을 준 건가? 역시, 마음에 들었나 보군.”
―찍. (안 멈추냐.)
“센이 네가 좋아할 거라고 했다. 종일 쳇바퀴를 돌릴 정도로 활발한 아이였는데, 아무렴.”
―찍……. (지랄…….)
슨. 즉는드, 즌쯔…….
이런다고 내가 살이 빠지거나 심장에 마석이 생기는 것도 아닌데, 그는 그저 내가 얌전히 그네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모양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의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다.
“마법사에 수의사에 마수학자까지. 내가 널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아느냐.”
나는 한숨을 폭 내쉬고 엉덩이를 조금 움직였다. 그랬더니 그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조금 더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카일이 화색을 하며 손을 뗐다. 나는 아예 기둥을 잡고 몸을 일으켜 그야말로 현란하게 몸을 흔들었다.
나무 그네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홱홱 흔들렸다. 내가 엉덩이까지 씰룩거리며 재롱을 부리자 카일은 박수까지 쳐 가며 감동을 받았다.
에휴. 놀아 주기 힘들다.
[현재 보유 현황 | ❤×320]
그래, 네가 행복하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