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축제 기간 동안 몇 번 해 보니, 이제 카일의 눈을 피해 사람으로 변하는 것쯤은 손쉬워졌다. 애초에 그날 이후로 센을 만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줄곧 그와 시간을 보내고 있기에 들킬까 염려할 일도 없었다.
“마수학자라고?”
“네. 엄청 잘 아는 건 아니고, 그냥 곁눈질로 이렇게 저렇게…….”
“그렇군.”
나는 그가 준비한 차를 마시며 마찬가지로 그가 준비한 스콘을 먹었다. 그리고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미안하다. 하지만 이렇게 말해 두는 편이 나중을 위해서도 좋을 테니까.
혹시라도 카일이 다른 지역으로 가게 될 때 동행할 명분도 생기고, 잘하면 마수 토벌을 갈 때도 한자리 얻을 수 있게 된다. 정기적으로 이루어지는 마수 토벌에는 마수학자가 동행한다고, <겨울의 심장>에서 그랬으니까.
“그보다, 일 안 하고 저랑 이렇게 있으셔도 됩니까?”
“또 어딜 가려고.”
“아니…….”
내가 가는 게 아니라, 네가 괜찮냐고 인마. 아무래도 몇 번 홀연히 사라졌더니 우리 대공님께서 의심병이 생기신 모양이다.
나는 말끝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의 손이 뻗어져 와 내 얼굴을 다시 돌려놓았다.
“대화할 때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는 것이 예의다.”
“상놈은 귀족 예의 같은 거 모릅니다.”
“이제부터라도 배워야지.”
“제가 왜요?”
그러자 그가 은밀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했다.
“반려이지 않나.”
주둥아리로 지은 죄는 평생 간다. 나는 말문이 막혀, 그저 참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벌써 몇 번째지?’
사골도 카일의 반려 운운만큼은 안 우리겠다. 저 자식은 내가 대답을 피하려고 할 때나 자리를 비우려고 할 때마다 꼭 제 반려임을 거들먹거렸다.
죽을 때까지 애인도 없었던 놈이 뭔 반려는 얼어 죽을 반려야? 너 사실 연애 안 한 게 아니라, 못했던 거냐? 그래서 이래?
쏘아붙이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지만 억지로 참았다. 그리고 그런 내 얼굴을 보고 있던 카일은 바람 빠진 웃음소리를 흘렸다. 이상하게도 편안해 보이는 웃음이라서 나는 나도 모르게 그를 노려보던 눈에서 힘을 풀었다.
“너와 있으면 편안하군.”
“…….”
“이상하게 들릴 건 안다. 그냥, 그렇다는 뜻이야.”
그렇게 웃으며 말하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일부러 이러는 건가?’
괜스레 뚱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자, 카일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내게 스콘 접시를 내밀었다.
“마수학자라면 내 마수를 한번 살펴봐 줄 수 있겠나. 네가 편한 날에 맞추마.”
적당한 크기로 자른 스콘을 막 입에 넣으려던 나는, 상상치도 못한 카일의 말에 그대로 손을 멈추었다. ……이상하다. 잘못 들었나? 지금 나더러 나를 봐달라고 한 것 같은데?
나는 스콘을 들지 않은 손으로 귓속을 후비적거리고 멍청하게 반문했다.
“……예?”
“내 마수를 봐달라고 했다. 서재에 있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나 보다.
손에 든 스콘과 카일을 번갈아 바라보던 나는 입맛이 뚝 떨어져 스콘을 내려놓았다. 윤기가 반지르르 도는 디저트가 맛있어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지금 무언갈 먹었다간 그대로 체할 것 같았다.
하지만 카일은 개의치 않고 수심 어린 목소리로 이어 말했다.
“최근 부쩍 입맛이 없어 보여 걱정이다. 먹을 것도 거부하고, 잘 움직이지도 않더군. 활발한 녀석이었는데…….”
추억 보정 넣지 마라. 처음에도 쳇바퀴 탈 때 빼곤 줄곧 누워 있었다. 넌 와식 생활의 즐거움도 모르냐. 이래서 부지런한 자식들이란.
“아무래도 심장에 마석이 생기는 것이 늦어 그런 것 같기에, 주기적으로 마력을 불어 넣어 보기로 했다.”
“……마력이요?”
뭐야? 누구 맘대로?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 일이다 보니, 네게도 한 번쯤 보이는 것이 나을까 싶군.”
“뭐…….”
뭔. 이게 뭔……!
거절할 말이 마땅치 않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그리고 다급하게 시스템을 불렀다.
‘야! 야, 야! 나와 봐!’
[……(* ̄0 ̄)ノ]
왜 자고 일어난 것 같은 얼굴이냐. 나는 눈앞에 파랗게 뜬 시스템 창을 바라보며 주먹을 꽉 쥐었다.
‘얼른 그거 띄워 봐. 뭔과류 상점인지, 뭔지.’
[…….]
[…….]
[☆*: .。. o(≧▽≦)o .。.:*☆]
[!견과류 상점!]
약간의 로딩 끝에 반짝거리는 이모티콘이 떠올랐다. 그리고 나는 그 아래, 간판처럼 장식된 이름을 보며 혀를 찼다. 이거 만든다고 피곤해했냐.
리뉴얼 오픈이라고 쓰인 작은 글자를 무시하고, 나는 빠르게 상점을 훑었다.
[미니미니 브라질넛 마들렌 | 기적 수치 2% 소모 | 30분간 몸이 작아집니다. 햄스터보다 작은 크기로!]
[헐레벌떡 아몬드 휘낭시에 |기적 수치 3% 소모|달리기 속도가 빨라집니다.]
유용한 것 좀 줘라, 좀. 햄스터보다 작아지는 아이템이 무슨 소용이냐? 그냥 햄스터로 돌아가면 되잖아.
그렇게 1페이지를 건너 2페이지로 향할 때였다.
“마수학자. 마수학자라…….”
카일이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더니 안도 어린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시스템 창을 밀어 두고, 몸을 숙여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왜요?”
“블레이크 영지에는 늘 마수학자가 부족했다. 자리를 잡은 지 그리 오래되지도 않았고, 작년에 와이번 둥지 조사에서 사고가 벌어지는 바람에 많이 당했지.”
그의 기대 어린 눈길이 내게 향했다.
아니, 진짜 그냥 둘러댈 것 없어서 그런 건데요. 예뻐 죽겠다는 표정 금지. 어떻게 잡아 둘까, 고민하는 표정도 금지.
나는 슬그머니 손을 올렸다. 그의 눈길을 차단하기 위함이었다. 물론, 내 미약한 노력은 3초 만에 쓸모없어졌다. 카일이 내 손목을 쥐고 내려 버린 탓이었다.
“영지 일 돕는 건 어려워요. 제가 워낙에 바쁜 몸이라.”
혹시나 그가 뭐라도 부탁할까 싶어 선수부터 쳤다.
아무리 ‘불러오기’ 시간이 늘었다지만 겨우 두 시간이다. 뭘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화장실 간다고 거짓말하고 도망갈 수도 없잖아.
“……그런가.”
카일의 얼굴에 희미한 실망이 어렸다. 딱 봐도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로 온갖 표정을 보여 주시니 낯설다 못해 황송할 지경이다.
뭘 그렇게 실망하고 그러냐. 어깨너머…… 아니, 원작 너머로 배운 지식뿐인 가짜 마수학자인데. 태어나서 본 마수라고는 캐슈넛뿐이다.
‘아. 이건 마수로 안 치나?’
그냥 햄스터로 바꿔치기 당했으니까.
어쨌든, 차라리 나보다는 직접 마수와 대거리한 그가 아는 게 더 많을 거다. 그래도 뭐…… 아쉬우시다면야.
나는 선심 쓰듯이 슬쩍 덧붙였다.
“마수 토벌에 한두 번쯤 따라갈 시간은 있을 겁니다.”
말하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가장 춥고 어두운 겨울에 열리는 북부 축제. 그 떠들썩한 분위기가 지나고 나면, 블레이크 영지에서는 대규모 정찰을 준비한다.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축제에 정신이 팔려 살짝 느슨해진 긴장을 다잡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다. 아무리 살 만한 곳으로 바뀌었다지만, 북부는 여전히 마수들이 들끓는 땅이자 겨울이 길고 혹독한 곳이니까.
또 다른 이유로는 아마 신입 기사들의 훈련이 있어서다. 이맘때쯤 견습 딱지를 겨우 뗀 기사들이 서임식 후, 처음으로 실전에 나서니까.
“신입 기사 서임식은…….”
카일이 느릿하게 대답했다.
“축제 전에 했지 않나. 올해는 신입이 꽤 많아서 크게 한 것으로 기억하는데.”
“하하. 제가 그때 좀 바빴거든요.”
카일이 대놓고 수상하다는 시선을 던졌다. 하긴, 그때 바쁠 게 뭐가 있겠어. 그냥 좀 넘어가라. 나는 애써 그 시선을 무시했다.
예년보다 규모가 컸던 수여식.
대연회에서 떨어진 샹들리에.
그리고, 그 이후 대규모 정찰.
‘확실하다. 이때 카일은…….’
[블레이크 대공작은 정찰 때 습격을 받고, 오른팔에 큰 상처를 입는다.]
시스템이 원작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나는 조용히 질문했다. 이 부상이 그의 죽음에 영향을 끼칠까?
잠깐의 침묵 후, 시스템이 간결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창백할 정도로 파랗게 빛나는 한 문장이 오싹했다. 그의 죽음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생생하게 와닿았다.
‘그래. 그랬지.’
카일의 죽음이 어느덧 보름을 앞두고 있다.
원작대로라면 그는 샹들리에 사건을 통해 벨리알과 대립하기 시작했고, 정찰에 나가서 습격을 당한다. 그리고 이후, 황성에서 센에게 심장을 찔려 죽는다.
사건 하나를 틀었다고 해서 그 죽음이 완벽하게 번복되는 건 아니겠지. 기적은 그렇게 쉽게 일어나는 게 아니니까.
그럼, 이제 어떻게…….
“이봐.”
“…….”
“이봐, 슈.”
“…….”
“슈.”
카일이 손바닥으로 내 뺨을 감쌌다. 조금 차가운 체온이 닿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괜찮나?”
“네, 뭐…….”
내가 급히 숨을 들이켰다. 차갑게 식은 손끝이 뻣뻣하게 느껴졌다.
“괜찮아요.”
썩 믿지 않는 듯했지만, 일단은 그렇게 말해 주었다.
“잠깐 뭣 좀 생각하느라.”
카일이 인상을 찡그렸다.
“무슨 생각을 했길래 얼굴이 그렇게 창백해진 거지?”
솔직하게 대답할 수 없어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늘 이런 식으로 피해 갔다. 둘러대거나, 거짓말하거나, 아니면 수상해 보인다는 것을 알면서도 입을 닫아 버리거나.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어떻게 말하겠는가. 나는 최대한 천연덕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리고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을 자연스럽게 흘렸다.
“전하. 이번 대규모 정찰에 저도 따라가도 됩니까?”
그가 어렵지 않다는 듯 곧장 대답했다.
“그래. 하지만, 영지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있나?”
“아뇨.”
“북부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곳이다. 그 설원에서 인간은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를 가장 먼저 배우지.”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블레이크 대공작이 그렇게 말하니 무게감부터가 달랐다.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이내,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럼 전하께서 저를 지켜 주시면 되지 않습니까.”
날 지켜, 카일. 그럼 나도 너를 지킬게.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우리의 생존은 따로 떨어져 있지 않거든.
카일이 낮게 속삭였다.
“나를 믿나?”
“이 땅의 사람들이 전하를 믿는 건 당연한 일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의 얼굴에 짓궂은 미소가 어렸다.
“네게도 그게 당연한지 물은 거다.”
순 너구리처럼 굴기는. 답을 다 알면서.
나는 얄밉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당연하죠.”
“좋다. 지켜 주지.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안전할 거다. 다만…… 승마는?”
“아.”
……할 줄 알겠냐. 남들은 수학여행 때 제주도 가서 조랑말이라도 타 봤다는데, 그 시각 나는 학교에서 밀린 숙제나 하고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그가 덧붙였다.
“하긴, 상처가 다 아물지도 않았을 테니 혼자 말을 타는 것도 어렵겠군.”
다행히 두고 가겠다는 말은 없었다.
설마, 날 네 앞에 태워 주겠다던가 그런 건 아니지? 응? 아니지? 예년보다 서임식의 규모가 컸다며. 신입 기사가 많다며. 대규모라며!
‘……따라간다고 하지 말 걸 그랬나?’
나는 오소소 돋는 소름을 무시하며 애써 입술을 비틀었다.
“……눈물겨운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돌아가면 기필코 승마부터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