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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20화 (2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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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분위기가 지나가고, 센은 요즘 꽤 오래 같이 있어서 좋다며 웃어 보였다.

[현재 기적 수치 20.0%]

꽤 큼직한 사건이었던 만큼 보상도 짭짤했다. 물론, 등판을 이 지경으로 만든 대가치고는 좀 야박한 감이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덕분에 ‘불러오기’ 지속 시간이 두 시간이나 되었다.

그 말은 곧, 피칸 파이를 두 시간 동안 여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뜻이지. 나는 신난 얼굴로 파이 한 조각을 더 집어 들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입을 크게 벌려 한 입 베어 물던 순간…….

똑똑.

묵직한 노크 소리에 센의 얼굴이 밝아졌다.

“오셨나 봐.”

뭘 오셔? 누가?

나는 아무것도 베어 물지 못한 채 입을 딱 닫았다.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쫙 내려가는 게…… 야, 설마…….

“아까, 파이를 가지고 오다가 카일 전하를 만났거든. 네가 여기 있다고 내가 말씀드렸어.”

“뭐…….”

“넌 어떻게 전하께서 구해 주셨는데 인사도 안 드리니? 말없이 사라져서 전하께서 얼마나 걱정하셨는지 알아?”

“…….”

……아, 망했다.

내 당혹스러움과는 별개로 센이 명랑하게 외쳤다.

“전하!”

문이 열리고, 카일이 들어왔다.

미풍 한 자락에 설레는 표정의 미남…… 같은 건 없다. 억세고 황량한 북부를 오로지 힘으로 정복한 무시무시한 남자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도 미남이기는 했지만…….

눈빛이 너무 으스스하다고!

어깨를 움츠리며 뒤로 살짝 물러나려다가 몸을 움찔 굳혔다. 어제보다는 사정이 훨씬 낫다지만, 그렇다고 등이 다 나은 건 아니다.

나는 더 물러날 자리도 없어 어정쩡하게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센은 “그럼, 편히 대화 나누세요!” 하는 말과 함께 자리를 피해 버렸다.

야! 어디 가! 우리 둘만 놔두고 가지 마! 이거, 어떻게 수습하라고?!

“…….”

카일이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휴게실에 들어왔다. 저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오늘따라 무시무시하게 들렸다.

눈빛만 보아서는 거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씹어 드실 기세였다. 내가 주춤거리며 소파 쪽으로 조금 더 밀려났다.

그는 내 건너편이 아니라 바로 옆에 몸을 내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조금 더 비켜났다. ……왜 이러세요. 우리가 무슨 사이라고.

“살아 있었군.”

그가 내 옆으로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뭐야, 불만 있냐? 안 죽어서 유감이기라도 해? 한껏 삐딱해진 내가 총알 대신 불손한 눈깔을 장전할 때였다.

“네가 죽은 줄 알고…….”

깊고 낮은 목소리에서는 그의 진심이 묻어났다. 나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먹먹한 정적을 지켰다. 어쩐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했겠지.’

손쓸 틈도 없이 다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는데, 옮겨 두자마자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에게 댈 만한 핑계가 없어서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따지고 보면 카일에게는 다소 일방적이고 너무한 처사였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그의 쪽으로 몸을 살짝 당겨 앉았다. 카일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우중충하게마저 느껴졌다. 표정 펴라, 인마. 괜히 미안하게.

“걱정하셨습니까?”

카일이 조금 웃으며 대답했다.

“너도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고 생각하나?”

“…….”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피의 대공작…… 이라던가.”

그의 미소는 곧 쓴웃음이 되었다.

카일이라고 왜 인정이 없을까. 약한 것을 지키고, 책임지기로 약속한 것을 외면하지 않는 사람에게 인정이 없을 리가 없다.

카일 블레이크는 소설에서 본 것보다 다정하고, 꼼꼼하고, 살뜰한 사람이다. 더 이상 무엇도 잃기 싫어서 스스로 강해졌고, 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독해졌으며, 북부에 더 나은 미래를 선물하고자 똑똑해졌다.

그러나 그럴수록 세상은 그 남자를 오해했다.

척박한 땅을 기어코 정복한 그를 지독하다고 했고, 적을 가차 없이 처단하는 모습을 잔인하다고 비웃었다. 세상에 쉬이 섞이지 못하는 그를 날카로운 몇 마디 말로 북부에 가둬 두면 저들이 안전할 거라 믿었기에.

“안 어울리네요. 피의 대공작은 무슨.”

내 말에 카일의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안 죽었으니까, 걱정 마십쇼. 이렇게 사지 멀쩡…… 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어제보다 한결 나아서 파이 먹을 정도는 돼요.”

“의사들 말로는 따로 환자가 들어온 적 없다던데. 등이라서 혼자 치료하기도 어려웠을 거고.”

“뭐……. 제가 좀 남들보다 회복력이 좀 좋거든요.”

‘불러오기’를 다시 쓸 때까지 이 몸뚱이는 꼬박 휴식만 하고 있는 데다 시스템이 힘까지 썼으니 다른 사람들보다 상처가 빨리 아무는 건 당연했다.

“이번엔 안 사라질 테니까, 궁금한 거 있으면 물어보시든가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파이 한 조각을 접시에 덜었다.

“드실래요?”

그러자 카일이 접시 대신, 내 손목을 가만히 쥐었다.

“묶어 놓으면 안 사라질까.”

“……감금은 범죄거든요?”

“…….”

“설마 법 위에 대공작 있다, 이겁니까?”

“…….”

“저기요?”

진지한 얼굴 하지 마세요. 댁이 그렇게 쳐다보면 진짜 그러고도 남을 것 같다고요.

그리고 묶어 놔도 소용없다. 어차피 시간 되면 네가 마련한 그놈의 햄스터 집으로 얌전히 들어갈 텐데.

“궁금한 건 물어봐도 좋다고 했지.”

“네, 뭐.”

“대체 옷은 왜 두고 간 거지?”

“……축축해서요. 피 많이 흘렸길래, 그냥 갈아입고 갔어요.”

“그럴 정신이 있었다고? 붕대도 풀고.”

“유리 파편이 등에 좀 남아 있더라고요.”

나는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그래서.”

“그래서?”

“등은 괜찮은 건가?”

괜찮다니까 그러네. 아니, 뭐. 죽기야 하겠어? 그러니까 여기서 파이나 먹고 있…… 뭐, 뭐야! 왜! 뭔데!

그가 내 몸을 다짜고짜 돌리더니 뒤에서 팔을 쑥 뻗었다. 양쪽 옆구리 너머로 뻗어져 나온 손이 단추를 풀어내고, 셔츠를 어깨 아래로 쭉 잡아 내렸다.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당황할 시간조차 없었다. 목덜미와 등판의 피부로 찬바람이 훅 끼치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사람을 이렇게 순식간에 벗겨도 되는 거야!?’

차마 버둥거릴 수도 없었다. 그의 양손에 내 옷이 잡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떻게 구한 옷인데, 찢어졌다가는 또 귀찮게 이리저리 나다녀야 했다.

그래, 얌전히 있자. 나쁜 뜻은 아닐 테니까. 그래도 웬만하면 빨리 좀 떨어져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보면 오해하겠어.

“겉은 아물었군.”

카일의 손끝이 내 등 언저리를 조심스레 헤맸다. 마치, 조금만 힘을 잘못 주어도 깨지는 것을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하지만 흉터가 남겠어.”

“뭐 어때요.”

“멍이 빠지려면 시간도 들 거고.”

“괜찮아요. 어차피 제 눈엔 잘 보이지도 않고.”

아무렴, 흉터 한두 개쯤이야 사는 데 아무 지장도 없다.

진짜 아픈 흉터는 이런 게 아니다. 마음에 남은 게 정말로 아픈 법이다. 다 아물었다고 생각했는데, 무심코 들춰 보면 욱신거리는 게 사람 마음이라서.

“……다행이군.”

카일의 목소리는 작았다. 바람처럼 귓가를 간질이다가 그대로 휘돌아 나갔다.

꼭 속삭이는 것 같은 그 목소리를 듣노라면 마음이 이상했다. 안도한 건 그였는데도, 왜 불안하게 떠 있던 내 마음도 함께 내려앉는지 모를 일이다.

그렇게 몇 분이 지났을까.

“저…….”

[앞으로 20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이제 슬슬 가야 할 시간인데요.

내가 뒤를 힐끔 돌아보자 카일이 미간을 구겼다. 뭐. 왜. 그럼 여기 평생 있을 거냐.

“…….”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건 그도 알 거다. 하지만 나더러 가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그런데 보내기는 싫어서 저렇게 인상을 쓰고 쳐다보는 것이다.

‘……이렇게 보니까 시커먼 털이 복슬복슬한 개 같네.’

욕 같긴 하지만, 정말 글자 그대로 개 같다. 저 덩치에 어울리지도 않게 귀엽고 난리야.

“내일 보면 되잖아요.”

결국, 내 입에서 미래를 기약하는 말이 튀어나왔다. 온종일 같이 있지는 못하지만, 하루에 두 시간은 사람으로 있을 수 있으니까.

“내일 이 시간쯤에도 괜찮으시면, 휴게실에 있겠습니다.”

이곳에 온 이후로 처음으로 무언가를 약속했다.

왜냐고 묻느냐면…… 글쎄,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언제쯤 이곳에 오겠다고 하면 그가 덜 불안해할 것 같아서.

약속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보이지 않는 끈으로 상대와 나를 엮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디 안 갑니다.”

널 살려야 하는데, 내가 널 두고 어딜 갈까.

“그래.”

카일이 한숨을 내쉬듯이 대답했다.

“기다리마.”

사실 왜 그렇게까지 내게 신경을 쏟느냐고 묻고 싶었다. 벨리알도 다치고, 그 근처에 있던 다른 귀족 중에서도 다친 이가 있다고 들었는데.

그 많은 사람 중에서 굳이 나를.

대체, 왜 이렇게까지.

그러나 그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하려 했던 말이 혀끝에서 스르르 녹아 종적도 남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기뻤다.

누가 나를 기다려 준 적이 얼마나 있었을까. 늘 남처럼 살려고, 남보다는 못하지 않으려고 다리가 찢어지도록 쫓아갔던 기억뿐이다. 언제나 세상의 뒤꽁무니만을 졸졸 따라 달리던 나를, 그가 기다리겠다고 했다.

카일.

너는 이 외로움을 이해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렇게 진지하게, 기다리겠다고 한 걸까.

“그래요.”

화끈거리는 기분이 가슴께와 목 언저리를 데우는 듯했다. 가슴을 꽉 죄고 욱신거리는 통증은 어디서부터 오는 걸까.

“…….”

얼굴이 가깝다. 어제 춤을 추었을 때처럼 어느새 가까웠다.

이마는 금방이라도 닿을 것 같고, 그의 얕고 서늘한 호흡이 콧등을 간질였다. 너무 가까워서, 카일의 붉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닮아서.”

생긴 것도 아니, 종족부터가 다른데 대체 뭐가 닮았다는 건지. 그러나 그렇게 나를 알아보는 그가 나쁘지 않아서 그만 웃어 버리고 말았다.

“작업 멘트라면 성의가 없으시네요.”

그러자 카일이 웃었다.

긴 겨울 끝에 오는 북부의 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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