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19화 (19/129)

19

깜빡, 깜빡.

아무것도 없는 새카만 공간에 새파란 시스템 창만이 반짝거렸다.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한숨을 내쉬며 시스템 창을 향해 손을 뻗었다.

[ヽ(*。>Д<)o゜] 야, 야. 울지 마. 한번 죽어도 봤는데 이 정도야, 뭘. 하지만 진짜 죽는 줄 알았다. 한 번 죽어 봤다고 두 번이 쉬운 건 아니더라. 빠른 속도로 떨어지는 샹들리에의 위압감을 느꼈을 때, 차라리 혀를 깨물고 기절해 버리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진짜 기절하긴 한 모양이지만. 나는 안절부절못하고 반짝이는 시스템 창을 쓰다듬는 시늉을 하며 입을 열었다. “나, 아직 기절해 있지?” [‘불러오기’를 해제해 드릴까요? ≧ ﹏ ≦] “아니, 아니. 해제까지는 하지 말고, 의식만 잠깐 회복시켜 줘.” 대뜸 해제했다가 아직 대연회장이거나 사람들이 있다면 곤란해진다. 무엇보다 카일. 지금도 날 의심하고 있는데 눈앞에서 또 사라져 봐. 그땐 변명하기도 어렵다. [의식이 회복됩니다!] [10…….] [9…….] 웬 카운트다운? 나는 흘러가는 숫자를 멍청히 바라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렸다. ‘……야. 야, 잠시만. 설마.’ [1…….] 아득히 멀어져 있던 정신이 한순간에 돌아왔다. 나는 물에서 막 건져진 사람처럼 숨을 헉, 들이켰다. 동시에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고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 비명을 삼켰다. “끕……!” 미친. 미친. 진짜 미친! 어떻게 이러지? 이렇게 아파도 되는 거야? 나는 미친 듯이 떨리는 몸을 작게 웅크렸다. 시야가 뿌옇게 흐려진다. 샹들리에를 정통으로 맞았던 등이 뜨거웠다. 잘 달군 쇠꼬챙이로 살갗을 파헤친 기분이었다. 나는 내 옷깃을 쥔 손아귀에 힘을 주고 어떻게든 주위를 살폈다. 일단, 아무도 없는 듯했다. 장소도 익숙하다 했더니 서재인 모양이고. 아마 카일이 데리고 왔겠지. 하여튼, 다행이다……. “야! 시스템! 해제…… 해제해 줘. 해제!” 절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처음 죽을 때는 워낙 순식간이라 고통을 느낄 새도 없었는데, 이건 진짜 장난이 아니다. 카운트다운을 한 이유가 있네. 마음의 준비 시간이었냐……. 샹들리에 불빛 같은 백색 섬광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눈을 감았다 떴을 땐, 어느새 햄스터 집으로 돌아와 있었다. ―찍! (악!) 몸이 주르륵 미끄러지며 미끄럼틀에서 우당탕 굴러떨어졌다. 시스템! 위치 지정 제대로 안 해? [(;′⌒`)] ……그래. 너도 정신없겠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톱밥 위에 벌러덩 누웠다. 아. 몸도 마음도 얼얼하다. 어떻게든 해결이 되긴 했는데, 나 진짜 그 커다란 샹들리에를 내 등판으로 막은 거냐. 황당하기 짝이 없다. 그나마 그게 불러오기 몸뚱이였으니 살았지. 아니, 그런 결심이 섰던 것도 진짜 내 몸이 아니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그런 걸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먼저 나갔다는 것이 맞겠지만. ‘카일, 많이 놀랐겠지.’ 나는 몸을 돌려 모로 누웠다. 그리고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부딪혔던 등을 향해 손을 뻗었다. 닿지 않는다. 다시 반대로 돌아누워 다른 팔을 뻗었다. 하지만 여전히 닿지 않았다. 나는 애꿎은 허공만 벅벅 긁다가 손을 뚝 떨궜다. ……에효. 서재에 의사들이 들어온 것은 그로부터 5분 뒤였다. 나는 집 앞쪽에 톱밥을 도톰하게 쌓고, 그 위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았다. 의사들은 사람은 없고 피투성이 옷가지만 널브러져 있는 소파를 보며 충격에 빠졌다. ‘그럴 만도 하지.’ 대공이 직접, 그것도 급하게 지시한 일인데 환자가 홀랑 없어져 버렸으니. “어, 어디…… 어디 간 거지?” “어디든 뒤져 봐!” 의사들은 저들끼리 심각하게 토론하다가 소파 아래, 책상 아래, 그리고 테이블 아래까지 기웃거리고서야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며 서재를 나섰다. 아니, 애당초 내가 암살자도 아니고 환자가 그런 곳에 숨어 있겠냐. 그러고 2분쯤 지났을까. 아까보다 묵직하고 성급한 발소리가 들리더니 서재의 문이 벌컥 열렸다. 성큼성큼 몇 발자국 걷던 남자는 소파 앞에서 우뚝 멈추었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는가 싶더니 이내 바깥에 있는 기사에게 노기 띤 음성으로 명령했다. “주변을 수색해 봐라. 멀리 가지는 못했을 거다.” 저기, 대공님. 그 대사 너무 악당 같은데요. 기사들이 멀어지는 소리가 들리고, 카일이 고개를 숙인 채 이마를 짚는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없어졌으면 없어진 거지, 뭘 그렇게 신경을 써. 어차피 너 살리고 기적 수치 다 채우면 나는 다시 내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너무 정 주지 마라. 햄스터든 사람이든.’ 나는 마카다미아를 쿠션처럼 끌어안았다. 카일은 내가 두고 간 옷을 집어 들고 있었다. 하얀색 연미복은 처음의 색상을 알 수도 없을 만큼 붉게 물들어 있었다. 등 쪽은 아예 찢어진 데다 피는 세탁해도 잘 안 지워지겠네. 비싼 옷일 텐데. “……이 꽃을 받겠다고 하지 말 것을.” 한참 내 옷을 쥐고 있던 카일이 중얼거렸다. 그의 가슴팍에 있는 꽃은 잎 몇 개가 뜯어져 너덜너덜했다. 원래 붉은색 꽃이라지만, 내가 흘린 피 때문에 앞주머니가 젖으면서 잎사귀에도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럼 춤을 출 일도 없었겠지.” 목소리에 죄책감이 덕지덕지 묻어 있다. 하지만 춤이고 꽃이고 상관없이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벨리알이 연회에 참석하는 걸 막지 못했고, 그랬기 때문에 내 몸을 날려야 했다. 순전히 내가 선택한 거고, 내가 저지른 건데. ‘뭐, 어쩌겠냐.’ 미안하다. 네 반려 햄스터가 간이 좀 커. * 소란스러웠던 대연회는 그래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나를 눕혀 두고 연회장으로 내려간 카일이 어떻게 수습을 잘했다나. 황자가 다칠 뻔하지 않았냐는 황성 귀족들의 항의가 있었지만, 매년 북부로 하달되는 예산이 황성의 절반조차 안 된다는 사실로 입을 틀어막았다고 했다. 더불어 문제의 그 샹들리에는 오히려 황성에서 온 물건이었다는 말이 돌았다. 황실에서 준 물건 때문에 벨리알에게 큰일이 일어날 뻔했는데, 심지어 그 사고를 북부 사람인 내가 막기까지 했다. 어찌 되었든, 잘 수습된 셈이다. “근데…… 정말 괜찮아?” 센이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나를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꼼꼼하게도 살핀다. “괜찮다니까.”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센의 주의를 흩었다. 벌써 세 번째 질문이었다. 물론, 몸은 괜찮지 않다. 간밤에 시스템이 손을 좀 써 놓았는지 처음만큼 아파 죽을 정도는 아니지만, 누가 등이라도 치면 천장까지 폴짝 뛰어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센에게서 조금 떨어진 채 그녀가 가져다준 메이플 피칸 파이를 씹었다. 고소하게 퍼지는 달콤한 맛이 그럭저럭 이 쓰라린 상처에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제 말이야. 벨리알 전하의 처소에 갔었어.” 하마터면 파이를 뱉을 뻔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센을 바라보았다. “어? 왜?” “전하께서 나를 감싸시면서 유리 파편에 베이셨거든. 그래서 그걸 치료해 드리느라고. 알다시피 어제 다들 정신이 없었잖아. ……절반 정도는 슈, 너를 찾는다고 그랬지만.” 그녀가 다시 한번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바라봤다. 너무 그렇게 보지 마라. 나도 다 사정이 있었다고. 어? “아무튼, 크게 다치신 건 아니더라. ……나를 감싸지 않았다면 안 다치셨을 테지만.” 묘하게 우울해 보이는 그녀를 바라보던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손에 든 조각을 마저 먹어 치웠다. “한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 백성을 내버리고 도망치면, 그거야말로 가오 상하는 일이지.” “가오?” “……어. 자존심?” 여기는 이런 말 안 쓰나? 나는 무안하게 콧잔등을 긁적였다. 유행어 잘못 쓰다가 이상한 사람 되겠네. 조심해야겠다. “근데, 있잖아…….” 센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나는 잠자코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벨리알과 조금 가까워진 지금을 기회라고 생각하겠지. 센의 목표는 복수다. 그리고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황성으로 가야 할 것이다. 내가 읽은 <겨울의 심장>에서 센은 원래 황성의 하녀였고, 또 황성에서 거의 모든 일이 벌어졌으니까.

그러나 북부에 정착하게 된 지금, 일개 하녀에 불과한 신분으로 황성에 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들어간다고 해서 전부가 아니기 때문이다.

권력이 필요하겠지. 어떤 방식으로든.

“왜? 말해 봐.”

“……벨리알 전하께서 내게 하녀가 되지 않겠냐고 말씀하셨어.”

딱 벨리알다운 생각이다. 북부에 대해 잘 알고 있으며, 눈치도 적당히 빠르고, 카일이 최근 관심도 보인다던 그 하녀를 손에 얻으면 조금이나마 승리한 기분이겠지.

그 호승심을 센이 모를 리는 없다. 그러나 상대의 의도가 얼마나 중요할까. 뭐가 됐든 황실로 갈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황자의 관심을 등에 업을 수 있다는 게 중요할 테지.

“잘됐네.”

“……그러게.”

그러나 센은 마냥 기뻐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복잡해 보였다. 기다리던 순간임에도 떠나기 어려운 것이다. 어느새 북부에 정이 들었기 때문일까?

“이따금 생각해.”

센이 조용히 말했다.

“그냥 다 덮어 두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복수는 늪과 같다. 원한을 놓지 못해서 똑같이 되돌려 줘도,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은 결국 끝없는 허무함뿐이니까.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천천히, 그러나 끝없이 아래로 가라앉는 거다.

왜 모르겠는가. 나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마다 속이 새카맣게 탔었다. 가족을 다 잃은 어린애가 홀로 살아남기에 세상은 그리 녹록한 곳이 아니니까.

적어도 나는 센의 마음을 안다.

알 수밖에 없다.

“그래도…….”

나는 무어라 말하려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안다. 너는 복수를 선택할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그 모든 걸 견디기가 싫어서 비워 내고, 피해 냈지만, 너는 그러지 않겠지.

너는 강하구나.

나는 마음속으로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러니까 네가 결국 ‘세레나’가 되었구나. 누가 빙의하든 아니든 그건 변하지 않는 거였어.

“네가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것뿐이었다.

그러자, 센은 울 것처럼 웃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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