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싫습니까?”
내가 입가에 묻은 쿠키 부스러기를 손등으로 쓱 훔치며 물었다.
카일은 갑자기 주머니에서 쿠키를 꺼내 먹는 나를 복잡한 시선으로 보다가 순순히 손을 잡아 주었다.
“그동안 한 연회에서 나와 두 번 춤을 춘 사람은 없다.”
아, 예. 그러십니까. 싫음 놓으시든가. 사실 누구와 춰도 상관없다. 내 목적은 벨리알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뿐이니까.
내가 미련 없이 손을 놓으려 하자, 그가 도리어 힘을 주어 나를 당겼다.
“…….”
이 자식아. 언행일치를 좀 해라. 말이랑 몸이 따로 놀잖아.
“두 번 춤춘 사람 없다면서요?”
내 삐딱한 물음에도 카일은 태연했다.
“싫다고 한 적은 없다만.”
“예…….”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래, 차라리 모르는 놈 발등 밟아 대는 것보다는 이놈 발에 타는 게 낫겠다. 적어도 춤 따라가겠다고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날카로운 바이올린이 두 번째 춤곡의 시작을 알렸다. 샤콘인가? 좀 더 자세히 들으면 알지도 모르겠으나, 애석하게도 한가하게 음악을 듣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나는 아예 시작부터 노골적으로 그의 발등에 발을 올렸다. 카일은 내 무게감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가뿐가뿐하게 잘도 움직였다. 아까보다 더 빠르게 움직여야 하는데도 힘든 기색 하나 없었다.
‘힘 하나는 좋다니까.’
나는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카일과 센을 찾았다. 다행히도 센의 녹색 드레스가 샹들리에 불빛에 반짝반짝 빛나서, 인파 사이에서 그 드레스를 찾는 건 썩 어렵지 않았다.
아니! 눈치 없는 벨리알아, 중앙으로 오지 말라고! 등판에 샹들리에 맞고 싶냐!
“아.”
애석하게도 황자는 황자다 보니 그가 중앙에 서자 다른 사람들이 자연스레 비켜 주었다. 잠시 고민하던 카일도 중앙에서 몇 걸음 떨어져 주었다.
‘아……. 안 되는데.’
미래를 아는 내 속만 바짝바짝 타들어 갔다.
불안한 마음에 시선이 자꾸만 샹들리에로 향했다. 어쩐지 불빛이 조금 흔들리는 것 같다. 눈부신 불빛에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그 미세한 차이라도 잡아내고자 연신 쏘아보았다.
그때, 카일이 저와 내 자리를 살짝 바꾸어 샹들리에를 등지게 했다.
“집중 안 하나?”
내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집중할 게 있나요? 어차피 춤은 전하가 다 추시는데.”
그러니까, 내 표정 쳐다볼 시간에 춤이나 잘 춰라. 사람들이 우릴 봐도 비웃지 않게. 나야 떨어질 명예도 인권도 없다지만, 블레이크 대공작은 사정이 다르잖아.
카일은 조금 짜증스러운 듯 혀를 찼다. 내가 이따금 벨리알의 위치를 확인하는 게, 그를 신경 쓰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벨리알 황자를 좋아하나?”
꽃 두 송이 줬다가는 결혼하는 줄 알겠다. 저는 그냥 초대장을 받아서 그 값으로 흰 꽃을 드렸을 뿐인데요.
‘……뭐, 생각해 보니 수상해 보이긴 하겠네.’
신원 불명의 영지민이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나타나 벨리알의 초대장을 가지고 들어오고, 그가 선물한 정장을 입고, 심지어 꽃을 준다면?
그냥 수상한 게 아니라, 엄청나게 수상하다. 나 같았으면 넌 뭐 하는 놈이냐고 당장에 채근했겠다.
“아뇨, 그건 아니고…….”
내가 눈으로 벨리알을 좇으며 말했다. 영 신뢰하기 어려운 꼴인 건 알지만, 사고가 벌어지고 나서 후회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카일이 삐딱하게 웃으며 물었다.
“그렇게 열렬히 쳐다보면서?”
“……누가 열렬해요? 아니거든요?”
누가 보면 벨리알에게 꽂혀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인 줄 알겠네. 아니라니까?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는 카일 블레이크의 가장 큰 위협이자 중요한 대적자다. 카일을 살리는 것으로 기적 수치를 올려야 하는 내게 벨리알은 곱게 보려야 볼 수 없는 인간이란 뜻이다.
너 좋고 나 좋은 일이야, 인마. 저 원수 같은 놈 등짝을 지키는 게 북부를 지키는 일이고, 네 목숨 지키는 일이고. 겸사겸사 내 목숨도 좀 줍고.
“춤이나 마저 춥시다. 그래도 성의 주인인데, 왜 이런 구석에 계세요.”
“…….”
“저쪽, 저쪽이요. 중앙으로 가자니까요.”
카일은 수상해 죽겠다는 시선을 보내면서도 결국 내 말대로 걸음을 옮겨 주었다. 착하다. 말 잘 듣네.
그때,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끼익. 아주 얇은 소리에도 나는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
시스템이 반응하는 걸 보니, 기분 탓은 아닌 모양이다. 가슴이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일어날 일은 어떻게든 일어난다는 게 운명인 걸까?
‘아니지.’
그렇게는 안 된다.
원작의 흐름이 그렇다는 이유로, 혹은 그렇게 일어나기로 한 일이라는 이유 뒤에 숨어서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뭐든 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거잖아.
[Σ(っ °Д °;)っ]
[(>︿<;;)っ] [(ㅠ_ㅠ)=(ㅠ_ㅠ)] 시스템 창이 동시에 여러 개가 떠올랐다. 간절한 심경을 대변하듯 깜빡거리기까지 했다. 끼익, 아까보다 조금 더 크게 흔들린 그림자가 카일의 이마 위를 잠시 드리웠다. “믿어 봐요.” 내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뭘 하든, 당신 목숨 갉아먹는 짓은 안 할 거니까.” 내가 미쳤다고 그런 짓을 하겠어? 가볍게 웃은 나는 카일의 발등에서 내려오는 동시에 그의 단단한 어깨를 밀쳐 냈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내 허리를 감고 있던 카일의 팔도 느슨해졌다.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벨리알에게 몸을 날렸다. 뚝. 때마침 헐거웠던 연결이 끊어지며 샹들리에가 추락했다. 벨리알과 센이 댄스 플로어의 정중앙에 섰을 때, 모든 현악기가 클라이맥스를 부르짖는 순간이었다. 아마 카일도 뒤늦게서야 상황을 파악했을 거다. 내 등 뒤로 그가 팔을 뻗은 것도 같았다. 물론, 돌아볼 여유는 없었지만. “…….” 시간이 이상하리만치 천천히 흐르는 것 같았다. 그럴 리 없을 텐데도. 간절하게 뻗은 내 팔은 벨리알에게 닿지 못했다. 대신 센을 밀쳐 냈고, 중심을 잃고 옆으로 쓰러지는 센의 몸을 벨리알이 받아 안았다. 쾅―! 샹들리에가 떨어졌다. 퍽! 동시에 커다란 굉음이 내 온몸을 흔들고, 이어서 유리가 수천 조각으로 부서져 흩어졌다. 음악 같은 건 끊긴 지 오래였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카일은 고함을 질렀다. 그가 내 이름을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눈앞이 흐려졌다. 아득한 고통이 해일처럼 밀려와 나를 덮쳤다. 정신을 잃기까지 몇 초가 걸렸는지는 잘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빨리 기절해서 다행이었다. 그 끔찍한 고통을 오래 겪지 않아도 됐으니까. * 처참한 기분이었다. 화려하게 반짝이던 대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경비병! 손님들을 대피시켜라!” 다급한 고함에 문이 일제히 열리며 경비병들이 들어왔다. 카일은 쓰러진 청년을 얼른 안아 들며 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벨리알을 부축하고 있었다. 튀어 오른 유리 파편에 손을 다친 모양이었다. “제가 할게요!” 센이 재빨리 외쳤다. 카일은 대답조차 못 하고 품 안의 이를 고쳐 안았다. “의사를 불러라.” 카일의 명령에 경비병들이 허겁지겁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전하. 당장 여기로 오라 이르…….” “아니.” 여기까지 오려면 늦다. 카일이 이를 악물며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장갑 낀 손이 온통 붉었다. 피로 흥건히 젖은 탓이다. 상태를 보니 데려가는 것도 늦다. 중간에서 만나는 게 낫다. 그게, 어디지? 오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서재로 간다.” 슈라고 했던가. 이국적인 것을 넘어 어딘가 이질적인 인상의 청년은 이미 기절해 있었다. 떨어지는 샹들리에에 맞아 넘어진 데다 바닥에 구르기까지 해서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샹들리에가 정수리 위로 떨어지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정통으로 깔렸다면 이렇게 챙겨 들 새도 없이 죽었겠지. “…….” 연회장을 둘러볼 여유도 없었다. 카일은 서재까지 그야말로 미친 듯이 내려갔다. 계단을 한꺼번에 네 개씩 뛰어 내려가면서도 그의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사력을 다했다. 품에 안은 몸이 차가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옷이 피로 젖어 간다. 절로 초조해졌다. 잡았어야 했는데.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으나 곧바로 팔을 뻗었다. 잡아야 한다는 본능적인 직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잡지 못했다. 얇은 갈색 머리카락만이 제 눈앞에서 유령처럼 흔들렸을 뿐이었다. 기분 탓이었을까? 슈의 몸이 새하얀 빛에 휩싸인 것 같았다. 그건 샹들리에의 불빛이었을까, 아니면……. “이봐.” 이 수상한 이방인에게 묻고 싶었다. 말해 봐. 너는 이 순간을 예상하기라도 한 건가? 왜 이 모든 일이 일어날 것을 알았다는 듯이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았지? 두리번거리며 벨리알을 찾거나 위를 올려다보던 게, 이 재앙을 내다보았기 때문인가? 예언가가 아니고서야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아니, 예언가라고 하더라도 그렇게까지 정확히 사건을 예측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속이 바짝바짝 타는 기분이었다. 카일은 북부의 혹독하고 참담한 전장에서 10년도 더 굴렀다. 그러니 이보다 더한 상처를 본 적도, 입은 적도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한 위기감이 들었다. 울렁거리는 속을 잠재우기 어려웠다. ‘죽지 마.’ 그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죽지 마라.’ 수상하고 이상한 녀석아. “의사는?” “다른 부상자들을 돌보던 중이셨다고 합니다. 외상 치료에 필요한 도구를 챙겨서 바로 오신다고 하셨으니, 십 분이면 도착하실 것입니다.” “그래. 나는…….” 카일은 식은땀을 닦았다. 그를 엎드리게 하자마자 상의를 벗기고 유리 파편을 뽑아낸 뒤, 붕대를 감아 급한 지혈을 마쳤다. 이곳을 지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카일은 슈의 얼굴을 흘끗 보았다. 아주 얕게나마 가슴팍이 오르내리고 있다. ‘버텨 주겠지. 십 분은.’ 그도 그이지만 현실적인 문제도 해결해야 했다. 특히 벨리알이 부상당했다면, 이는 북부의 미래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는 문제다. “……연회장의 소란을 정리하러 간다. 따라와.” “서재는 어떻게 할까요?” “문을 열어 둬. 의사들이 곧장 들어와서 치료할 수 있도록.” “알겠습니다.” 카일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였다. 연회장으로 가면서도 정신은 아직 서재에 있었다. 자연히 행동이 급해졌다. 어서 일을 끝마치고 그 남자에게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