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실 꽃의 주인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으니 고민할 것도 없었다. 줘야지. 주는 대가로 연회에 들어오기로 했잖아. 이래 보여도 대한민국의 준법 시민이었는데.
“여기요.”
자, 입장료.
나는 떨떠름한 얼굴로 벨리알에게 흰 꽃을 주었다. 그래도 명색이 황자 전하인데 꽃 한 송이 못 받으면 그 얼굴이 아깝기는 하다.
“약속대로 드리는 겁니다.”
벨리알의 눈이 휘어지더니 부드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닿는 사람이 누구든 사르르 녹일 것 같은, 곱고도 유려한 눈길이었다.
“고맙군.”
뭘, 꽃 한 송이에 그렇게 감동하실 것까지야. 깜짝 선물도 아니고.
벨리알은 흰 꽃의 줄기를 반으로 뚝 꺾어 짧게 만들더니, 제 연미복 앞주머니에 비스듬히 꽂았다. 왜 코르사주를 안 달고 왔다 했더니 이렇게 하려고 비워 둔 모양이다. 자식, 계획적인 거 봐라.
“블레이크 영지민의 존경이라니, 감흥이 새로워.”
벨리알이 고개를 살짝 돌리며 카일에게 말했다.
“안 그런가?”
살짝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니 어지간히도 신난 모양이다. 애냐? 애야? 꽃 한 송이에 신나서 헤벌쭉 웃고 약 올리게?
벨리알의 질문에 카일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축하드립니다.”
정말 쥐톨만큼도 축하하지 않는 목소리였다. 심지어 그 붉은 눈동자는 벨리알이 아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를 조용히 힐난하는 것처럼.
왜. 어쩌라고. 대공 전하는 많이 받으셨잖아요. 바구니가 수북해지셨는데요. 그러니까 한 송이만 양보해. 그까짓 꽃 한 송이.
“그건?”
카일이 검지로 나를 아니, 정확히는 내 손을 가리켰다.
내 손에는 아직 누구에게도 주지 않은 붉은 꽃 한 송이가 쥐어져 있었다. 다른 이들이 이 꽃을 누군가에게 건네며 춤 신청을 할 동안, 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도 그럴 게 이 꽃은 ‘친애’를 상징한다고 했다. 친애하는 사람이 퍽이나 있겠다. 배수현일 때도 연애와는 만리장성 쌓고 지냈는데.
“안 줄 겁니다.”
내가 딱 잘라 말했다.
뭘 그건 나 달라는 시선이야? 안 준다. 이건 내 거야.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벨리알도 뭔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센이 제 몫의 꽃 두 송이를 모두 카일에게 준 것을 본 탓이다.
기왕 줄 거면 이것까지 달라는 거냐. 형제가 쌍으로 양심들이 없으시다. 꽃 가지고 경쟁하지 마라, 이놈들아.
“…….”
하지만 이건 진짜 주기 싫다. 그렇다고 대공과 황자가 동시에 보고 있는데 가만히 있기도 좀 겸연쩍었다.
대충 좀 넘어가면 안 될까. 경쟁심 어린 눈길을 좀 치워 줬으면 좋겠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붉은 꽃을 보란 듯이 내 입에 딱 물었다.
아무도 안 줄 겁니다. 제 거라고요.
“으므드 은 즐 급느드. 즈 그르그으.”
……뭐, 발음이 좀 새긴 했다.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라. 나는 잡상인이라도 쫓는 눈길로 고개를 홱홱 흔들었다. 꺼져! 가서 춤이나 춰!
“푸훗, 하하. 아하하.”
그때, 벨리알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하는 짓이 하나같이 기발하군. 북부에 이런 흥미로운 이가 있었을 줄이야.”
카일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이어 그는 벨리알과 나 사이를 가로막듯이 성큼 다가와 서더니, 내게 붉은 꽃을 내밀었다.
……뭐? 잠깐, 꽃을 내밀었다고?
“그대에게 오늘의 첫 춤을 신청하지.”
잠깐만요.
“음악이 곧 시작하겠군. 춤은 출 줄 아나?”
잠깐만요!
이봐요! 이건 아니잖아요! 무슨 춤 신청을 이렇게 해요! 꽃 물고 있어서 대답도 못 하는데!
나는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카일에게 팔을 붙잡혔다. 걸음을 옮기다 보니 어느새 댄스 플로어 위였고, 사방에서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그래, 이상하기도 하겠다. 이 연회장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인 카일 블레이크가 첫 파트너로 신원 불명의 남자를 골랐으니까.
망했네.
“츰츠븐 즉 읎드그으.”
춤춰 본 적 없다고요. 놔라, 이놈아.
물론, 씨알도 안 먹혔다.
“으 즈릉 츠느그으. 즈그 스름 믆은드.”
왜 저랑 춤추려 하시냐고요. 저기 사람 많은데!
이를 꽉 악물고 말하는데도 카일은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왜 그대랑 추기는. 저기 많은 사람 중에서 그대만이…….”
카일이 내 쪽으로 허리를 살짝 숙이며 낮게 속삭였다.
“내 반려 아니던가.”
……아, 망할 인생아. 이걸 알아보네.
뭐라고 대답하고 싶었으나 꽃이 방해돼서 대답하지 못했다. 다시금 손에 옮겨 들자니 그가 천연덕스럽게 내 손을 가져다 제 허리에 감게 하고, 다른 손을 제 큼직한 손과 맞잡는 통에 그러지도 못했다.
이내 우리를 비롯한 댄스 플로어 위의 사람들이 오르골 속 인형들처럼 뱅글뱅글 돌기 시작했다.
경쾌한 왈츠 박자에 맞추어 나는 춤을 추…… 다가, 역시나 카일의 발을 꾸욱 밟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춤을 춰 본 적이 있어야지. 그의 속도에 따라가려니 정말 다리가 찢어질 것 같았다.
꾹.
결국, 다시 그의 발을 밟았다. 아까보다 더 세게 밟았는데 그는 아프지도 않은지 태연했다. 아파도 어쩌겠냐. 참아라.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
그놈의 반려! 원수 같은 반려! 이 주둥이가 문제지!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냐, 배수현!
나는 그의 발등을 꾹 밟았다. 이번엔 고의였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게 내가 아는 이를 닮았군.”
이제 카일은 아예 내 허리를 번쩍 감아 들더니 제 발 위에 내 발을 얹게 했다. 그러더니 태연하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안 무겁나?’
덕분에 편하기는 했다. 그냥 그에게 붙어 있기만 하면 되니까.
물론 거리감이 아까보다 좀 더 가깝다는 게, 그래서 이따금 아래를 내려다보는 그의 앞머리가 내 이마에 스치거나 숨결이 간지럽게 와 닿는다는 점이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그나저나, 닮긴 누굴 닮아. 팔다리 긴 서양 놈들 사이에서 동양인인 나랑 닮은 이목구비가 대체 어디 있겠냐.
‘……설마, 햄스터를 보고 날 떠올린 건 아니겠지?’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까지 눈치가 좋으려고. 종족부터가 다른데. 그냥 블레이크 영지에도 나만큼 맹숭맹숭하게 생긴 녀석이 있나 보지.
“사람에게 그런 상상은 실례인가.”
카일이 낮게 읊조렸다.
……아, 이 자식. 눈썰미 한번 귀신같네.
“그래서, 대답은?”
그의 목소리가 서늘했다. 정중한 어투였으나 그 안에 담긴 압박감은 무시할 수 없었다. 전신의 피가 빠져나가며 부르르 떨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니, 뭐. 대답하려고 해도 대답할 말이 없다고요. 뭐라고 할 거야? 내가 네 반려 햄스터라고 말하려 했다, 할 순 없잖아?
그리고 이놈의 꽃. 이 원수 같은 꽃! 구두에 침이나 안 흘리면 다행이다. 말 시키지 마라. 확 침 흘리는 수가 있어.
“그근 그능 증는츤 급느드.”
그건 그냥 장난친 겁니다.
조크라고요, 조크. 농담 모르냐? 꼬치꼬치 캐묻지 말고 대충 알아들어라.
“장난이라.”
카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웃는 것인지 위협하는 것인지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예리한 곡선이었다.
“꽃은 이만 받아 가야겠군.”
고개가 더 가까워졌다.
그 순간, 나는 이곳이 댄스 플로어 위라는 것을 잊었다. 온 시야를 그가 다 메우자, 신기하게도 시끄러울 정도로 크게 느껴지던 음악 소리마저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온 세상에 나와 그 남자만 존재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
카일의 움직임이 느리게 보였다. 이마가 맞닿을 만큼 다가온 그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지고, 가닥가닥 내려온 검은 속눈썹을 헤아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가…….
꼭 입맞춤할 것 같은 그 자세 그대로, 그가 내 입에 물려 있던 붉은 꽃을 가져갔다.
“저기, 이게, 무슨…….”
눈 뜨고 코 베이는 것도 아니고, 눈 뜨고 꽃 뺏겼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
내가 뭐라고 따지기도 전에 그가 내 몸을 살짝 떠밀더니 한 바퀴 빙글 돌렸다. 내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추어 한 바퀴 도는 사이, 그는 한 손으로 꽃줄기를 쥐고 반으로 뚝 꺾어 제 연미복 앞주머니에 비스듬히 꽂았다. 아까, 벨리알이 그랬던 것처럼.
고작 한 바퀴 돌 시간에 그 일을 능숙하게 해낸 카일이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몸이 앞으로 기울어 휘청하자마자 다시 그의 발등을 밟고 올라온 꼴이 되었다. 춤 한번 더럽게 잘 추네.
“대공께서 남자 취향이라고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이러십니까?”
혼삿길 막힌다고 북부가 시끌시끌해지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내 떨떠름한 물음에 카일이 대수롭지 않은 듯 대답했다.
“난 누구들처럼 아이를 낳아 가문을 이어야 하는 형편이 아니라서.”
“이곳 영주 아니십니까?”
“북부는 혈통으로 이어지지 않아. 오직 강한 힘만이 북부를 다스린다.”
“아, 예. 그러세요…….”
나는 심란한 말투로 대꾸하다가 아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말을 말자, 말을 말아.
“이름이 뭐지?”
“슈요. 슈.”
나는 건성으로 대답하며 주변을 살폈다.
벌써 첫 번째 곡이 끝나고, 춤 상대를 물색하던 이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틈에는 벨리알과 센이 있었다.
‘야, 시스템. 불러오기 시간 얼마나 남았어?’
[앞으로 10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뭐?’
야! 너무 모자라잖아!
10분이면 지금 카일을 밀치고 뛰쳐나가도 시간이 부족하다.
[‘견과류 상점’을 사용하시겠어요? ( •̀ .̫ •́ )✧]
선택권이 없다. 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아까 보았던 것을 찾아냈다.
[오래가는 도토리 쿠키 |기적 수치 1% 소모 | ‘불러오기’ 시간 1시간 연장]
조그마한 과자 하나가 내 주머니 안으로 쏙 들어왔다.
‘진짜 도토리 모양이네.’
나는 고민할 것 없이 포장을 까서 입에 쏙 넣었다. ……도토리 맛이다. 미묘한데…….
“그럼, 한 곡만 출게요. 전하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춤을 잘 추지 못하는데…….”
“상관없어. 그 정도도 리드하지 못하려고.”
벨리알이 허리를 숙이며 센에게 손을 내밀어 보였다. 아무래도 두 번째 춤곡이 시작되기 전에, 두 사람이 댄스 플로어 위로 올라가려는 모양이었다.
‘……안 되는데.’
내 불안한 시선이 샹들리에로 날아갔다.
‘아, 진짜 안 되는데.’
이번에도 선택권이 없다. 더러운 인생. 나는 카일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저랑 춤 한 곡만 더 추시죠, 대공 전하.”
한 판 더 뜨자, 인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