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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이 소란스러웠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이어 수십 개의 눈동자가 나를 살피는 것이 느껴졌다.
이런 관심은 부담스러운데 말로 합시다, 말로. ……아니다. 말로 하는 것도 부담스러우니까, 그냥 신경 끄십쇼.
경비병이 나를 이상한 놈 보듯이 훑어보기에 초대장 뒷면이 떡하니 보이도록 내밀었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황자님 초청으로 오신 분이시다. 그러니 구경거리 만들지 말고 빨리 안에 들여보내라.
“잠시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초대장이 있는데 기다리라고요?”
올려 묶은 머리가 어색한지 훤히 드러난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센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황자님께 직접 받았다니까요?”
센과 면식이 있는지, 경비병이 뚱하게 응수했다.
“일개 하녀와 신분도 확실하지 않은 놈이 초대장을 들고 왔는데, 그럼 믿겠냐? 혹여나 훔쳐서 들어온 거면 연회장이 쑥대밭이 될 텐데, 그걸 어떻게 감당하라고?”
“그럴 리가 있겠어요? 이러다가 확인했는데, 진짜면 그땐 감당하시려고 그러세요?”
“그래, 그래. 감당할 테…… 화, 황자님.”
말을 잇던 경비병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뒤를 돌아보자, 화려한 차림의 벨리알이 팔짱을 끼고 이쪽을 보고 있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양반은 못 되겠다.
나와 센을 번갈아 바라보던 벨리알의 녹색 눈이 가늘어졌다.
“잘 맞는군. 준비한 옷은 마음에 드나?”
“네, 전하.”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너무 잘 맞아서 어색할 정도입니다.”
눈대중만으로 이렇게 정확히 맞출 수도 있나. 보통 변태가 아니다.
“내 안목이 좋은 편이지. 그런데, 안 들어가고 뭘 하고 있지?”
이쯤 되니 경비병도 더는 우리를 막을 이유가 없었다. 트집 잡힐 일은 하지 않는 게 최선일 테니까.
그가 겸연쩍은 표정으로 길을 비켜 주었다. 나와 센은 그제야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뒷사람께서는 초대장이 없겠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저 얼굴을 어떻게 막아?
“……와.”
솔직히 연회장은 대단했다. 북부에서 노는 돈이란 돈은 다 여기 쏟아부었나, 싶을 정도였다.
삭막하게 느껴지던 잿빛 천장과 벽도 빠짐없이 불을 밝혀 두니 화사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아래로 수많은 사람이 돌아다니고, 탁자마다 음식과 술이 가득했다.
‘일 년에 한 번뿐인 사치라, 이건가.’
하긴, 수도에서 올라온 이들도 있다던데 이 정도는 대접해 줘야 또 오고 싶겠지. 그들이 축제 기간 동안 북부에서 쓸 돈을 생각하면 낭비보다는 과감한 투자에 가까운 셈이다.
나는 불편할 정도로 빳빳한 목깃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한 시간. 한 시간 안에 해낼 수 있을까.’
예전에 비하면 넉넉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여유로운 건 아니다.
재수가 없으면 내가 연회장에서 나오자마자 샹들리에가 떨어질지도 모르지. 나는 애꿎은 천장을 노려보았다.
[그런 당신을 위한 깜짝 이벤트! ٩( ᐛ )و]
어우, 깜짝이야.
내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시야에 시퍼런 게 떠서 놀랐잖아. 기척 좀 하고 나타나라!
[。:゚(;´∩`;)゚:。]
그래, 시스템이 노크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놈의 깜짝 이벤트는 뭔데?’
[기적 수치 10% 돌파 기념! 지금부터 ‘견과류 상점’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단, 모든 아이템은 일회성입니다.※)]
뭔과류 상점? 견과류?
‘……왜? 있는 호두도 안 먹어서 톱밥 밑에 쑤셔 넣어 놨는데.’
[상품을 보여 드릴까요?]
이렇게까지 설명하는 걸 보면, 뭔가 다른가?
주변을 살짝 둘러본 나는 티 나지 않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센은 벨리알과 무언가 이야기하는 것 같고, 카일은 상석에 앉아 있으니까 여유가 조금 있다.
나는 음식이 가득 차려진 탁자 앞으로 가서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을 조금씩 덜기 시작했다.
이내 시스템 창에 ‘견과류 상점’의 품목이 줄줄이 떠올랐다.
[공중 부양 피칸 파이 | 기적 수치 4% 소모 | 10분간 하늘을 날 수 있습니다.]
[카멜레온 피스타치오 샤브레 | 기적 수치 3% 소모 | 30분간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습니다.]
[해독용 밤 만쥬 | 기적 수치 2% 소모 | 모든 종류의 독을 중화해 드립니다. 숙취 해소도 가능!]
‘……아니, 잠시만.’
돈이 아니라, 기적으로 사는 거잖아. 치사한 거 아니야? 이거 내 목숨이나 다름없는데.
아래로 다른 항목들이 줄줄이 이어졌지만, 대개 지금은 썩 쓸모없는 것들뿐이었다.
나중에 정말 기적을 소모해서라도 필요한 게 있다면 요긴하게 쓸 수는 있겠다만……. 지금 내가 가진 기적은 고작 11퍼센트뿐이다.
‘어?’
그때, 눈에 들어오는 아이템이 있었다.
[오래가는 도토리 쿠키 |기적 수치 1% 소모 | ‘불러오기’ 시간 1시간 연장]
‘불러오기’ 시간을 늘리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고작 한 시간 늘려 주면서 기적을 1퍼센트나 먹는다고? 심지어 일회성인데? 가성비가 없다 못해 죽어 나자빠진 수준이었다.
‘미치겠네.’
웬만하면 사 먹을 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
“일단 먹자.”
그래,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온종일 굶었더니 배고파서 돌아가시겠다. 나는 접시 위에 산처럼 쌓은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문제의 샹들리에는 댄스 홀 위에 걸려 있는데, 지금은 아무도 홀에 올라가 있지 않았다. 벨리알은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고, 카일은…… 뭐야, 지금 여길 보는 건가? 에이, 아니겠지.
나는 포크로 생선 요리를 콕 찍어 입안에 쏙 넣었다. 새콤하면서도 톡 쏘는 맛이 혀끝에서부터 찬찬히 퍼졌다.
‘음. 괜찮네.’
추운 지방답게 생선 살이 기름지고 고소하다.
나는 내친김에 구운 채소와 말린 자두를 버무린 샐러드도 먹어 보았다. 토마토는 식감이 물컹해서 별로일 것 같았는데, 바싹 구우니까 느낌이 달랐다.
‘북부라서 간이 좀 삼삼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매콤한 게 많네.’
고기들이 기름진 편이어서 그런 모양이다. 소고기도 양고기도 아닌 것 같은 마수 고기는 겉을 바삭바삭하게 튀겨서 매운 소스를 잔뜩 끼얹었다. 한 조각 찍어서 입에 넣어 보니, 씹을 겨를도 없이 사르르 녹았다.
……생각보다 맛있어서 무슨 고기인지, 솔직히 조금 궁금했다. 하지만 어쩐지 알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도 있으니까.
[(ㅠ(00)ㅠ)]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지금 안 먹으면 나중에는 먹고 싶어도 못 먹는다니까?
하여 남들이 적당히 수다 떨 동안, 나는 열심히 먹었다. 목이 막힐 때 즈음에는 부드러운 샴페인으로 좀 축여 주고, 다시 한 바퀴 돌고. 당이 떨어진다 싶을 때는 우유 크림을 듬뿍 올린 케이크로 입을 달랬다. 그리고 다시 수프부터 한 바퀴를 더 돌았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지.’
뷔페 가면 원래 두 시간쯤 걸려서 배 채우는 거 아닌가. 적어도 나는 그랬다. 삼십 분 걸려 이 정도면 내 기준에서는 정말 많이 봐준 거다.
부드러운 빵 조각을 초콜릿 소스에 쿡 찍어서 먹는데, 카일과 눈이 마주쳤다.
수심 가득한 눈빛을 보니 우리 햄스터도 저렇게 잘 먹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네 햄스터 잘 먹고 있다. 염려 마라.
“거기.”
……어라? 그게 아닌가?
카일의 표정이 제법 심상치 않다.
그가 저에게 무언가 이야기하던 이들에게 살짝 손을 들어 잠시 기다리라고 한 뒤, 이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온다.
거리가 꽤 벌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다리가 길어서인지 몇 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저요?”
순간 목덜미가 싸늘하게 식는 게, 망조를 본능적으로 느낀 것 같았다. ……설마.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나?”
있겠죠. 메이드복을 안 입어서 긴가민가 하시는 건가. 나는 시선을 슬쩍 피하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없는데요.”
제발 없었으면 좋겠다.
“잘 생각해 봐라.”
“잘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카일의 붉은 눈이 위험하게 번뜩였다.
‘아, 안 속아 주네.’
여기 사람이 몇인데, 사소한 일은 그냥 좀 넘어갑시다. 예? 여기서 변태 하나 잡는다고 세상이 더 나아진다든가 하는 일은 없거든요.
아니, 그리고 애당초 변태도 아니다. 나도 피해자라고.
“반…….”
아니, 아니지! 아니지!
나는 허겁지겁 팔을 뻗어 그의 입을 막았다. 반려라니! 말이 심하시네. 아니거든요? 인간일 때는 반려 수식어 뚝 떼고 갑시다, 떼고!
카일이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 눈길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봐, 만난 거 맞네.
……똑똑한 자식. 이런 식으로 함정을 파?
“북부 음식이 맛있더라고요.”
나는 최대한 너스레를 떨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전, 한 접시 더 먹으러…….”
하지만 카일은 어림도 없다는 듯 내 팔을 덥석 쥐었다. 큼직한 손이 팔뚝 한번 쥐었을 뿐인데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와, 힘 좋네. 북부대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그래도 안 돼, 인마. 나도 변명할 게 없어서 궁색하단 말이다. 제가 잠깐 사람을 잘못 봤네요, 할 수도 없고. 원래 말했던 것처럼 네 반려 햄스터다, 하기도 좀 그렇다고. 그런 건 말하자마자 도망쳐야 하는데, 그럴 상황도 아니잖아. ……내가 미쳤었지.
“이거 좀 놓고…….”
이럴 땐 모르쇠가 최고다.
그래. 나는 모른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내가 꿈질거리며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빠져나오기 위해 애쓸 때였다.
“내 손님이 곤란해하는군.”
언제 온 건지 벨리알이 카일의 손목을 쥔 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단정한 얼굴에 의기양양한 미소가 가득 떠올라 있었다.
카일은 금방이라도 벨리알을 한 대 치고 싶다는 듯 불손한 눈길로 바라보았지만, 그 대신 나를 천천히 놓아주었다.
다행인 일이다. 내가 지금 햄스터였으면 벨리알은 팔목 하나가 나갔을지도 모른다.
“손님, 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대공. 제게는 귀한 사람이지요.”
내가 벨리알의 뒤에 슬쩍 숨자, 금세 다가온 센이 흰 꽃과 붉은 꽃을 한 송이씩 나누어 주었다. 차디찬 북부의 땅을 뚫고 자란 꽃이라서인지 꽃잎이 다른 꽃보다 단단했다. 꼭 동백꽃 같네.
“곧 꽃 수여식이 있을 거래.”
센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수여식이 끝나면 메인 댄스가 이어질 거고. 수여식, 해 본 적 있니?”
“……아니.”
“흰 꽃의 의미는 ‘존경’이고, 붉은 꽃의 의미는 ‘친애’야. 보통 흰 꽃은 카일 전하에게 드리는 일이 많고, 붉은 꽃은 고백이나 춤 신청을 하는 데 쓰곤 해.”
나는 센의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앉은 자리에는 벌써 큼직한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블레이크 영지 사람들이야 대개 카일에게 흰 꽃을 줄 테다. 그뿐만 아니라 초대된 귀족이라고 해도 연회의 주최자이자 이 땅의 주인인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건 예의나 상식 정도로 통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는 이 꽃을 카일이 아니라 벨리알에게 줘야 한다는 거지.’
벨리알의 어깨 너머로 카일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부담스럽게 왜 이래.
“그럼, 이제부터 꽃 수여식이 있겠습니다!”
사회자의 선언과 함께 두 쌍의 시선이 내게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
아무래도 망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