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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5화 (15/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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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분께서 감정이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서 아닐까요?’

그 말에 주변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연한 말이었다. 벨리알이 북부에 온 이유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친황제파 귀족들을 보내 귀찮게 구는 것으로도 모자라서, 이젠 직접 나서서 트집을 잡겠다는데.

<겨울의 심장>에서 나온 카일의 친모는 평민 출신으로 황비는커녕 정부조차 되지 못한 채 하녀로 생을 마감했다. 적자였던 벨리알에게는 카일의 존재 자체가 제 혈통을 모욕하는 것처럼 들렸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나 같아도 좋아하긴 어렵겠다. 내 친부가 난데없이 바깥에서 애 하나 만들어 와서는 형제라고 하는 격인데. 일부다처제가 아니었으면 돌 맞을 짓이지, 그럼. 그래도 인마, 그게 카일 잘못이냐?

벨리알이 고개를 돌려 센을 보았다.

“감정이 상한다?”

센은 떨어진 호두 봉지를 주우며 담담하게 말했다.

“네, 전하.”

벨리알이 이번에는 나를 보았다. 정말 그러냐는 듯한 시선이다.

몰라. 나도 저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합의되지 않은 행동입니다. 하지만 나는 일단 웃었다. 설마, 웃는 얼굴에 침 뱉겠냐.

다행히도 센이 이어 말했다.

“북부 축제의 마지막 날을 장식하는 대연회에는 꽃을 주는 행사가 있습니다.”

“더 말해 보도록.”

“말 그대로 연회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친애하고 존경하는 사람에게 꽃을 건네는 것이지요. 블레이크의 사람들은 자연히 이곳의 주인이신 카일 전하께 꽃을 바치곤 합니다.”

‘그런 게 있었어?’

내 의문에 시스템이 대답해 주었다.

[벨리알의 얼굴에 삐딱한 미소가 걸렸다. 그의 시선이 큼직한 밀짚 바구니에 가닿았다. 카일의 옆에 마련된 바구니에는 새하얀 꽃이 소복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단 한 송이의 존경도 바쳐지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 것을 알았다. 그러니 북부를 통째로 없애 버리고 싶은 것이다. 어떤 이유를 들어서도.]

‘이거 생각보다도 위험한 자식이었네.’

이렇게까지 카일을 미워할 게 뭐가 있냐. 자기 터전 잘 일궈서 먹고살겠다는 사람한테. 사람은 정말 얼굴만 봐서는 모르는 거다. 성격 한번 끝내주게 더럽네.

“이는 북부의 전통과 비슷합니다. 벨리알 전하께서 그 일로 공연히 마음이 상하실까 걱정한 건 아닐지요.”

듣고 보니 그럴싸하다. 적어도 대책 없이 일단 지르고 본 나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구해 줘서 고맙다는 시선을 센에게 날렸다.

“흐음.”

벨리알의 시선에 흥미가 어렸다. 그는 나를 지나쳐 센에게 다가갔다.

빙의자가 바뀌면서 이야기가 어그러지기는 했지만, 어쨌든 엮일 사이는 엮일 사이라는 건가. 그녀를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하지만 사랑이라기에는 어폐가 있는 눈길이었다. 첫눈에 반했다기보다는…… 다른 의미로 뜨겁게 타오르는 듯했다.

‘호승심?’

그래. 사랑이라기보단 승부욕 같았다.

“손에 들린 그것.”

벨리알이 햄스터 용품과 간식을 눈짓했다.

솜사탕 색깔의 쿠션, 플라스틱 공, 톱밥, 거기다가 그네까지 있었다. 아주 햄스터 전용 테마파크라도 만들려는 모양이다.

“그래, 네가 바로 그 하녀로군. 최근에 대공이 서재에 자주 들인다지.”

“대공 전하께서 마수를 키우셔서, 제가 잡다한 일을 돕고 있습니다.”

그래, 둘이 얘기해. 나는 빠질 테니까.

어쨌든, 그런 이유도 있으니 웬만하면 가지 말라고. 하나뿐인 목숨인데 잘 아껴서 백 세 인생 살아야지, 안 그래?

내가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서 사라지려는데 벨리알이 나를 딱 불렀다.

“거기, 너.”

“…….”

관심 주지 마세요. 저한테 신경 끄세요. ‘불러오기’ 시간도 다 끝나 간다고요. 저는 이만 갈 테니까, 둘이 재밌게 노십쇼.

못 들은 척 멀어지려는데 벨리알이 내 뒷덜미를 딱 잡았다.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웃자. 웃어. 더러운 신분제. 야, 너는 황자 아니었으면 죽었다. 진짜…….

“정말 그런 뜻이었나?”

듣고도 뭘 또 묻는지.

아니라고 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하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말했다.

“네, 뭐……. 말재주가 없어서 어떻게 말씀드려야 할지 좀 고민했는데, 센이 알아서 잘해 줬네요. 비슷합니다.”

그러자 벨리알이 신기한 걸 보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마수는 하잘것없게 취급하더니, 사람에게는 꽤 관대한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흥미로운 물건 정도로 취급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네가 내게 꽃을 주면 되겠군. 그럼 그럴 일이 없지 않나.”

이게 무슨 미친 소리야. 내가 대연회를 어떻게 가? 초대장도 없다고!

하인 신분으로 가려고 해도, 행사가 행사다 보니 저들끼리도 경쟁이 엄청났다. 튀김이나 주워 먹는 말단이 끼어들 수 있는 자리가 아니란 말이다.

당황하여 그를 멍하니 보고 있는데, 벨리알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종이를 하나 꺼내 건넸다.

“자.”

대연회의 초대장이었다. 그것도 뒷면에 그의 이름이 떡하니 쓰여 있기까지 했다. 아마 귀빈으로 분류되었을 테니, 카일이 직접 써서 줬겠지.

‘아…….’

거의 떠맡다시피 한 초대장을 보자 머리가 지끈거렸다.

솔직히 말하면 좋은 기회기는 했다. 온갖 수작에도 기어이 벨리알이 대연회에 참석한다면,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따라가서 직접 사건을 막는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이 종이를 받아 든 순간, 제대로 피곤해질 미래가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했다.

“……예.”

일단 챙기긴 챙겼다. 어쩌겠어, 까라면 까야지.

‘불러오기’의 지속 시간이 끝나 가니 슬슬 돌아가야 한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옷을 숨기러 돌아가는 내내 끊임없이 한숨을 내뱉었다.

‘연회장에서 카일을 마주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안 마주칠 리가 없다. 그러게 그 원수 같은 반려 발언은 왜 해서, 왜!

인생이 정말 쉽지 않다.

*

이튿날 오후,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마자 센을 만났다.

“한참 찾았잖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경비병들에게 물어봐도 네가 오가는 건 본 적 없다고 하고, 그렇다고 하인들 숙소에 끼어서 몰래 자는 것도 아니고, 남는 손님 방을 아무리 뒤져 봐도 없었는데!”

“아, 그게…….”

잠은 대공 전하 침실에서 잤지. 요즘은 안 도망가는 것 같으니까 침실에서 재워 주더라.

다만 내가 잠버릇이 썩 고운 편이 아니어서, 정신 차리고 보면 카일 얼굴 위에 올라가서 자고 있었다. 그는 뒷덜미를 덥석 잡아서 나를 다시 옆에 내려놓곤 손수건으로 내 몸을 꽁꽁 감싸서 재웠다.

처음엔 갓난아기 강보에 싸듯 하는 게 영 마음에 안 들었는데, 감기고 나니 생각보다 편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자고 나니까 다시 햄스터 집 안에 들어 있더라.

센이 사 온 장난감을 좀 타 주는 척하다가 그가 나가는 걸 확인하고 ‘불러오기’ 하니 어느새 오후였다.

“……그렇게 됐어.”

뾰족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아서 묵비권을 행사하기로 했다. 이상한 거짓말을 하다가 들키는 것보다는 좀 수상해도 무해하다는 인상을 심어 주는 게 낫다.

센은 수상해 죽겠다는 시선으로 나를 잠시간 바라보았지만, 이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금세 넘어갔다.

“이거 주려고 아침부터 찾아다녔어.”

그녀가 내게 큼직한 상자 하나를 건넸다. 생각보다 묵직했다.

“이게 뭔데?”

“연미복이야. 벨리알 전하께서 보내셨어. 네 이름조차 모르신다고, 내게 네 몫까지 주시더라.”

“허…….”

신기한 놈이다. 이름도 모르는데 옷을 준비해 줄 생각도 하고. 하긴, 모르는 놈에게 꽃 한 송이 받겠다고 초대장을 준 것부터가 보통 놈은 아니었다.

“나도 받았어.”

센이 제 몫의 상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함께 오라시더라. 태어나서 처음 입어 보는 드레스야. 사실 이런 걸 입고 가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지만…….”

나는 심란해 보이는 센의 얼굴을 슬쩍 못 본 척했다.

“어쨌든 슈, 네 덕에 예쁜 옷도 입게 됐어. 그런데 황자님께 대연회에 가지 말라는 말은 왜 한 거야? 정말 꽃 때문에?”

“아. 그건 아닌데…… 그냥 좀, 감이 안 좋아서.”

나는 괜히 무안해져서 그녀를 툭 쳤다.

“어쨌든, 연회에 가 보잖아. 하인도 아니고 손님으로. 좋은 게 좋은 거지.”

“그건 그래! 내가 이 은혜 꼭 갚을게.”

“기왕이면 음식으로 갚아.”

북부 음식 맛있더라.

“그렇게 먹은 건 다 어디로 가?”

“……그러게.”

햄스터 뱃살로 가는 것 같다.

덕분에 최근, 카일이 뽀뽀해 대는 시간보다 뱃살 만지는 시간이 더 길다. 매번 꺼지라며 발로 차는데도 자기랑 놀자는 건 줄 알고 눈치 없이 좋아한다. 내가 쌍욕을 해도 세레나데로 착각할 놈이다.

나는 센과 연회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다가, 그녀가 고맙다며 가져다준 빵을 배 터지게 먹고 나서야 헤어졌다.

북부 음식, 정말 일품이다.

얇게 저민 마수 고기와 절벽의 바람을 이겨 낸 채소, 거기다 방금 오븐에서 나온 식빵을 한데 겹친 샌드위치는 웬만한 프랜차이즈점 뺨치게 맛있었다.

나는 여유롭게 배를 두드리며 옷과 상자를 잘 숨겨 두었다. 하얀빛에 휩싸여 돌아오니 몸이 무거웠다.

‘카일이 또 잔소리하겠네.’

들어오면 움직이는 거라도 좀 보여 줘야지.

“……캐슈넛.”

―…….

염병.

나는 원통형 미끄럼틀에 꽈악 낀 내 몸을 느끼며 욕지거리를 중얼거렸다. 샌드위치 좀 먹었다고 몸이 이렇게 불어 버리는 건 좀 아니잖아. 두 개밖에 안 먹었다고. 두 개!

[乁(・o・)ㄏ]

그래. 물론 크긴 했는데, 그만큼은 아니다. ……15센티미터 정도였나.

숨을 흡 참고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자 손바닥에 나를 받아 든 카일이 한참이나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야, 뭐 어때. 성인병은 아니겠지.

“내가 준 밥은 안 먹는데, 살은 어디서 쪄 오는 건지 모르겠구나.”

그러게 맛있는 것 좀 가져다 놓지 그러셨어요, 전하. 그러면서도 카일은 연신 내 배를 만지고 있었다. 촉감 놀이하지 마라.

카일은 오늘도 나를 자기 침실에서 재웠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내가 일어나자마자 입에다 억지로 마카다미아를 물려 주었다.

퉥!

저녁에 대연회 갈 거다. 그때 맛있는 거 먹으려면, 배에 공간 남겨 둬야 한다고.

물론, 내 생각을 알 길이 없는 카일은 더없이 우중충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햄스터 집에 넣어 주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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