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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4화 (1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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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축제가 시작된 북부는 겨울의 추위를 잊을 만큼 활기찼다.

‘무언가를 수확하는 시기도 아닌 계절에 굳이 왜 이렇게까지 큰 축제를 열지?’

밤낮으로 찬바람이 불어 대니 축제에 쓸 꽃을 구하기도 어려워서 부르는 게 값이라던데. 추수 감사절도 아니고, 봄도 아니고…… 꼭 겨울이어야만 하나.

“해가 짧으니까.”

센이 내 질문에 명쾌하게 답했다.

“할 수 있는 게 적은 시기야. 일조량까지 줄어들면 사람은 쉽게 우울해지거든. 무기력은 사람의 마음을 병들게 하지. 가난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굶어 죽기도 하고, 비관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허다해.”

그렇구나. 그건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성벽 너머의 붉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직 낮인데도 벌써 사방이 어둑했다.

“그래서 전하께서는 일부러 가장 춥고 어두운 때를 떠들썩하게 꾸미셔. 이 일주일을 위해 한 해 내내 모은 식량을 아낌없이 풀고, 영지민들의 물건을 비싼 값에 사들이시지. 초대받은 각 지역의 귀족들이 돈을 쓰면서 상인들도 숨통이 트여. 선물로 들어온 것들을 다시 영지민들에게 베푸시면서 봄까지 버티는 거야.”

그냥 며칠 정도 날 잡고 노는 게 아니라는 뜻이다. 영주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네. 나는 솔직히 감탄했다.

“곧 카일 전하께서 자선 행사 기념 연설을 하실 거야. 구경 갈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시간도 남고. 벨리알을 만나려고 했지만, 성 밖을 둘러보러 나갔다니 딱히 할 일도 없었다. ‘불러오기’ 시간이 두 배로 늘어나니까 이런 사치도 누릴 수 있게 되는구나.

“길거리에서 음식도 팔아?”

“북부 축제 음식 안 먹어 봤어? 어휴, 안 되겠네. 오늘은 내가 쏜다! 얼른 따라와!”

그렇게 센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떠들썩하고 휘황찬란했다.

‘와, 먹을 거 많다.’

호박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사탕이며 말린 사과, 마수 꼬치구이, 캐러멜 소스를 잔뜩 얹은 튀긴 과자까지. 그야말로 눈도 코도 입도 즐거운 먹거리투성이였다.

‘의외로 살기 좋네, 여기.’

자고로 음식이 맛있어야 영지를 사랑하는 마음도 생겨나는 법이다. 나는 센이 사 주는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며 거리의 생생함을 구경했다.

“대공 전하!”

“감사합니다, 영주님!”

생각보다 신선한 경험이었다. 먼발치에서 본 카일의 연설 장면 역시 그랬다.

원한다면 언제든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보는 그도 좋았지만, 멀리에서도 그 위압감을 어김없이 뽐내는 ‘블레이크 영주’ 역시 멋있었다.

마치 그는 다른 사람처럼 냉혹해 보이는 무표정으로 영지민들을 굽어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겉모습만 놓고 본다면 그가 폭군이나 악당일지도 모른다고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와 그리 오래 지내지 않은 나도 이렇게 잘 아는데, 카일과 함께 이 땅을 일구며 살아간 사람들은 오죽할까.

“북부로 온 건 잘한 선택이었어.”

“누가 아니래? 전하가 아니었다면 우린 다 몇 년쯤 전에 굶어 죽었을 거라고.”

그건 몇 줄의 글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누군가의 생생한 삶이었다.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식지 않는 활기와 열정, 그리고 삶에 대한 불굴의 투지가 살아 숨 쉬는 현실.

“냉혹하고 가차 없는 북부대공이라더니…….”

어딜 봐서 그렇다는 건지. 물론,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지금이 훨씬 마음에 든다.

“자. 이것도 먹어, 슈.”

넋 놓고 카일을 바라보고 있자니 양손에 꿀이 코팅된 과일 꼬치를 든 센이 다가왔다.

나는 탕후루 같이 생긴 그것을 크게 베어 물었다. 바삭바삭한 소리가 나며 과즙이 터졌다. 서늘한 북부의 기후에서 살아남았기 때문인지 적당히 단단한 과일은 맛도 좋았다. 벌써 네 개째 먹고 있다는 것만 빼면.

알차게 보낸 한 시간이었다. 맛있는 것도 먹고, 사람들도 보고. 제법 한가하기까지.

돌아가야 할 시간인 걸 알면서도 아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게 된다. 사람들에게 직접 물건을 나눠 주는 카일에게 자꾸만 눈이 갔다.

그래. 역시 널 살리기로 마음먹은 건 잘한 일이었지.

“문제는 그 꼴로 사람을 살리는 게 가능하냐는 건데…….”

“뭐라고 했어?”

“……아, 아니. 그냥 혼잣말. 간식 고마워. 나 이제 갈게.”

센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넌 대체 매일 급하게 어디 가? 한 시간 이상 있는 걸 못 봤네.”

“그게…… 뭐, 그럴 사정이 있어.”

나도 더 머무르고 싶다. 저기서부터 여기까지 못 먹은 음식이 궤짝으로 쌓여 있는데. ……아, 저 맥주. 저 수제 소시지. 마수 육포는 또 뭐야? 상상만 해도 침이 고인다.

나는 결국, 과자 한 봉지 품에 안은 채 성으로 돌아왔다.

‘카일이 돌아오기 전에 미리 집에 가 있어야지.’

걱정 많으신 우리 전하께서 햄스터 한 마리 찾겠다고 서재를 발칵 뒤집어 놓으시는 일은 없어야지, 암.

그런데, 간과한 다른 문제가 있었다.

“캐슈넛, 네가 건강하기만 하면 나는 더 바랄 것이 없는데…….”

그날도 배가 부르니 결국 아무것도 먹지 않은 것이다. 카일이 뭐라도 먹으라고 입에 마카다미아를 물려 줬지만 귀찮았다.

마법사는 여전히 내게서 어떤 마력의 흐름도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다. 주기적으로 마력을 주입하면서 마력 감응도를 높이자는 제안에 카일의 얼굴이 어둑어둑해졌다.

카일은 나를 손수건으로 조심스럽게 말아서 침실에서 재웠다. 그런데 어쩌냐. 낮에 실컷 자서 잠이 안 오는데.

나는 뒤척이며 잠을 청하는 카일의 얼굴을 줄곧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잘생겼네…….’

보기만 해도 재밌는 얼굴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봐도 봐도 안 질린다.

*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벨리알의 방 위치를 알아내기는 했다. 그러나 문 앞을 지키고 있는 호위 기사들 때문에 그 앞을 지나치는 것만도 무안한 상황이었다.

황족들은 방문 앞에 보초 세우는 게 전통인가? 인생 참 빡빡하게 사시네.

에휴, 그러니까 사람 말 좀 들으라고. 내가 저들 목숨 구해 주려고 이렇게 애쓰는데, 어떻게 한 명도 진지하게 듣지를 않냐? 그 원수 같은 샹들리에! 물건 하나 좀 살펴보라는 말이 그렇게 언짢아서! 이 안전 불감증들아!

벨리알의 방 근처를 서성거린 지는 오늘로 벌써 사흘째였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발언에 힘이 없다면, 힘 있는 놈한테 직접 말하는 수밖에.

이제 대연회도 얼마 남지 않았기에 계속 이렇게 시간만 낭비만 하다간 샹들리에고 뭐고 내가 몸으로 막아야 할 판이다.

별수 없다. 오늘도 만나지 못하면 벨리알의 방 창문이라도 넘는 수밖에.

“어!”

그때, 반대편 복도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는 벨리알이 보였다. 여전히 곁에는 기사들이 여럿 있었지만, 발을 돋우면 얼굴은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한달음에 그에게 다가갔다. 생각할 시간 같은 것도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으니까. 자연히 내 목소리가 절박해졌다.

“황자님!”

철컥.

벨리알의 녹색 눈동자가 내게 와 닿는 동시에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 들어 내 목에 갖다 댔다. 날붙이의 서늘한 감각이 사방에서 목을 향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이 정도면 침 삼키다가 목에 상처 나는 거 아니냐. 거, 살살 합시다. 그냥 황자 좀 부른 것뿐이잖아.

“저기, 이건 좀…….”

무기 하나 안 든 사람에게 너무 과한 처사 아닌가? 내가 지금 미쳐서 당장 삼 단 돌려차기를 한다고 해도 벨리알한테 바람 한 자락 안 닿을 거리다.

벨리알이 손을 들어 올렸다.

“괜찮다.”

문제는 황자님이 괜찮다는데 기사님들은 아직 안 괜찮으시단다. 그들이 검을 거두기가 무섭게 내게 일갈했다.

“전하께 예를 갖춰라!”

뭐, 왜. 어떻게 하라고. 무릎이라도 꿇을까?

아무래도 분위기를 보니 그래야 할 것 같다. 꼿꼿하게 선 채 그들을 멀뚱멀뚱 바라보자 분위기가 다시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알았다고. 알았다니까.’

더럽고 치사한 신분제 사회 같으니.

“이렇게 관심을 퍼부어 주실 만큼 대단한 용무는 없고요…….”

내가 허리를 숙인 채 말했다.

“황자님. 대연회에 가지 마세요.”

나는 말재주가 없는 편이다. 그러니 빙빙 돌려서 못 알아듣게 말하는 것보다는 요점만 간단히 말하는 게 나았다.

벨리알이 내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바닥에 깔린 내 시야에 그의 발끝이 들어왔다. 구두 더럽게 좋아 보이네. 있는 집 자식은 다르다 이건가.

“대연회까지 겨우 이틀이 남았는데, 갑자기?”

“네.”

“방금 내가 대공에게 직접 초대장을 받았는데도?”

“네.”

내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뭘 자꾸 물어, 인마. 그 초대장으로 샹들리에 막을 거냐? 등판에 조명 맞으면 너도나도 물을 것 없이 한 방이야. 목숨 하나밖에 없으면 아껴 써라.

나는 고개를 슬쩍 들었다.

“황자님을 위해 알려 드리는 겁니다.”

네가 조심해야 북부의 미래가 산다. 그래도 밥값은 할 줄 아는 반려 햄스터라고, 내가.

“마치 누가 대연회에서 나를 해치려고 계획하기라도 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벨리알이 속삭이며 내게 더 가까이 다가왔다. 목소리는 분명 사근사근하고 부드러웠으나, 안에 담긴 말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건 아니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카일 전하께서 벨리알 전하를 죽이려고 하셨다면, 굳이 연회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문제를 일으켰을 겁니다.”

그리고 카일은 그걸 바라지 않는다. 마음속으로 한 열 번쯤 목을 내리쳤을지라도 실제로는 절대로 그러지 않을 인간이다.

그는 곧 북부다. 그의 행동은 북부의 미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또, 카일 블레이크는 책임감이라는 게 뭔지 아는 사람이지. 대놓고 꼬장 부리러 쳐들어온 당신과는 다르다고.

“재미있군.”

벨리알이 낮게 웃었다. 이상한 말 하기는. 누가 형제 아니랄까 봐 하는 말도 똑같다.

그가 검지로 내 턱을 슬쩍 들어 올려 눈을 맞추었다. 사람이 온화하면서도 오싹할 수는 없을 줄 알았는데, 이 인간은 그걸 다 해낸다. 어떤 의미로는 대단한 인물이다.

물론, 다른 사람 눈에는 그저 왕자님이 동화책을 찢고 나온 것처럼 보이겠지만.

“낯선 얼굴이야. 생김새가 독특해.”

그야 토종 한국인이라서 그렇고요. 홍대, 상수, 합정 가면 저같이 생긴 애들 오백 명쯤 돌아다닙니다.

“보아하니 북부 사람이 아닌 듯한데, 왜 그렇게 간절하게 날 말리는 거지?”

뭐라고 말해야 하나, 이걸.

등판에 샹들리에 맞은 네가 길길이 날뛰면서 북부를 작살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제가 당신 미래를 책에서 좀 봤는데요, 하면 당장에 저 칼 중 하나가 내 목을 뎅강 자를 것 같다.

누가 좀 도와줘!

벨리알과 우연이라는 이름의 운명 같은 걸로 적당히 엮여 줄 사람 어디 없―.

“아마도…….”

있었다.

“두 분께서 감정이 상하시지 않기를 바라서 아닐까요?”

나는 반가운 마음에 고개를 홱 돌렸다. 햄스터 장난감과 간식을 품에 가득 안고 있던 센이 눈치 좋게 끼어든 것이다.

‘그래, 이거지!’

[(*≧▽≦)ノシ))]

‘……그렇게 기뻐하진 않았거든.’

그래도 기쁜 건 맞다.

센이 미소 띤 얼굴로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기분 탓인가? 센의 뒤로 후광 같은 게 보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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