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13화 (13/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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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입니다.”

‘뭐야?’

“뭐야?”

어우. 내가 드디어 사람 말을 할 수 있게 됐나 했네. 당연하게도 카일의 질문이었다.

대공의 목소리에 노기가 실린 것을 알아챈 수의사가 살짝 몸을 떨었다.

“그, 그것이…… 전하의 반려 햄, 아니, 설치류 마수께서 입맛이 없고 활동성이 떨어지신다고 하여 살펴보니…….”

숨 막히는 존대였다. 세상천지 수의사에게 이렇게까지 대우받는 햄스터는 나뿐일 거다.

하긴, 대공 전하께서 애지중지한다는데 ‘이 쥐가 말입니다’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대공에게 말 깐 것도 아닌데, 불경죄로 목이 날아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불합리하지만 어쩌겠냐. 종족 위에 신분 있는 세계에 태어난 걸 통탄스러워할 수밖에.

“외상이 발견되지도 않았고, 구토나 설사 같은 이상 증상도 없으시다 하였으니 질환을 의심하기도 조금 어렵습니다. 배를 눌러 보았을 때 복통도 없었고요. 그런데 자세히 눌러 보니…….”

“눌러 보니?”

카일이 진지한 낯으로 어서 말해 보라는 듯 독촉했다. 수의사가 마치 살해 협박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바들바들 떨며 이어 말했다.

“……그냥 뱃살이었습니다!”

살쪘단다.

나는 삐딱하게 누워서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왜. 뭘 봐. 살찐 햄스터 처음 보냐? 처음 보겠지. 많이 봐 둬라. 지금 아니면 못 본다.

물론, 나는 내가 왜 살쪘는지 알 것 같았다. 오전에 너무 신나게 먹었다. 북부 음식 꽤 맛있더라. 아니, 그냥 인간 음식이 맛있다. 말린 황태 같은 거나 백날 갉다가 먹어 봐라. 그냥 밥풀만 먹어도 살맛 난다.

[(^(00)^)]

‘……그렇게 많이 먹었나?’

오전에 센의 소개로 일을 도왔었다. 튀긴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나눠 주는 일이었는데, 하인들이 기름 튀는 일이 싫다고 해서 내가 대신 하겠다고 나섰다.

내가 누구냐. 대학 다닐 때 등록금 벌겠다고 4년 내내 강남구 역세권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한 독종 중의 독종이시다.

내 현란한 튀김 솜씨에 출신이고 뭐고 할 것 없이 튀기는 요리는 모두 내 몫으로 돌아왔다.

이리저리 바쁜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샌드위치 한 입. 꽈배기도 한 입. 샌드위치 한 입. 꽈배기 한 입. 도넛 한 입. 고기 튀김 한 입……. 한 입이 열 입 되고, 열 입씩 몇 번을 반복했더라?

하여튼, 30분 동안 배 터지게 먹었다. 햄스터의 건강을 위해 카일 놈이 튀긴 건 안 준단 말이다. 이 고칼로리 음식들이 얼마나 그리웠다고.

궂은일을 신입에게 시키던 꼴을 보면 나름 텃세였던 모양인데, 오히려 좋다. 덕분에 자알 먹고 갑니다. 역시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 아니, 인간이 좋다.

배를 두드리며 주방을 나섰을 때, 하인들이 음식이 생각보다 적게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알 바냐. 얼굴에 철판을 깔고 모르겠다고 했다. 북부가 하도 추워서 낯짝도 두꺼워졌다.

그게 오전 중의 일이다.

“캐슈넛은 오늘 아침부터 내내 굶었단 말이다!”

카일이 호통치듯이 말했다.

당연히 안 먹지. 너 같으면 튀김 한 박스 먹고 왔는데, 땅콩 따위에 눈이 가겠냐? 너나 먹어라.

물론, 처음에는 먹기만 할 생각이 아니었다. 샹들리에 사건을 막기 위해, 관계자들에게 대연회장의 중앙 샹들리에를 점검하라고 말하려고 했다.

다만, 내 말에 설득력이 없다는 게 문제였다. 신원도 애매한 녀석이 나타나 대연회장을 다시 확인해야 한다고 박박 우긴들 누가 믿겠는가.

황성에서 선물한 물건을 욕보이지 말라며 구박이나 실컷 당하고, 제대로 음식을 안 튀기면 큰일 날 줄 알라며 바구니나 잔뜩 안겨 주더라.

어쨌든, 아침에 그렇게 먹고 와서 오후까지 늘어지게 자자 카일은 그야말로 비상이었다. 입맛이 없는 데다 기운까지 없다면서 수의사에게 설명하던 모습은 퍽 간절하기까지 했다.

“다시 정확히 봐라. 혹시, 배 속에 뭐가 생긴 건 아니겠지?”

수의사가 아닌데, 하는 시선으로 일단 예의상 다시 한번 내 배를 만졌다. 말랑한 배를 꾹꾹 누르더니 그가 다시 몸을 떨며 말했다.

“정말 살입니다…….”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

알겠으니까 내 배에서는 그만 손 떼 줘라. 너무 떨어 대셔서 온몸이 진동하는 것 같다.

“그렇군…….”

카일이 전혀 납득하지 못한 말투로 말했다. 나는 슬그머니 수의사의 손바닥에서 내려와 카일의 팔꿈치에 붙었다.

진정해라, 인마. 수의사가 쪘다면 찐 거겠지. 살찐다고 햄스터가 죽기라도 하냐? 내가 저녁에는 예의상 한두 개라도 좀 먹어 주마. 응?

내 무언의 위로가 가닿기라도 한 건지 카일이 손끝으로 내 등을 슬슬 쓰다듬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비만이라니.”

너무 충격을 받으셨나. 논리가 북부를 뛰쳐나가셨다.

수의사도 나와 대충 비슷한 생각인 듯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조아렸다. 하긴, 목숨은 하나뿐인데 아까울 만도 했다.

“앞으로 관리가 필요하겠지.”

“그렇습니다, 전하. 주기적인 관리가 아주 중요합니다. 되도록 운동을 시켜 주시고, 기름기가 많은 식단은 피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삶은 채소류를 급여해 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듣기로는 설치류 마수께서 아직 성장기시라고 하셨지요.”

내 성장판은 10년도 더 전에 닫혔다, 이놈들아.

“아마 성장기가 지나면 몸집이 커지면서 문제가 조금씩 해소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니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전하. 시간이 해결해 줄 것입니다.”

“그래. 그래야지.”

“장성한 마수의 몸집은 큰 편입니까?”

“이보다는 크다.”

“그럼 쳇바퀴나 숨집 같은 것들을 바꾸셔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필요하다면 집 자체도요.”

카일은 조금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백 번도 더 바꿔 줄 수 있다.”

눈물겨운 햄스터 사랑이다. 엄청난 돈과 그 이상의 사랑이라는 거냐.

“그나저나, 주기적인 관리라고 했지.”

카일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어 말했다.

“그대 실력도 괜찮은 것 같고, 앞으로 이 녀석도 쭉 성장할 테니 북부에 정착하는 건 어떤가.”

“북부에요……?”

수의사는 귀를 의심하는 듯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가 들어와서 나를 살핀 이후로 카일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는데, 대체 뭘 믿고 저를 영입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거다.

하지만 나쁜 제안은 아닌지, 수의사의 얼굴에도 화색이 살짝 돌았다. 혹시 이 남자, 원작에도 나오나?

[수의사.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5일 남았습니다.]

왜 죄다 시한부냐고.

‘어쩌다가 죽는지 좀 알려 줘라.’

[벨리알의 모친이자 현 황후, 세레나 마인하르트의 노묘가 아픈데 도움이 안 되었다는 이유로 노묘의 사망 직후 처형됩니다.]

사유도 황당하기 그지없었다.

‘수의사가 무슨 신이라도 돼?’

시간이 지나면 늙어 죽는 건 종족 공통이다. 고양이가 영생을 못 산다고 수의사를 죽이면 어쩌냐. 대책 없는 황후네.

고양이께서 오늘내일하시니 어떻게든 도망치고자 북부 행렬에 동참한 모양이다. 아마 마차를 끄는 말들을 돌봐야 한다는 핑계라도 댔겠지.

그런 그에게 북부에 정착할 수 있는 이유가 생긴다면, 목숨을 부지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실제로 계산하느라 바쁜 와중, 수의사의 얼굴은 점점 밝아지고 있었다.

“돈은 섭섭지 않게 챙겨 주마. 대우 또한 확실하게 하마.”

돈이 문제겠냐. 목숨을 붙여 주라고, 목숨! 햄스터가 죽는다고 하더라도 너를 죽이지 않겠다고 약속하란 말이다, 이 눈치 없는 놈아!

“더 바라는 것이라도 있나? 황자 전하께는 내가 말씀드리지.”

이놈이나 저놈이나 황가 출신 이들은 종잡을 수 없는지, 수의사는 여전히 고민하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래도 노묘보다는 비만 햄스터의 기대 수명이 길었던 모양이었다.

“대공 전하의 뜻을 영광으로 받들겠나이다.”

그렇지!

나는 칭찬의 의미로 카일의 손에서 내려가 수의사의 팔에 손을 턱 하니 얹어 주었다. 잘 생각했다. 이게 바로 명줄 길어지는 길이다, 이거야.

[운명이 바뀌어, 죽을 예정이었던 인물이 살아났습니다!]

[기적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11.0%]

와. 순식간에 3퍼센트다. 사람 목숨 살리는 게 제일 짭짤하구나.

내 눈에 총기가 돌기 시작했다. 원작에서 이름 하나 안 지어 준 수의사 살리는 데 3퍼센트라면, 카일 살리는 건 오죽하겠어.

화끈하게 옆에 0 하나 더 붙여라, 시스템. 크게 크게 쓰자고.

[현재 ‘불러오기’의 지속 시간은 1시간입니다.]

내내 30분이었던 ‘불러오기’ 시간이 1시간으로 늘어났다. 기적 수치가 10퍼센트를 넘긴 게 이유인 듯하다.

그래, 진작에 좀 오르라고. 그랬으면 내가 지금 튀김을 30개는 더…… 아니다, 그건 그만 먹자. 이러다가 정말 걷는 법도 잊겠네.

햄스터의 몸은 너무 솔직했다. 먹는 대로 찌면 어떡하냐. 그나마 인간형까지 덩달아 찌지 않는 게 다행이다.

“캐슈넛.”

기대 수명 비교를 마친 수의사가 밝은 얼굴로 돌아갔다. 그러나 카일은 여전히 수심 가득한 얼굴이었다. 마치 내 시한부 선고라도 들은 것처럼.

이봐요, 시한부들아. 죽을 날이 한 달도 안 남은 건 너희들이었다고요. 나는…… 엄밀히 따지면 이미 죽을 사람이지. 어쩌면 그냥 죽었는지도 모르지만.

……기적을 일으키면 살아난댔으니, 속는 셈 치고 시스템 놈을 믿을 수밖에.

“자. 아까 설명을 들었겠지?”

보통 햄스터는 수의사 말을 못 알아듣습니다, 전하.

“주기적인 운동이 생명이다.”

카일이 나를 집에 넣어 주며 비장하게 말했다.

모르겠다. 나는 그냥 그 자리에 벌러덩 누웠다. 운동은 무슨 운동이냐. 쳇바퀴 천 바퀴 탄 게 내 평생의 운동을 다 당겨 한 거나 마찬가지다. 너나 해라, 운동.

“얼른. 이걸 좋아하지 않느냐.”

그가 초조한 기색으로 말하며 내 앞에 쳇바퀴를 놓고 검지로 빙글빙글 돌려주기 시작했다. 쳇바퀴는 마치 내가 대관람차 놀이를 했을 때처럼 경쾌하게도 돌아갔다. 어어, 재롱 잘 떤다. 더 돌려 봐라.

“캐슈넛, 제발.”

―찍. (싫다.)

“한 바퀴만. 응?”

―찌찍. (너나 해라.)

귀찮다니까. 먹은 건 한숨 거하게 때리고 나면 다 소화되기 마련이라고. 통통한 햄스터도 귀여워할 거잖아? 그냥 받아들여.

‘그나저나, 벨리알은 어째야 하나.’

둘이 그렇게 날 세운 뒤로 벨리알은 서재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햄스터 신분으로 알아낼 수 있는 게 전혀 없다는 뜻이다.

어디서 지내는지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하인 신분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다. ‘불러오기’ 할 수 있는 시간이 한 시간이 아니라 열 시간이어도 소용이 없다.

‘……샹들리에 사건을 막으려면 연회에 참석하지 못하게 해야 하는데.’

아, 이걸 어떻게 처리하냐.

벌써 머리가 아팠다. 햄스터에게 너무 어려운 시련 아닙니까, 시스템 씨. 초심자 모드로 난이도 조절 좀 해 주세요.

[_(:3」∠)_ ]

그래, 너도 드러누웠냐. 나도 드러누웠다.

나는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카일의 재롱을 구경해 주다가 노곤노곤하게 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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