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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공의 햄스터-12화 (12/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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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싸움. 그러니까, 원작의 흐름을 바꾼 덕인지 기적 수치는 8퍼센트로 올랐다.

기절 연기 한 번에 이 정도면 비싸게 먹힌 셈이다. 비록 내일 오후, 수도에서 왔다던 수의사가 카일의 서재로 오게 되었지만.

‘마수가 귀엽네요, 전하…….’

아무래도 어제, 마수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는 의사가 그렇게만 말하고는 가만히 서 있었던 게 문제였던 듯하다.

하지만 당연하다. 사람만 진찰하는 의사가 설치류를 무슨 수로 알겠어. 이 세계에 수의사가 있는 게 더 신기하다.

‘굴러떨어지는 연기가 너무 진짜 같았나?’

이러다 내가 재채기 한 번만 해도 블레이크 성에 난리가 나는 게 아닌지 모르겠다. 북부의 미래가 어둡다…….

카일은 웬만하면 내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은 듯했지만,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성을 돌아볼 수밖에 없는 듯했다. 아무래도 한 영지를 책임진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 그래도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하는 걸 보니, 꽤 괜찮은 영주인 모양이다.

결국, 그는 오후 느지막하게 만찬 준비를 확인할 겸 서재를 나섰다. 오늘은 제법 기특해 보이기에 뽀뽀 다섯 번까지는 봐줬다.

덕분에 나도 자유시간이다. 그가 서재에서 멀어진 것을 확인하자마자 재빨리 불러오기를 발동해 사람이 되었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

“그러니까…… 네 이름이 ‘슈’라고?”

망했다.

이젠 망했다고 말하기도 지치지만, 아무튼 망했다.

메이드복을 대충 걸친 나는 그나마 눈에 익은 길을 따라 세탁물 보관실을 더 찾아냈고, 가까스로 기사들이 입는 사복을 발견했다.

비록 사이즈는 맞지 않았지만, 제법 멀끔한 셔츠와 바지는 물론이고 운 좋게 가죽 부츠까지 손에 넣었다.

덕분에 조금 의기양양해진 나는 오늘 팔자가 꽤 괜찮다고 여기고 있었다. 복도에서 센을 딱 마주치기 전까지는 그랬다.

“뭐…… 그렇지, 대충…….”

내가 심드렁하게 말하자 센이 인상을 찡그렸다.

“이름에 대충이 어디 있어?”

어디 있긴, 여기 있지. 그럼 너는 인간 이름이 ‘캐슈넛’이라고 하면 믿겠냐.

딱히 하고 싶은 다른 이름도 없고, 그렇다고 이 세계에 어울리지도 않는 본명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하여 재빨리 생각해 낸 이름이라는 게 겨우 ‘슈’였다. 캐슈넛에서 한 글자만 뚝 뗀 꼴이다. 썩 성의 있는 이름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대공 전하가 지어 준 거라고. 얼마나 고심해서 지었겠냐.

그리고 눈치 빠른 센은 내가 입은 옷이 남의 옷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다. 몸집에 도무지 맞지도 않을 만큼 큰 셔츠에 수상하게 두리번거리는 모습 때문이었단다.

“옷은 왜 훔친 거야? 혹시, 네가 소문의 그 반려 변…….”

“아니거든!?”

물론 내가 맞긴 한데, 어쨌든 아니다.

반려 변태라니? 그냥 반려도 아니고 변태는 더더욱 아니다. 내가 버럭 외치자 센은 “아니면 아닌 거지, 왜 소리를 지른담.” 하며 투덜거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영리한 만큼 융통성도 있었다. 나를 고발하는 대신, 사정을 한번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한 듯했다.

덕분에 나는 즉석에서 염도 높은 개인사를 지어내느라 죽을 맛이었다. 가족들은 내가 어렸을 적 마수에게 당했고, 옷이 너무 낡아서 입을 게 없었으며, 이름이라고 부를 것도 없어서 내가 적당히 지었다고 더듬더듬 이어 말했다.

……생각해 보니 사실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내가 어렸을 때 가족들이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도 했고, 옷 한 벌 사 입기 어려울 만큼 가난해 본 적도 있었으니까.

“축제 기간에 인근 난민들이 영지나 성에 들어오는 건 흔한 일이야. 전하께서도 이 기간에는 일부러 식량을 넉넉히 준비하시기도 해. 더러는 너처럼 고아들이 오기도 하고.”

센은 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도 가족을 잃고 북부까지 왔던 입장이라, 남 일 같지가 않네.”

그녀는 아무래도 내가 가여워진 모양이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사라졌던 센은 곧 어디선가 옷 한 벌을 가져와서 내게 내밀었다. 하인들이 입는 사복이라는데 수수하면서도 깨끗했다. 내 체구에도 딱 맞아서 움직이기도 편했다.

덕분에 꼴이 한결 나아졌다. 훔친 옷은 센에게 순순히 돌려주었다.

“슈, 요즘 성안에 일손이 부족해서 심부름꾼을 좀 더 뽑는 것 같던데. 너도 지원해 보는 건 어때? 성에서 묵을 수 있으니까, 이렇게 옷을 훔치지 않아도 돼.”

“안 훔친다니까. 이제 안 훔쳐. 나도 낯짝이라는 게 있거든.”

여기까지 와서 구직이라니. 먹고살기 힘들다. 북부대공의 햄스터일 때는 모든 게 무료였건만. 물론, 인권을 판 값이기는 했다.

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면접 보겠지?”

“당연하지. 누군 줄 알고 뽑겠어? 그리고 성안에서 일하는 건 생각보다 인기가 많아.”

“그런가. 몇 차까지?”

내 질문에 센이 멍하니 되물었다.

“응? 몇 차라니?”

“아니다…….”

하긴, 여기가 게임 회사도 아니고. 적당히 수배 목록에만 없으면 알아서 잘 뽑겠지.

이후, 나는 센의 곁에 붙어 다니며 본격적으로 블레이크 성의 지리를 외웠다. 눈으로는 길을 익히는 동시에 귀로는 소문을 듣고, 겸사겸사 안 쓰는 방이나 하인들만 오가는 통로도 머릿속에 차곡차곡 새겨 넣었다.

덕분에 옷을 숨기기 좋아 보이는 장소도 발견했다. 빙의한 이래로 가장 알찬 30분이었다.

“슬슬 전하께 서류 내러 가도 되겠지? 축제 끝나고 나서 영지 순찰을 강화하신대서, 시간표를 짰는데 말이야.”

“아, 그거. 아까 서재로 가신다고 했으니 지금쯤 거의 도착하셨겠군. 천천히 가도 되겠어.”

잠깐, 뭐라고? 전하가 서재로 가? 벌써?

나는 그 자리에 우뚝 굳었다.

망한 지 30분도 안 된 것 같은데 또 망했다. 이렇게 되면 내 인생에서 망하지 않은 순간을 세는 게 더 빠를 거다.

“슈, 동탑은 다 알려 줬으니까, 이제 중앙 연회장 꾸민 거 구경…… 어? 어디 가? 슈!”

“미안! 나 급하게 갈 데가 생각나서! 연회장 구경은 다음에 할게!”

지금 연회장 구경이 문제냐. 블레이크 성이 발칵 뒤집히기 3초 전이다!

나는 재빨리 쓰지 않는 창고에 옷을 쑤셔 넣고는 ‘불러오기’를 해제했다. 곧장 돌아가서 아무 일도 없던 척을 해야 하는데…….

새하얀 빛이 몸을 감싸는 그 찰나, 문득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이 스킬을 아무 생각 없이 해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본능적인 직감이었다.

‘야, 시스템. 햄스터 집 안에서도 위치를 지정할 수 있어?’

[가능합니다!]

‘그럼…… 최대한 눈에 안 띄는 곳으로. 그, 어디냐. 내가 좀 푹신하게 자려고 톱밥 많이 쌓아 둔 곳 있거든? 거기가 좋겠다. 1층 구석으로.’

하얗게 바랬던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연갈색으로 빼곡하게 뒤덮인 것을 보니, 주문대로 잘 도착한 모양…….

그때, 누군가 내 몸을 덥석 쥐었다.

―찍! (뭐야!)

“캐슈넛.”

평소보다도 몇 배는 낮은 목소리였다. 벨리알과 대거리할 때도 이 정도로 싸늘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카일의 시선이 내 전신에 내려앉았다. 반사적으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저기, 잠깐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우리 말로 합시다, 말로. 물론, 내 말은 네가 못 알아듣겠지만.

‘……눈이 조금 맛이 간 것 같은데.’

아니, 조금이 아니라 많이 간 것 같은데.

“네가 사라진 줄 알았다.”

사라지긴 했지. 그러게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냐고.

나는 눈을 굴려 그의 손을 힐끗 바라보았다. 무심결에라도 손에 힘을 주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지 손목과 손등의 힘줄이 시퍼렇게 두드러져 있었다.

손 곳곳에 톱밥이 군데군데 묻은 것을 보니, 숨집이나 장난감을 다 뒤져 보고도 내가 보이지 않자 바닥을 짚어 가며 뒤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두근, 두근. 꽤 빠른 듯한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타고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고작 마수 한 마리인데 뭘 그렇게 긴장해. 누가 보면 이 조그만 생명체를 네 목숨처럼 사랑하는 줄 알겠다.

“캐슈넛. 부디 나를 너무 놀라게는 하지 말아다오.”

깊은 한숨이 들렸다.

카일은 복잡한 시선으로 나를 보다가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일순 손을 떨 만큼이나 동요했으나, 내 털을 쓸어 넘기는 손길은 다정하기 짝이 없었다.

“너 하나에 매달리는 내가 우스워 보일까. 영지 사람들도 벨리알처럼 생각할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나는, 적어도 너를 거둔 순간부터 널 사랑할 각오 또한 마쳤다. 곁에 들이기로 마음먹었으니 온 힘을 다해 아끼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느냐.”

감동적인 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네.

손아귀를 빠져나오려고 몸을 비틀던 내 움직임이 우뚝 멎었다.

‘걱정했으려나.’

하긴, 걱정하긴 했겠다. 며칠 전만 해도 씻고 나오는 사이에 갑자기 사라졌으니까. 나야 인간으로 변해서 성을 둘러봤다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그에게는 날벼락 같은 소식이었겠지.

새삼 미안해진다. 그렇다고 안 나갈 수도 없고……. 조금만 적응하고 나면 네가 잠들었을 때 나가든지 하마. 그래, 요령껏 살자.

카일은 내 이마에 짧게 입술을 대더니 다정하게 말했다.

“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마수로 만들어 주고 싶구나.”

기특한 발언이다. 햄스터 팔자 상팔자네. 자고로 주인이 다정해야 먹고사는 게 편하다.

“그리고 혹여라도 너를 훔쳐 간다면, 그놈은 사지가 한 곳에 묻히는 사치를 누리지 못할 것이다.”

다정하다고 했던 말 취소다. 주인이 맛이 좀 가셨다. 햄스터 상대로 집착하지 말라고.

“내일 오후에는 수의사가 널 진찰할 거란다, 캐슈넛. 아무래도 기절했던 것이 마음이 쓰이는구나. 너무 마른 것 같기도 하고……. 내일 아침은 특식을 많이 주마. 센이 소고기 간식을 사 왔다.”

와. 소고기. 집착해도 조금은 봐줄까. 한우…… 아, 여긴 한우가 없지. 북부 소고기로 줘라.

그나저나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배 터지게 먹고 있는데 말랐다고? 한 손에 쥘 수 있다고 다 마른 게 아닐 텐데.

본래의 나는 대식가였다. 많이 먹는 데 비해 잘 찌는 편은 아니어서 마음 놓고 먹곤 했다. 그 습관 때문에 여기서도 손에 잡히면 일단 입에 넣고 봤다.

‘햄스터 체질도 인간 체질대로인가?’

당연히 모른다. 햄스터로 살아 본 적이 없으니까. 햄스터 평균 체중 아시는 분?

“그래도 귀여우니 괜찮다.”

아무래도 카일에게는 내가 바로 우주의 평균이자 표본, 그리고 정의인 듯했다.

‘햄스터 오타쿠…….’

아니, 솔직히 조금 기뻤으니까 오늘은 다정한 주인이라고 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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