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11화 (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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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온몸이 쑤시네.’

팔자에도 없는 운동을 대체 며칠째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것만으로도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러도 모자란데, 밤새 이어진 밀웜과의 불편한 동거 덕에 미끄럼틀 사이에 끼어서 잠을 청하기까지 했다.

아니, 근데 인간적으로 머리맡에 벌레를 두고 어떻게 자냐. 나는 못 해. 난 벌레가 싫어서 귀농도 못 하는 쫄보형 도시 인간이란 말이다.

이렇게는 못 살겠다. 억울하고 서러워서 이것만큼은 안 되겠다. 가출할 거다. 집 나갈 거라고!

“오늘은 다른 특식을 준비해 봤다, 캐슈넛.”

그렇게 결심하기 무섭게 서재로 들어온 카일이 집구석에 있던 벌레를 모두 수거해갔다.

“센이 말하기를, 생식이 취향이 아닐 수도 있다더구나. 내 불찰이다.”

―찍. (그래. 네 불찰이다.)

“오늘 아침엔 황태를 먹어 보고, 저녁에는 소고기로 준비해 오라 했다. 마침 축제 기간이라 고기가 넉넉하더구나. 내일은 닭고기를 챙겨 줄까?”

‘……가출은 좀 더 생각해 볼까?’

그래, 정성도 갸륵하고. 어쨌든 챙겨 주려고 이리저리 노력하잖아.

내가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와서 그를 올려다보자 카일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는 얼른 말린 황태 조각을 내 손에 쥐여 주더니, 내가 엎어 버린 물그릇을 가져가 깨끗한 물을 받아 주었다.

나는 갉작거리면서 황태를 먹어 치웠다. 동물 주겠다고 간을 안 한 모양인데, 좀 싱겁긴 해도 먹을 만했다. 솔직히 어제까지 밥그릇을 떡하니 차지했던 그 흉물스러운 것들을 생각하자면 이 정도는 선녀였다.

‘진작 이럴 것이지.’

그걸 억지로 먹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면……. 아이고, 내 팔자야.

나는 목이 메어서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두드렸다. 그러자 카일이 재빨리 내 옆에 물그릇을 놔 주었다.

“최근 성 분위기가 좀 뒤숭숭하구나. 어차피 너는 이곳에서만 지낼 테니 조심할 것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그 반려 변태가 서재에 들이닥치기라도 하면 안 되니…….”

―찌힉!

물 먹다가 헛디뎌서 그대로 접싯물에 코 박을 뻔했다.

‘……무슨 뭐? 반, 반려 변태?’

그거 내 얘기냐? 아니, 어떤 넋 나간 놈이 그런 호칭을 만들어서 붙였어?

“서재 앞에 경비병을 배치해 두었으니 너는 전혀 걱정할 것이 없다, 캐슈넛.”

그럼요. 걱정할 것 없죠. 그 반려 변태가 저니까요…….

내가 고개를 까딱까딱하자 카일은 귀여워 죽겠다는 얼굴로 나를 들어 올리더니 뽀뽀를 마구 남발하기 시작했다.

야, 하지 마! 너는 무슨 뽀뽀를 끼니보다 더 자주 챙기냐. 네 부하들이 너 이러고 다니는 거 알아? 어?

북방의 패자라며. 피도 눈물도 없는 마인하르트 최강의 검사라며. 불모지를 일궈 낸 대륙 최고의 대공작이라며. 이 망할 햄스터 오타쿠야!

“전하.”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카일은 그야말로 빛과 같은 속도로 나를 집 안에 내려놓은 뒤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양, 그가 근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들어와라.”

뭐야, 같은 사람 맞아?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된다. 사기라도 당한 사람처럼 쳐다보는 내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그가 기사에게서 보고를 받았다.

2황자,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가 영지에 곧 도착한다는 내용이었다.

환영 행렬이며 장식물 위치, 식사 장소로 안내할 곳까지의 동선이며 메뉴까지 보고하는 게 유난스럽다 싶을 정도로 꼼꼼했다.

내용만 들어서는 무슨 비리 감사라도 나온 줄 알겠다. 표정까지 심각한 게 딱 그랬다.

‘황실과 사이가 안 좋다는 거야 알고 있었고, 불러오기 때 듣기까지 했지만…… 도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이렇게까지 심각한 거지?’

표정만 보면 그대로 마수 토벌에 나선다고 해도 믿겠다.

“지금 출발해야겠군.”

카일이 나를 힐끗 돌아보았다. 미련이 철철 넘치는 눈길이었다.

저 다정한 성격을 어떻게 숨기고 살았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내게만 다정한 거라던가. 동물에게만 다정한 사람이라, 나쁠 건 없지만…….

“다녀오마, 캐슈넛.”

나는 대답 대신 손을 내밀었다. 황태 하나 더 주고 가라.

“많이 먹으면 몸에 안 좋아.”

그가 속삭였다.

‘……그래…….’

나는 벌러덩 드러누워서 먹고 싶은 음식을 마음껏 상상하기로 했다.

패티 세 장짜리 햄버거, 훠궈에 새우 완자, 얼굴보다 큰 티본 스테이크, 상추 위에 오겹살 두 점. 가을에는 전어회, 겨울에는 대방어회, 봄에는…….

‘두고 봐라.’

인간으로 돌아가고 나면, 사흘 밤낮 동안 고기만 먹어 줄 테니까.

*

남은 황태 조각까지 해치운 후 누워서 뒹굴뒹굴하다 보니, 문득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카일이 왜 황족들과 사이가 나빴더라? 적자는 아니지만, 어쨌든 그도 현 황제의 아들인데.’

하긴, 눈물 없이 듣지 못할 사연이 있으니까 황자 소리 듣고 사는 게 아니라 이 차디찬 땅에서 대공작 노릇을 하는 거겠지.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원작에서 썩 비중 있는 인물이 아니다. 게다가 빠르게 죽기까지 했으니, 그의 과거 사연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을 리가 없다.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일까? 그걸 들어준다면, 미래를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카일이 바라는 단 하나의 소원은 복수입니다.]

‘너도 복수가 소원이시냐…….’

여기저기 복수 꿈나무들만 가득하시다.

그가 황실에 반발하게 된 건 역시 출신 때문이겠지. 친모가 황실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도 못하고, 끝내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카일과 벨리알이 처음부터 불구대천의 원수였던 건 아니다. 벨리알이 카일의 심기를 툭툭 건드린 건 이전에도 몇 차례 있었겠지만, 카일은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뎠다.

북부는 누가 굳이 나서서 짓밟으려 하지 않아도 위태로웠고, 그의 터전을 위해서라면 변수를 최대한 줄이는 게 좋았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카일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벨리알의 도발은 성공했다. 정확히는 그가 북부를 압박할 만한 핑계를 찾아낸 것이다.

때마침 시스템이 원작에서 해당 사건이 일어났던 부분을 띄워 주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축제를 빙자하여 역모를 꾸몄다. 축제 마지막 날 연회에서 2황자,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에게 샹들리에가 떨어진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이에 클라인 공작 가문은 카일을 황실의 적으로 간주하며, 블레이크 영지에 관련된 모든 이와 대적할 것을 선언한다.”]

‘이거다. 샹들리에 사건!’

축제의 마지막 날, 벨리알에게 일어난 사건으로 그의 가문은 블레이크 영지와 적대할 것을 공표했다.

그리고 이때 원작대로였다면 벨리알의 하녀였던 세레나, 지금은 센이라고 불리는 그녀와 처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아마 센이 벨리알을 치료해 주다가 마음이 통했다던가?

벨리알과 그의 외가인 클라인 공작 가문이 힘을 합쳐 적대한다면 북부는 지금보다 더 철저히 고립된다. 그게 카일의 죽음을 앞당기는 큰 원인이기도 했을 거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막아야 한다.

‘마지막 날 연회니까…….’

막는 방법이야 간단하다. 뭐가 됐든 벨리알이 마지막 날의 대연회에 참석만 못 하면 되지.

‘어떻게 해야 하나…….’

일단 벨리알을 직접 만나 봐야겠지? 어떤 사람인지도 파악해야 하니까. 어떤 식으로 설득할지 생각해 보기도 해야겠다. 정 안 되면, 뭐. 약점이라도 잡아 보자고.

그런 생각을 하며 앞발 사이에 낀 톱밥을 대충 떼어 낼 때였다.

“왜 문가에 병사들을 세워 두는 겁니까?”

서재 바깥에서 낯선 목소리가 울렸다.

미성에 가까운 부드럽고 점잖은 음성이었다. 곧 달칵, 문이 열리고 카일이 손님을 안으로 들이며 대답했다.

“사소한 일이 있어서 경비를 강화하라 일렀습니다.”

사무적인 말투 안에는 신경 끄라는 속뜻이 숨어 있었다. 카일을 따라 들어오던 남자가 낮게 웃었다.

“대공작의 공간에도 예상치 못한 변고가 생기기도 하나 봅니다.”

네 방 하나 관리 못 하냐는 뜻인가. 카일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잠시간 어렸다가 사라졌다.

나는 두 사람을 보기 위해 숨집에서 나와 맨 위층의 쳇바퀴 옆까지 올라갔다. 그러자 카일의 건너편에 앉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벨리알 세레나 마인하르트.]

예상대로 벨리알이었다.

벌꿀처럼 반짝이는 금빛 머리카락과 화사한 녹색 눈동자, 생기 넘치면서도 다정해 보이는 외모, 순한 양처럼 아래로 내려간 눈매와 습관적으로 떠오른 정중한 미소…….

동화 속 왕자를 형상화한다면 딱 저런 모습이지 싶다. 물론, 진짜 왕자긴 하지만.

“그보다, 서재에서 이상한 짐승을 키우신다고 들었습니다.”

이상한 짐승이라면 날 말하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면서 가지고 올라온 호두를 씹으며 듣고 있는데, 카일의 눈썹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야, 야. 반응하지 마.

“가장 추운 동쪽 숲에서만 서식하는 마수 새끼입니다. 황자께서 신경 쓰실 일은 아닙니다.”

“듣기로는 저 마수 새끼가 다 자라면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이 있더군요. 그런 짐승을 기르신다니, 대공의 담력이 참 대단하십니다.”

벨리알이 눈매를 접으며 웃었다. 카일은 시종일관 무표정으로 그를 응시했다.

보이지 않는 스파크가 튀는 것 같다. 축제가 코앞인데 왜 괜히 힘 빼고 그러냐. 사이좋게 지내, 사이좋게.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던가.”

……저 둘이 사이좋게 지내는 건 아무래도 안 되겠다.

“한번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벨리알 황자.”

“아니라는 말부터 하셔야 하지 않습니까, 대공.”

명백한 도발이었다. 그것도 카일이 마수를 길러 반역을 일으키려 하는 게 아니냐는 식의 질 나쁜 내용이었다.

근데, 내 꼴을 보면 너도 그런 말이 안 나오지 않겠냐. 어느 세월에 커서 황성을 공격해? 손바닥 반 크기밖에 안 되는데. 가당치도 않은 말이라 화도 안 난다.

그러나 카일은 사정이 다른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차가운 공기가 더 뻣뻣하게 얼어붙었다. 나는 앞발로 팔을 마구 문지르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야, 잠시만.’

설마, 검 뽑는 거 아니지? 참을 인 세 번이면 살인을 면한댔다. 참아라, 참아.

“한 대 치겠어, 카일. 천박하기는 제 어미와 꼭 닮았군.”

카일의 손이 기어이 검으로 향했다.

야! 죽이면 안 돼! 물론, 어머니를 욕하다니 나도 죽어도 싼 놈이라 생각하긴 하는데! 그래도!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심호흡을 하고 아래로 떼굴떼굴 굴렀다. 동그란 몸이 미끄럼틀로 미끄러지면서 통, 통, 툭― 하는 소리가 났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다 내 쪽으로 향했다. ……기절한 척. 기절한 척.

“……캐슈넛?”

놀란 카일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내가 아무 반응도 않자, 그가 문밖의 경비병을 향해 외쳤다.

“황자를 숙소로 안내해라. 그리고 의사를 불러와.”

그가 다급하게 내게로 다가왔다. 이어 끼익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열고, 누군가가 서재 안으로 들어섰다.

내 간식 샘플을 가지고 들어오던 센이었다.

“……전하?”

“센. 황자를 숙소로 안내해라.”

카일이 햄스터 집 안에서 나를 꺼내며 말했다. 센은 잠시 상황을 살피는 듯하더니 곧 고개를 끄덕이고 벨리알과 함께 문을 나섰다.

소란스러웠던 서재는 금세 조용해졌다. 카일이 나를 걱정스럽게 들여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제 괜찮겠지.’

역사에 남을 명연기였다.

[・᷄︵・᷅]

왜. 뭐가. 속아 넘어간 거 봐라. 이게 명연기가 아니면 뭐야?

나는 막 깨어난 척 몸을 꿈질거렸다. 그랬더니 카일이 얼굴을 가까이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괜찮냐고, 다정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역시, 녀석은 무심한 척하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보기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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