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북부 축제의 첫날이 밝았다.
사방이 영 소란스럽다. 이른 아침부터 깬 나는 삐쭉삐쭉한 털은 고르지도 않고 톱밥 위에 풀썩 앉았다.
마음 같아선 더 자고 싶지만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우선, ‘불러오기’의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리려면 기적 수치를 더 올려야 했다.
남은 수치를 어떻게 다 채울지 막막하기는 하나, 적어도 밀웜과 귀뚜라미가 창궐하는 이 망할 집구석에서 채울 수 없다는 건 잘 알겠다.
그래. 나가자.
나가서 성의 분위기도 파악하고, 이 시기에 <겨울의 심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도 확인하고, 가능하다면 그 사건을 살짝 틀어서 기적 수치를 올리는 것도 좋겠다.
기회는 하루에 딱 30분. 부디 알차게 써야 하는데…….
[‘불러오기’를 사용할까요? (。❛ᴗ❛。)]
‘아니!’
아니지! 지금은 안 되지! 옷이 없잖아!
하지만 지금만큼 외출하기 좋은 시기가 없다. 카일이 축제 때문에 성을 둘러보러 나간 게 고작 10분 전이다. 간단히 성만 돌아본다 하더라도 한 시간은 족히 걸릴 것이다.
그러니까, 마법사들이 홀랑 집어 간 옷 말고 다른 걸 걸칠 수만 있다면…….
‘아! 그렇지!’
그때, 문득 기가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
어제 센과 다른 하녀들이 대화하던 그 뒤로 보이던 공간. 분명히 빨래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그 말인즉 먹고 자는 하인들이 입는 옷이 있을 것이다!
거기서 딱 한 벌만 꺼내 입자. 누가 입었던 옷이라는 게 찜찜하긴 하지만, 걸칠 옷 하나 없는 팔자를 생각하면 그 정도는 황송할 정도다.
혹시 모르지. 반질반질하게 잘 세탁된 집사복을 입을 수 있을지도. ……한국인 얼굴에는 안 어울리려나?
나는 나름대로 즐거운 상상을 하며, 기억을 더듬어 떠올린 그 방의 가장 구석 자리로 ‘불러오기’ 했다.
[행운을 빌어요! (ෆ`꒳´ෆ)]
*
그런데, 문제가 또 생겼다.
“진짜 살다 살다…….”
원래 살아 봐야 아는 게 인생이라지만, 이따위 전개로 나갈 거면 미리 보기라도 줘야 하지 않나 싶다.
나는 구석진 돌계단에 다리를 벌리고 앉아 두 팔꿈치로 무릎을 짚었다. 그리고 한없이 우중충한 낯빛으로 내가 입은…… 메이드복을 넋 놓고 쳐다봤다.
“…….”
어제 세탁실에 모여 있던 이들이 전부 하녀였을 때부터 예상했어야 했다.
상상 속의 집사복 같은 건 어디에도 없었다. 셔츠, 조끼, 바지, 구두는 그 어디에도…….
그나마 가장 괜찮은 게 발목까지 오는 검은 치마와 장식 없는 흰 앞치마였고, 일단은 그것이 내가 고를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이며 소리 없이 절규했다. 이 꼴로 어떻게 돌아다니냐고! 메이드복이라니! 난 남자인데!
“벌거벗은 거랑 뭐가 달라!”
[‘불러오기’를 해제해 드릴까요?]
아니, 아니! 그 말이 아니잖아! 다시 생각해 보니까 나쁘지 않네. 어, 옷 좋다. 따뜻하고, 활동성 있고…… 젠장.
“먹고살기 힘드네…….”
차림이 이렇다 보니 하녀들에게 들키지 않는 게 최선이다. 아니, 그냥 다른 사람 눈에 안 보이는 게 최선이다. 투명화 스킬 같은 건 없냐? 정말 미치겠네.
어쨌든 움직여야 했다. 하루에 고작 30분이다. 황금 같은 시간이잖아. 나는 벌떡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얼른 연회가 열렸으면 좋겠다.”
“이번엔 전하께서 무슨 연미복을 입고 나오시려나…….”
“작년보다 사람이 많은 것 같지?”
나는 인부들의 틈바구니에 요령 좋게 섞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었다.
북부 축제는 일 년에 한 번, 그해에 밤이 가장 긴 날로부터 일주일간 진행하는 축제다. 블레이크 영지에서 열리는 가장 성대한 행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칙칙하고 차디찬 블레이크 성에 활기가 돌고, 사람들은 저장고에서 음식을 잔뜩 꺼냈다. 상인들은 마차 가득 물건을 싣고 오기도 했다.
‘축제는 축제구나.’
내 기억 속 마지막 축제는 대학교 축제에서 막걸리 마시다가 이튿날 숙취로 개고생한 것밖에 없는데.
그때, 딱 쓸 만한 정보가 귓가에 내려앉았다.
“올해는 별 탈 없이 지나가야 할 텐데…….”
“내 말이 그 말이야. 왜 이렇게 불안한 건지. 작년에는 친황자파 귀족들이 와서 귀찮게 굴더니, 올해는 아예 황자님께서 직접 납신다지?”
“그 소문이 정말이었어?”
‘황자가 직접 와? 북부에?’
나는 귀를 쫑긋 세우며 그들의 뒤를 살금살금 따라갔다. 물론, 가는 중간중간 바닥을 쓰는 척 빗자루를 움직여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들은 물건을 잔뜩 짊어진 채 연회장으로 들어가더니, 곧이어 중앙 댄스 홀을 중심으로 꽃을 장식하고 탁자를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다니까. 이 땅이 황무지였을 때는 돌봐 달라고 해도 관심 한번 안 주더니.”
“카일 영주님이 오시고 나서 블레이크 상황이 눈에 띄게 좋아졌잖아? 이렇게 해마다 축제도 할 정도니까. 그러니, 그 꼴이 보기 싫어서 딴지를 놓으려는 거지. 그 형제들 사이 안 좋은 거야 이미 유명한 이야기 아니겠어?”
“죽으라고 보냈는데 안 죽으니 그런 거지. 쯧쯧…….”
“보아하니 벨리알 전하가 오시겠네. 선대 세레나 소생이라 카일 전하와 제일 사이가 안 좋잖아. 나이 차이도 거의…….”
오호라. 그렇단 말이지.
‘연회장을 준비하는 이들치고는 알짜배기 정보들만 알고 있잖아?’
나는 낡은 샹들리에를 어떻게 할지 치열하게 고민하는 두 사람의 사이에 살짝 끼어들어서, 어떻게든 한마디라도 더 들어 보려는데…….
“왁! 깜짝이야!”
때마침 샹들리에 고리가 너무 낡아서 헐겁다며 투덜대던 인부가 몸을 돌렸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어우, 목청 좋다. 덕분에 나도 깜짝 놀라서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
“잠깐만. 못 보던 얼굴인데…….”
……아차.
‘불러오기’는 본래의 내 모습으로 실행된다. 생전의 내 데이터를 이 세계로 불러온 것 같은데, 어떻게 그게 가능한지는 시스템이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바람에 캐묻지 못했으나 아무튼 배수현은 순도 100퍼센트 한국인이다.
즉, 이 세계관에 안 맞는 얼굴이라는 거다.
나는 빗자루를 든 채로 몸을 돌렸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어이, 너.”
관절을 움직일 때마다 끼이익, 하는 소리가 날 것 같다.
하긴, 난 연기에 도무지 소질이 없었다. 학예회를 하면 항상 나무나 돌 역할을 했으니까. 물론 내가 하고 싶었던 건 아니고, 어째서인지 다들 그걸 맡겼다.
나를 의심스럽게 쳐다보던 남자가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어깨에 닿기 직전, 나는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벗어났다.
연기고 뭐고 모르겠다. 여기서 잡혔다간 죽도 밥도 안 된다고.
‘야! 시스템! 스킬 몇 분 남았어?’
[앞으로 7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10분도 안 남았네.
여차하면 스킬 해제로 도망치면 된다.
“저, 저 사람, 남자 아냐?”
기분 탓입니다. 기분…… 탓일 리가 없지. 어깨와 키만 봐도 각이 나올 테니까.
‘환장하겠네.’
입을 옷이 메이드복밖에 없었는데 어떡하라고. 엄밀히 따지면 나도 피해자다.
“며칠 전에 어떤 놈이 영주님 서재에서 숨어들어 셔츠도……!”
“호, 혹시 저놈이…….”
“거기! 갈색 머리! 거기 서 봐!”
아, 안 들린다. 안 들려요.
나는 거의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발바닥이 시리다 못해 감각이 없을 정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세탁방에 양말은 있어도 신발은 없더라.
‘찝찝해 죽겠네. 가자마자 손발 씻어야지.’
이번에는 씻은 후, 그냥 두지 말고 물그릇을 엎어 버리든가 해야겠다. 그럼 새 물로 바꿔 주지 않을까.
나는 연회장을 나와 한 층을 올라가고, 왼쪽 복도로 정신없이 도망쳤다. 계단을 올라오면서 빗자루는 내팽개친 지 오래였다.
‘평소에 운동 좀 할걸.’
직장인의 체력을 너무 과대평가했다. 그나마 인부들을 따돌릴 수 있었던 건, 사람 되겠답시고 쳇바퀴라도 타서였다.
쿵.
“……아.”
복도를 돌자마자 누군가와 부딪쳤다. 오늘 정말 재수 끝내준다.
“죄, 송…….”
분명히 내가 더 빨리 걸어 나왔는데, 오히려 내가 비틀거리면서 뒤로 튕겨 나갔다. 상대는 무슨 벽이라도 되는 듯 미동조차 없었다. 어깨 장난 아니네.
“괜찮나?”
목소리가 낮고 진중했다. 그리고, 어딘가 익숙했다.
……그래, 익숙했다.
‘망했다.’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블레이크 대공작.]
안다. 안다고. 확인 사살하지 마라.
나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아직도 7분이 안 지났다. 여기서 스킬 해제하긴 상황이 이상한데. 행운을 빈다며? 분명히 불러올 때 그랬잖아. 정말 빈 거 맞냐? 불운 빈 거 아니지?
[(◐▽◐);;;]
‘젠장.’
누가 봐도 어색한 꼴로 도망치자, 카일이 나를 쫓아오기 시작했다.
묵직한 부츠가 바닥을 두드리며 다가오는 소리가 울렸다. 공포 영화가 따로 없다. 난 아까처럼 뛰다시피 하고 그는 걷고 있을 뿐인데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지고 있었다.
“이봐.”
모릅니다. 저는 절대로 가출한 댁네 햄스터가 아니에요. 그리 되뇌며 슬쩍 뒤를 돌아보았더니 빛을 등진 그의 그림자가 내 발치까지 드리워 있었다.
‘……미친.’
진짜 무섭다. 괜히 북방의 패자가 아니다.
이제 나는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오는 치맛자락이 불편해서 나중에는 손으로 둘둘 말며 뛰어 댔다.
아, 진짜. 신발도 없는데, 이게 뭔 개고생이야?
“서라.”
‘서란다고 서겠냐.’
나는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헉헉거리며 없는 힘까지 짜내 도망쳤다. 내가 멈추지 않자 카일도 심상찮음을 느꼈는지 빠른 걸음으로 따라오기 시작했다.
저 자식, 보폭이 왜 이렇게 커? 키 크면 다야? 사람을 이렇게 비참하게 해도 돼?
자박자박. 탁탁.
맨발이 미친 듯이 뛰는 소리와 구둣발이 바닥을 딛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울렸다. 차갑고 딱딱한 바닥에 뒤꿈치를 혹사당하고 있으려니 울컥울컥 설움이 밀려든다.
야. 그만 따라와! 이쯤이면 포기할 때도 됐잖아.
[앞으로 1분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오늘은 갑자기 사라진 것도 아니고, 불러오기 위치도 잘 저장했겠다. 햄스터 집 안으로 바로 돌아갈 수 있는데…….
어느새 카일은 바로 뒤까지 다가와 있었다. 이대로면 1분이 지나기도 전에 잡힌다.
따돌리겠다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달려왔건만, 이제는 별수 없다. 아래로 내려가서 코너를 돌아 불러오기를 해제하는 수밖에.
복도를 따라 쭉 뛰어가던 나는 방향을 틀어 계단 쪽으로 꺾었다. 그리고 그대로 두 칸씩 계단을 내려가다가―.
“어, 어어……?”
몸이 앞으로 크게 기울었다. 시야가 기우뚱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커다란 손이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 손에 이끌려 몸이 돌려진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심장은 이미 계단 저 아래에 뚝 떨어져 데굴데굴 나뒹굴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몸은 그의 손에 잘 붙들려 있었다.
“너, 누구지?”
그렇게 묻는다고 대답할 수가 없거든요, 제가.
[앞으로 10초 뒤 ‘불러오기’가 해제됩니다.]
‘어차피 시간도 다 됐네.’
진짜 재수라곤 더럽게 없다.
나는 카일의 손에 붙들려 있으나 여전히 기울어진 몸을 바로 하지도 않고 웃었다. 좋은 인상을 심어 주려는 목적은 아니고, 비꼬는 투에 가까웠다.
내가 누구긴 누구야.
“네 반려―.”
그때, 10초가 지났는지 내 몸에서 하얀빛이 뿜어져 나왔다. 섬광탄처럼 눈앞을 희게 만드는 빛 앞에서 카일이 눈가를 찌푸렸다.
그리고 그 빛에 휩싸인 나는.
―찍. (햄스터다.)
……다시 햄스터로 돌아와 있었다.
―…….
나는 익숙한 톱밥과 투명한 막, 그리고 고요한 서재를 보며 머리를 감쌌다.
야! 돌아오려면 말을 다 끝냈을 때 돌아와야 할 거 아니야! 반려까지 말한 뒤에 돌려놓으면 어쩌냐고!
나는 울분을 토하며 바닥에 엎드렸다. 옷 도둑과 여장 남자에 이어 이제는 결혼도 안 한 대공에게 대뜸 반려라고 고백한 변태가 되어 버렸다.
―찍! (아!)
나는 계속 햄스터인 편이 더 나은 것 같다. 응. 그래. 그냥 이대로 살까? 하는 생각은 밥그릇을 한가득 차지한 밀웜을 발견하고 싹 가셨다.
*
섬광이 천천히 거두어지고, 카일은 두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 빛을 정면으로 맞았기 때문인지 아직 시야가 흐렸지만, 다행히 물체를 식별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문제는 그의 손에 들린 옷이었다. 카일은 방금까지 제 손에 잡혀 있던 이름도 모를 이를 떠올렸다.
이 땅에서는 보지 못했던 이국적인 얼굴과 가늘게 흩어지던 갈색 머리칼. 그리고 남자치고는 한 손으로도 지탱되던 가벼운 무게.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지고 남은 것이라곤 그가 입고 있던 메이드복뿐이라니.
“……마법사인가.”
하지만 그렇다고 하기에 사내는 아무런 주문도 외우지 않았다. 오히려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내뱉은 말은 제 ‘반려’라는 이상한 말이었다.
무엇보다 분명 처음 보는 사람인데, 어딘가 익숙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는 사람 중 여장에 취미가 있는 사람은 없는데도.
카일은 눈썹을 치켜올렸다가 옷을 제대로 챙겨 들었다. 반려라는 소리까지 들은 마당에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성정은 못 되었다.
‘찾아야지.’
터무니없는 헛소리라 하더라도, 그 남자를 다시 찾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