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9화 (9/129)

9

인생은 털림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목숨이 털리고, 어떻게든 살아났다 했더니 인권이 털리고, 쳇바퀴가 털리고. 이제는 하다 하다 털릴 게 없어서 숨겨 놨던 셔츠 한 장마저 털렸다.

내 인생에 강도가 들었나. 야무지게도 털어 가네.

분명히 잘 숨겨 뒀고, 혹시나 길이라도 잃을세라 센의 손 위에서 몇 번이고 길을 확인했다. ‘불러오기’ 할 수 있는 위치니까 저장해 주겠다는 시스템 놈의 말만 철석같이 믿었는데…….

[(・_・= ・_・)]

그래, 안다. 네 탓 아니라는 거. 너도 뭐, 내가 홀딱 벗길 바라서 햄스터로 빙의시킨 건 아니잖냐.

그리고 내 옷을 털어 간 놈들은 다름 아닌 마법사였다. 카일의 요청으로 나를 수색하던 그들은 마력의 흐름을 좇아 움직였는데, 미세하게나마 마법의 흔적이 남은 곳에서 내가 숨겨 둔 옷을 찾았다고 했다.

아무래도 시스템이 준 스킬이 이 세계에서는 일종의 마법으로 통하는 것 같은데, ‘불러오기’가 해제되면서 내가 입고 있던 옷에 그 잔재가 남은 모양이었다.

물론, 시스템의 존재를 꿈에도 떠올리지 못할 사람들은 대공작의 침실에 정신 나간 옷 도둑이 들었다고만 믿는 듯하지만…….

“네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카일이 나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다 이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가 넋두리하듯이 이어 말했다.

“그래. 세상 얌전하고 천사처럼 착한 네가 이유도 없이 나갔을 리가 없지. 웬 놈이 너를 훔치려고 했느냐? 아니면, 정신 나간 도둑놈이 물건을 훔치길래 영특하고 총명한 네가 되찾으러…….”

―찍. (뭔 소리냐.)

나 말할 줄 안다, 이놈아. 게다가 그 정신 나간 도둑놈이 바로 나다.

게다가 문장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자연스러운 주접은 다 뭐냐. 햄스터 한 마리에 이런 황송한 수식어가 다발로 붙어도 되는 거야?

“역시, 처음에 만난 그 도둑놈들이……!”

아니, 아니. 진정하고 앉으세요. 애먼 놈들 찾아가서 두들겨 패 봤자, 나오는 건 비명뿐이거든요?

어쨌든 내 인생이 지독하게도 나아지질 않는다. 나는 당장 오늘 몫의 ‘불러오기’에도 알몸 옵션이다. 생각하니 새삼 밥맛, 아니, 호두 맛 떨어지네.

나는 갉아먹고 있던 호두를 있는 힘껏 패대기쳤다. 툭. 호두가 미끄럼틀을 타고 데굴데굴 굴러 톱밥 사이에 처박혔다.

“캐슈넛?”

금방이라도 감옥으로 뛰어가서 어제 방에 쳐들어왔던 머저리 세 명을 거꾸로 매달아 둘 기세였던 카일이 내게 얼른 다가왔다.

그는 재빨리 나를 손바닥 위에 올리더니 이마를 쓱쓱 쓰다듬었다.

“입맛이 없느냐. 아니면, 호두가 취향에 안 맞나? 마카다미아로 바꿔 주랴?”

카일은 나를 받쳐 들지 않는 손으로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마카다미아를 꺼내 내 발에 꼬옥 쥐여 주었다.

나는 그걸 받아 예의상 몇 입 갉아 먹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마치 금광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환하게 웃다가도, 또다시 입맛이 사라진 내가 발로 뻥 차 버리자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짊어진 표정으로 나를 간절하게 바라보았다.

“어디가 아픈가. 왜 입맛이 없지?”

야. 너 같으면 이 상황에 밥맛이 있겠냐? 인간이 되고 싶다고 했지, 발가벗고 돌아다니고 싶다고 한 적은 없다고. 내가 아담도 아니고.

“어떻게 해야 널 행복하게 할 수 있을까. 그 방법만 안다면, 나는 그걸 위해 무엇도 아끼지 않을 텐데.”

크, 저 헌신적인 대사. 다정한 목소리.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길까지 합치면 아주 삼위일체다. 내가 손바닥보다도 작은 쥐가 아니었다면 지금보다 백배는 더 낭만적이었을 거다.

그래도, 뭐. 지금 이 팔자도 생각보다 나쁘지만은 않다.

그렇게 얼음장 같다던 블레이크 대공작이 사르르 녹는 손길로 나를 쓰다듬는 것도, 따뜻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연신 불러 주는 것도 꽤 마음에 들었다. 이렇게 이유 없이 쏟아지는 애정을 받아 보는 게 얼마만의 일인지.

생각보다 더 태평한 나와 달리, 그는 퍽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너를 잃고 싶지는 않건만…….”

한숨을 푹푹 내쉬는 카일을 뒤로하고, 나는 그의 손바닥에서 몸을 둥글넓적하게 말며 책상 위의 책을 힐끔 살폈다.

<마수 마석학>.

‘저런 건 또 언제 구해 왔대.’

아무래도 어제 마법사들이 내게서 마력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 게 그에게는 큰 의미로 와닿았던 모양이었다.

[마수는 성장 과정에서 심장에 마석이 자라나며, 때로는 심장 자체가 마석으로 대체되기도 합니다. 성장이 끝난 마석은 ‘핵’이라고 불리며, 핵이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마수는 오래 살아남지 못합니다. 그 정도가 심각한 경우, 성장기 때 폐사하기도 합니다.]

‘폐사? 그 정도로 중요해?’

[X_X]

‘……그런 거였어?’

물론, 나는 평범한 햄스터…… 아니, 조금 특이한 인간일 뿐이라 마석 형성이 안 되는 게 정상이지만, 나를 마수로 여기는 그에게 이 일은 생각보다 심각할 수밖에 없는 게 당연했다.

“걱정하지 말아라. 성장기가 끝나기 전까지 마력을 주기적으로 주입하며 야생화 훈련을 병행하면 뒤늦게라도 생길 수 있다더구나.”

무슨 소리예요. 안 생겨요. 이상한 거 집어넣지 마세요. 부작용 생긴다고요.

“최선을 다하마. 지금 야생으로 돌려보내기는 늦었고…….”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해? 스물세 시간 삼십 분 동안 쥐똥만 한 몸뚱이로 벌판을 나다니다가는 다른 마수들의 간식거리로 삶을 마감하게 될 거라고.

“참 신기한 일이로구나. 수천 마리의 마수를 휩쓸며 북부를 제패해 온 내가, 새끼 마수 한 마리에 이렇게 쩔쩔매는 날을 맞이할 줄이야.”

그러게. 덕분에 나도 적응이 안 된다. 어느 북부대공이 이렇게 알뜰살뜰하게 햄스터를 돌보냐.

하지만 그런 녀석의 모습이 썩 싫지만은 않은 걸 보면, 나도 이놈에게 정이라는 게 좀 든 모양이었다.

뭐든지 혼자 해내는 건 지긋지긋하기도 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어떤 이유도 없이 잘해 주는 사람이 나타났는데, 어떻게 마음이 기울어지지 않을 수가 있을까.

“밤새 물도 안 마신 것 같고, 입맛도 없고…… 응?”

카일이 내 코를 톡톡 두드렸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뽀뽀해 대고 싶지만, 기운도 없는 내게 스트레스까지 주고 싶지는 않으니 꾹 참는 모양이었다.

그래. 뽀뽀는 하루에 열 번 이상 하지 마라. 부담스러우니까.

그나저나, 물을 안 마신다는 건 오해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 마신 게 아니라 못 마신 거다. 어제 여기저기 뛰어다닌 탓에 갈증이 났는데…… 햄스터 집에 들어오자마자 무심코 앞발을 물그릇에 넣고 씻어 버렸다.

차마 발 씻은 물에 입을 댈 수는 없잖아. 바닥을 핥아먹는 기분이라고.

강제로 묵비권을 행사하며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고만 있자, 그는 잠시 고민하더니 기사를 불러 센을 데려오게 했다.

“오는 길에 설치류 짐승에게는 견과류 외에 뭘 더 먹이는 게 좋은지 알아 오라고 일러라.”

새로운 식단? 좋지. 현명하신 세레나 님의 탁월한 대답을 기대해 보겠습니다. 말 좀 잘해 주십쇼.

소고기? 아, 꿈이 너무 큰가? 좋다, 돼지고기. 지금이라면 오리고기나 닭고기도 괜찮을지도. 또 뭐가 있지. 양? 염소? 어쩌면 새우나 어패류일지도…… 뭐가 됐든 좋다. 맛있는 걸로 잔뜩 챙겨 줬으면.

내가 아직까지도 쥐똥만큼 작은 게 다 영양실조 때문이라고 생각할 때가 됐다.

그러니까, 단백질.

단백질 내놔라.

*

“밀웜이 좋겠어요, 전하.”

……잠깐! 아니. 아니지!

“아니면, 귀뚜라미? 야생화 훈련을 하려면 좀 시들시들해도 살아 있는 게 더 좋을 거예요. 햄스터에게는 그게 제일 좋다니까, 캐슈넛에게도 비슷하지 않을까요?”

“흠.”

진지하게 듣지 마라, 미친.

센은 진지한 얼굴로 안경을 고쳐 쓰며 식단표 같은 것을 카일에게 내밀었고, 그놈은 마치 세기의 발견이라도 본 듯 감명 깊은 얼굴로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둘이 지금 뭐 하냐?

“견과류만으로는 안 돼요. 과일 같은 것도 챙겨 주시고, 성장기니까 단백질도 적지 않게 챙겨 주시는 게 좋겠습니다.”

“일리가 있군. 네게 권한을 일임할 테니, 최고급으로만 준비해라. 가능하겠나?”

아니, 일리 없다.

이 미친놈들아. 뭔웜? 뭔뚜라미? 싫어! 나는 절대 싫다. 입에도 안 댄다. 먹이면 소리 지르고 기절할 거라고!

“오늘 저녁에 정식으로 축제를 시작하면 정신이 좀 없겠는데…… 지금 다녀와도 될까요? 서두르면 저녁 전까지 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카일은 군말 없이 돈이 가득 든 주머니를 내밀었다.

“아낄 필요 없다. 남은 것은 네 수고비로 하도록.”

센은 한술 더 떠서 대답했다.

“이 돈이 모자라다고 느낄 정도로 전부 구해 오겠습니다, 전하. 북부에서 구하기는 좀 어렵지만, 축제 기간이니 과일도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 그건 됐다. 내가 주방장에게 부탁해 보마.”

……둘이 잘 논다? 차라리 이 꼴 저 꼴 안 보게 나가서 놀다 왔으면 좋겠다.

[기적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7.0%]

원작에선 나락까지 처박혔던 두 사람 사이가 좋아져서인가, 별안간 기적 수치가 올랐다.

그래. 카일이 살아야 내 기적 수치도 사는데, 원작처럼 세레나가 카일을 죽이겠다고 칼 들고 설치면 곤란하다.

뭐가 됐든 좋으니 사이좋게 지내라, 사이좋게.

물론, 밀웜은 사 오지 말고.

*

―찍! (치워!)

발에 바퀴라도 달렸나, 무슨 햄스터 먹이를 이렇게 순식간에 사 와! 최고급으로 사 오겠다며! 그럼 적어도 며칠 정도는 더 걸려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밥그릇에 소복하게 담겨 꾸물거리는 벌레들을 보고 그야말로 펄쩍 뛰었다.

“이거 봐요. 엄청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아요?”

센의 말에 카일의 얼굴이 밝아졌다.

반대다, 이 자식아. 당장 안 치워? 밀웜으로 맞고 싶어? 기대감 가득한 눈길로 보지 말라고!

나는 허겁지겁 도망갔다. 미끄럼틀에 쿡 박혀서 외면하자, 카일이 길쭉한 집게로 귀뚜라미를 집어서 내게 가까이 댔다.

이, 미친! 엉덩이에 대지 마! 그거 살아 있잖아! 아! 좀!

―찌찍! (죽을래!? 안 치워!?)

햄스터 살려!

‘너희…… 진짜 두고 봐라.’

인간으로 돌아가서 반드시 복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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