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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센의 손바닥 위에 올라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카일이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으니, 그녀는 곧장 서재로 향할 것이다. 도망칠 때는 급하게 다니느라 길을 제대로 익히지 못했으니까, 지금이라도 알아 둬야지.
그래야 내일은 방금 그 위치에서 ‘불러오기’를 쓴 뒤, 미리 숨겨 놓은 카일의 옷을 입고 서재와 반대편으로 갈 수 있게 된다.
요지는 반경 10미터만 넘지 않으면 된다는 거다. 물론, 옷은 더 있어야겠지. 진짜 더럽게 춥네. 괜히 북부가 아니다.
“센, 어디 가?”
빨래 바구니를 옮기던 하녀 한 명이 센을 불렀다. 내가 숨어 있던 곳의 뒤는 아무래도 하인들의 옷을 세탁하는 장소인 모양이었다.
“찾았어!”
센이 자랑스럽게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다가도 놓칠세라 양손으로 내 몸을 조심스레 포갰다. 야, 앞 가리지 마라. 안 보이잖아.
“낯을 별로 안 가리나 봐. 착하더라. 오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는데, 꼭 길이라도 익히려는 것 같아서 귀엽기도 하고.”
그 말을 들은 하녀들이 모여들어 부럽다, 귀엽겠다, 나도 키우고 싶다, 따위의 말을 늘어놓으며 부산을 떨었다.
나는 부러 겁먹은 햄스터인 척 센의 손바닥에 코를 쿡 박고 모른 척했다.
‘……너무 티 나게 주변을 둘러봤나?’
자아 있는 쥐로 보이면 피곤해지는데.
“나도 같이 데려가면 안 돼?”
센과 친해 보이는 하녀가 다가와 나를 보며 눈을 빛냈다. 어딜 남의 공에 숟가락을 얹냐, 얹기를. 안 되지. 훠이. 이건 세레나 몫이거든?
―찌익! (꺼져!)
내가 몸에 힘을 주고 센을 뻥뻥 차며 찍찍거리자 그녀가 눈에 띄게 당황했다.
“어? 어머? 왜 이러지?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얌전했는데…….”
―찍! 찌찍! (미련한 인간아! 넌 이 공을 나눠 먹고 싶냐!? 가서 생색이라도 내라고!)
넌 세레나가 될 운명이었다니까? 제국 최고의 여자! 물론, 그 운명을 내가 좀 갉아먹긴 했지만…… 그러니까 가서 카일에게 점수라도 따라고!
그때, 우리의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캐슈넛.”
“대, 대공 전하……!”
귀신 같은 자식. 금방도 찾는다.
카일의 붉은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그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자…… 안 그래도 무시무시한 인상이 더 굉장해졌다. 시선도 공격으로 친다면 이놈은 백전백승이다.
야, 웃어. 잘 찾았잖아. 생채기 하나 안 났다고. 분위기 얼음장 만들지 마라. 하녀들 떠는 게 안쓰럽지도 않냐?
새하얗게 질린 하녀들이 주춤주춤 물러나는 와중, 유일하게 떨지 않은 센이 카일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전하. 명령하신 대로 마수를 찾았습니다.”
카일은 손을 내밀려다가 센의 손 위에 얌전히 앉아 그를 째려보는 나를 보고 멈칫했다.
“……너를 잘 따르는 모양이군.”
“그게…….”
“그대로 내 서재로 오겠나.”
센은 나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내 엄지로 등을 한번 쓸어 준 뒤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하녀들은 눈치만 힐끔거리며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그렇게 서재에 도착한 카일은 나를 햄스터 집에 집어넣으려 했다.
물론, 나는 최대한 센을 붙잡고 버텼다. 오늘은 같이 잔다며! 자유를 줬다 뺏는 게 어디 있냐, 이 치사한 자식아.
애석하게도 카일은 내 발악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정말 좋아하는군.”
“그러게요.”
센이 부끄러우면서도 기쁜지 살짝 웃었다. 그러면서 단호하게 나를 집으로 쑥 넣어 주었다.
“그래도 들어가야지. 함부로 집 밖으로 나오면 못 써. 전하께서 걱정하시잖아.”
아니, 어차피 30분 뒤면 알아서 돌아가진다고요. 산책 좀 한 것뿐이잖아.
“보상하겠다.”
카일이 햄스터 집 천장에 달린 문을 닫으며 말했다. 센이 대답 대신 물끄러미 바라보자, 그가 무뚝뚝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찾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다. 마법사들이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다고 했을 때 직감했지. 하지만 네 덕에 캐슈넛을 찾게 되었으니…….”
“…….”
“원하는 걸 말해라. 블레이크 대공작의 이름을 걸고, 바라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마.”
센의 시선이 쳇바퀴에 삐딱하게 기댄 내게 향했다. 어딘가 복잡해 보이는 눈길이었다.
한 시선에 갈망과 체념을 동시에 가질 수도 있구나.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일순 우울하게 가라앉았다가 이내 꿋꿋하게 다시 일어서는 것이 느껴졌다.
“괜찮습니다.”
센이 똑 부러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전하께서 들어주실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자 해내겠습니다. 그저 제가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만 알아주시고, 나중에 제가 이 성에서 부당한 일을 당하거든 제 손을 들어 주세요, 전하.”
“재밌군.”
카일이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느릿하게 말했다.
“이 영지 내에서 내가 들어줄 수 없는 소원이 있다?”
하녀 소원에 승부욕 불태우지 마라. 나는 더러워진 앞발을 물그릇에 담가 씻으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센의 소원이 뭘까.’
벨리알과 결혼하는 것? 어쨌든 두 사람은 원작에서 사랑하는 사이였으니까. 어떻게 끝났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웬만한 소설은 두 사람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같은 결말이 국룰이잖아.
하지만 황성과 한참 떨어진 북부에서 벨리알과 사랑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어쩌면 신분 상승이 목표일지도…….
그때, 시스템 창 하나가 조용히 떠올랐다.
[복수.]
‘복수?’
센의 소원이 복수라고?
[세레나가 바라는 단 하나의 소원은 복수입니다.]
‘센’이 아니라 ‘세레나’다.
시스템은 세레나가 아닌, 그녀를 여전히 세레나라고 부르고 있었다.
어쨌든 세레나가 되긴 한다는 건가?
빙의할 운명이 변했다고 해도 이 부분은 변하지 않는다는 걸지도 모르겠다. 어쩐지 기분이 묘하다. 나는 눈을 깜박거리며 센을 올려다보았다.
‘너한테는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내가 읽었던 책이 고작 몇 줄의 활자가 아닌, 누군가의 생생한 삶이 되어 버렸다고 생각하니 정말로 신기하고 이상한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카일이 센을 조용히 불렀다. 센은 저 기세가 무섭지도 않은지 차분하게 카일을 돌아보았다. 간은 진짜 커 보인단 말이지.
“네 얼굴이 낯익군.”
그녀가 움찔, 어깨를 굳히는 것이 보였다. 동요한 것 같았다. 내내 고요하던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고, 꽉 깨문 아랫입술은 잠시 새하얗게 질렸다.
그러나 센은 금세 회복했다.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던 그녀는 눈을 꾹 감았다 뜨더니 씩 웃어 보였다. 어찌나 여유롭고 자연스럽던지, 아까 내가 보았던 그 찰나의 표정이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였다.
“글쎄요. 저는 전하를 담당하는 하녀도 아닌걸요.”
“하지만…… 어디서 만난 적이 있던가?”
대공 전하, 그거 한물간 작업 멘트 아닙니까?
센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저는 전하의 백성이잖아요. 게다가 성에서 일하고 있으니 제 얼굴이 낯익으신 것도 당연합니다.”
“그래, 그렇겠군.”
카일은 그 문제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넘어가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겨울의 심장>에서 카일은 세레나에게 꽤 집착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한데, 그 이유가 뭐였지? 영지도 아니고 사람에게 집착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텐데…….
워낙 정신이 없다 보니 소설 내용을 복기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웬만한 건 시스템이 도와준다는 거지만.
“이름이?”
“센입니다, 전하.”
“그래. 센.”
카일이 무언가 생각하더니 이내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게 노골적으로 다정하게 보지 마라. 근엄한 대공작의 위엄을 지키라고. 여기서 갑자기 문 따고 나 들어 올리지 마라. 뽀뽀도 갈기지 마라.
“일을 조금 줄여 줄 테니, 캐슈넛을 살피러 올 수 있겠느냐.”
예상치도 못한 요청에 센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캐슈넛, 그러니까 마수를요?”
“그래. 너를 퍽 따르는 모양이더군. 온종일 서재에서 마주치는 이라고는 나뿐인데다 최근 축제 준비로 바빴으니 더욱 적적했겠지. 답답한 마음에 도망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뭐, 나쁜 방향은 아니다. 오히려 환영하는 바였다.
내가 보았던 원작의 초반부는 세레나, 벨리알, 그리고 카일 위주로 돌아갔다. 황성에 있는 벨리알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세레나와 카일과 엮이다 보면 기적 수치가 더 많이 모일 것이다.
애석하게도 하루의 대부분을 햄스터로 지내야 하니까, 저쪽에서 알아서 날 찾아와 주면 고생할 필요도 없이 더욱 좋다.
센이 내 쪽을 향해 다시 몸을 돌렸고, 나는 그녀가 있는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벽에 손을 살짝 올렸다. 한쪽 눈을 찡긋해 주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쥐심 썼다. 팬 서비스다.
“……할게요!”
센이 홀린 것처럼 나를 보며 외쳤다.
“제, 제가, 그러니까…… 쥐는, 아니, 햄스터는 키워 본 적 없지만, 개는 키워 본 적 있고……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그러니까……!”
“햄스터가 아니라, 마수다.”
그렇게 센은 내 두 번째 보호자가 되었다.
이참에 사이좋게 지내라. 이상한 집착이니 뭐니, 그런 건 하지 말고. 서로 죽이지도 말고. 알겠지?
센이 돌아가고 나서, 카일은 햄스터 집에 있는 나를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꺼내고 싶어 죽겠다는 눈빛이면서 섣불리 손을 대지는 못한다.
‘한번 잃어버렸던 게 그렇게 충격이었나.’
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었다. 멀쩡히 뒹굴던 햄스터는 없고, 침대 위에 홀딱 벗은 남자가 있으면 그게 무슨 상황인데.
그러다 사람이라도 불렀어 봐. 장가도 안 간 우리 전하께서 남자 취향이시라고 소문난다고요. 물론, 그런 소문을 낼 수 있는 간 큰 사람은 없겠지만.
어쨌든, 치사해도 뭐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그였어도 언제 도망갈지 모르는 햄스터를 집도 없는 곳에 두지는 못할 테니까.
……한동안 기죽은 척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 이게 다 그놈의 ‘불러오기’ 때문이잖아. 어떤 스킬인지 설명이라도 해 줬으면 좀 좋냐.
[(อิ_อี;;;)]
‘그래도 내일은 문제없이 잘되겠지.’
옷도 잘 숨겨 놨겠다, 거기로 ‘불러오기’ 한 다음에 성안의 분위기를 살펴야겠다. 마침 축제 기간이니, 모르는 사람이 좀 돌아다닌다고 해서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거다.
‘……그 전에, 바지랑 신발도 좀 구해야 할 텐데.’
이 추위에 내내 맨발로 다녔다가는 발가락이 다 떨어지고 말 거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스르르 잠들었고, 어느새 이튿날이 되었다. 그리고……. 숨겨 둔 내 옷이 털렸다는 비통한 소식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