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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와는 달리, 카일은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섬뜩할 정도로 번쩍이는 검날을 보았을 때는 정말로 일격에 세 명을 죽이려는 건 줄 알고 떨었는데, 그래도 용케 칼등으로만 도둑들을 제압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제압이라고 하기도 조금 그렇다.
―찍…… (저기…….)
카일은 세 놈을 그야말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팼다.
사적인 원한이 듬뿍 담긴 매질에 두 명은 순식간에 기절했고, 다른 한 명은 바닥에 엎드려 사시나무처럼 떨었다.
아무래도 기절하지 않은 게 아니라 못한 것 같다. 카일이 귀신같이 힘을 조절하며 그를 팼으니까. ……화풀이하는 거냐?
“누가 보냈지?”
카일이 도둑의 목에 칼을 바짝 대며 물었다.
“배후를 이실직고한다면, 사형은 면하게 해 주마.”
“저, 저희는, 그냥, 돈이 좀 되는 물건을 찾으러…….”
“돈이 좀 되는 물건?”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으나, 다소 어폐가 있는 말이기는 했다.
여자가 있으면 잡든지 암살하든지 하겠다며? 상대가 카일이니 머저리처럼 보일 뿐이지, 약한 사람 앞이었으면 강도질도 서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이 더욱 하찮아 보이는 이유는 그저 계획도 없고 충동적이기 때문이었다. 다른 귀족들에 비해 대공작의 방은 경계가 그리 삼엄하지도 않았을 테니, 만만하게 보이기도 했겠지.
“마수를 납치하라고 사주한 이가 없다고?”
카일이 음산하게 말했다.
“이게 마지막 질문이다.”
“그, 그게, 그…….”
바들바들 떠는 도둑이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며 날 바라보았다. 왜, 뭐. 나더러 구해 달라는 눈빛 보내지 마라, 이 햄스터 도둑아.
“……마수였습니까!”
그건 그렇지. 대공이 여자를 숨겨 뒀다는 소문을 듣고 왔는데 여자는 온데간데없고 아몬드 까먹는 햄스터를 발견했으니까. 저쪽도 당황하기는 했을 거다.
카일의 시선이 서재를 빠르게 훑었다. 흐트러진 서류 몇 장은 블레이크 영지의 행정에 관련된 것이었고, 마카다미아는…… 내 간식이었다.
적어도 전문적이거나 조직적으로 움직이는 이들이 아니라는 걸 확신한 듯 카일이 검을 들었다. 금방이라도 목을 썰어 버릴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좀도둑은 물론이고 나조차도 긴장할 지경이었다.
“그, 그게, 대공 전…….”
쿵.
비척비척 일어나던 복면의 남자가 볼썽사납게 쓰러졌다. 덕분에 집구석에 얌전히 처박혀 있던 나는 펄쩍 뛰며 놀랐다.
아니, 깜짝이야! 쓰러져도 굳이 내 코앞에서 쓰러질 건 뭐야! 기절하는 놈이랑 눈 마주쳤다고!
“캐슈넛.”
그가 햄스터 집 안으로 손을 넣더니 나를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괜찮으냐. 많이 놀랐겠구나.”
―찍……. (저기…….)
“이제 걱정하지 말아라. 축제가 코앞인 데다 훈련받은 암살자들도 아닌 듯하니, 죽이는 대신 지하 감옥에 넣어 둘 것이다. 황성에서 손님이 오는 탓에…….”
카일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래, 뭐든 잡음이 없어야겠지. 귀찮은 일이 생기면 안 되니까.”
―찍. (그게 아니라.)
“중요한 일이 끝나거든 벌판에 내다 버리마.”
―찌익. (알았으니까.)
칼은 좀 내려놓고 말해 주실래요? 쓰러진 놈들도 저리 치워 주시고요.
이런 흉흉한 분위기를 정리도 안 하고 햄스터부터 돌보는 건 무슨 정신이냐. 아무리 저놈들이 햄스터 절도 현행범이라지만.
―…….
쥐가 되어서 그런가, 간도 쥐만 해진 모양이다. 작은 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벌렁벌렁하는 걸 보면.
‘하긴. 원래 세계에서는 칼이라고 하면 식칼이 다였지.’
사람이나 마수를 베기 위한 칼은 그 위압감부터가 다르다. 저 서슬 퍼런 칼날 앞에서 의연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강심장이지.
그리고 원래 직장인들은 전부 담력이 약하다. 딱히 내가 쫄보라서 그런 게 아니라.
“대공 전하!”
―찍! (와이 씨! 깜짝이야!)
돌연 문이 벌컥 열리더니 무장한 사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아무래도 침입자가 있었다는 소리에 경비병들이 뛰어 들어온 모양이었다.
원래 북부 사람들은 다 이렇게 과감해!? 그래서 문 부서지겠냐!?
큰 소리에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나는 재빨리 그의 손바닥을 빠져나왔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정말로 햄스터의 습성이 옮기라도 했는지, 내 몸은 어느새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어쨌건 커다란 소리, 그리고 저렇게 많은 사람이 나를 쳐다보는 상황은 피하고 싶었다. 어쩌겠냐. 내 MBTI가 I로 시작하는걸.
“캐슈넛!”
카일이 쓰러진 남자들을 발로 밀어 넘기는 사이, 나는 책상을 딛고 아래로 폴짝폴짝 뛰어내렸다. 쳇바퀴를 반올림해서 칠백 바퀴쯤 뛰고 나니 이 정도야 징검다리 수준이다.
순식간에 바닥까지 내려간 나는, 책장 바닥 쪽으로 들어갔다.
‘몸집이 작으니 이런 데도 들어가지네.’
무시무시하게 커 보이던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 모름지기 쉬는 곳이라면 천장과 벽으로 꽉꽉 메운, 나만의 공간이 필요하다고.
“다 나가도록!”
어우, 목소리 크다. 바닥까지 흔들리는 줄 알았다.
나는 어두운 쪽으로 점점 더 기어들어 갔다. 여기까진 아무래도 청소하기 어려웠는지 먼지 덩어리 몇 개가 얼굴을 때렸다.
“저, 전하?”
“전부 다 나가라니까.”
카일의 목소리에는 거의 살기와 비슷한 수준의 한기가 서려 있었다. 정말 10초 내로 안 꺼지면 칼춤이라도 출 것 같다.
병사들은 정말 없던 힘도 다 짜냈다. 그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쓰러진 이들을 질질 끌고 나갔다. 덜컥, 문이 닫히고 나자 조용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카일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이리 나오거라, 캐슈넛. 거긴 위험하다.”
아냐, 잘 생각해 봐. 햄스터 집이 더 위험하다고. 한 시간 전에 도둑들이 들이닥쳤다니까?
“어서 나오래도.”
그가 간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팔이 쑥 들어오긴 했는데, 내가 있는 안쪽까지 닿기는 턱없이 모자랐다. 나는 앞발로 털을 고르며 그가 내민 손을 구경했다.
바닥을 더듬는 다섯 개의 손가락이 썩 애처로워 보였다. 그래서 구석에 떨어져 있던 잉크 뚜껑 같은 것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근데, 여기 왜 이렇게 마음이 편하지?
[햄스터는 어두운 곳을 좋아합니다!]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하긴, 야행성 동물이었지.
나는 은은하게 수긍하며 스르륵 빠져나가는 손을 바라보았다. 카일은 잠시 말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불쑥 다른 것이 밀려들어 왔다.
―찍! 찍찍! (아니, 미친놈아!)
그가 쓱 내민 것은 검이었다. 물론, 칼날은 검집에 잘 들어가 있었지만 그래도 저게 무엇인지 아는 이상 공포스러운 건 당연했다.
파드득! 몸을 떨며 더 깊은 구석으로 몸을 숨겼다. 데굴데굴 구르던 먼지가 털에 엉겨 붙으면서 나는 하나의 먼지 덩어리가 되고 있었다.
“제발 이리 나오거라, 캐슈넛. 내가 잘못했다.”
아까 그 미친 북부대공이 맞나? 뭐가 저렇게 간절해?
“오늘은 같이 잘까? 씻기도 해야 하고, 네가 좋아하는 건 뭐든 해 주마. 혼자 두지 않을 테니.”
―…….
결단코 마지막 말에 혹한 건 아니다.
근데, 솔직히 외롭잖아. 대운동장 같은 햄스터 집은 그렇다 치고, 서재는 내가 살던 원룸보다도 컸다. 인간이라도 넓다고 느꼈을 텐데 하물며 지금은 한 줌도 안 되는 햄스터 신세니까…….
무엇보다 활자 속에서 한차례 내다보았던 죽음이라지만 찝찝한 것도 사실이다.
고작 며칠이기는 했지만, 그새 정이 들어 버렸는지 꼭 기적 수치 때문만이 아니라 진심으로 이 녀석을 살리고 싶어졌다. 그리고, 원래 동물 좋아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 아니야.
나는 카일의 검을 피해 조심스럽게 서랍 밑에서 나왔다. 카일이 반색하며 검을 팽개치고 나를 소중히 들어 안았다.
“잘 생각했다.”
냉혹한 북부대공이 설정 아니셨습니까. 지금 얼굴만 보면 푼수가 따로 없다. 누구보다 차가운 북부대공이지만, 내 햄스터에게는 따뜻하겠지 같은 거냐…….
카일은 내 몸에서 먼지를 털어 내고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세면대에 따뜻한 물을 받아 나를 씻겨 주었다.
‘좋네…….’
온천에 온 것 같다. 머리에 수건 하나 얹을까. 근데, 이렇게 씻어도 되나? 설치류는 물 목욕시키면 안 될 텐데. 몸에 이상 생기는 건 아니겠지.
[북부 들쥐는 물을 좋아합니다!]
그러냐. 그건 다행이네.
이후, 카일은 내 털을 몇 번이나 쓸어 주고 포근한 수건 위에 눕혀 주었다. 여러 번 해 봤나 싶을 만큼 능숙한 손길이었다.
나는 전신 마사지를 받는 기분으로 얌전히 누워 있었다. 햄스터 팔자 상팔자다.
“잠이 오는 모양이구나.”
귀신 같은 놈. 나는 가물가물 감기기 시작하는 눈을 억지로 치떴다.
좀 더 이 나른함을 즐기고 싶다. 그는 내 배에 뽀뽀를 하고 제 침실로 향했다. 나는 포대기처럼 감싼 하얀 수건의 감촉을 즐기며 얌전히 그의 머리맡에 누웠다.
‘여기가…… 천국……?’
폭신폭신한 시트에 몸을 굴리고 있자니 그가 내 곁에 쳇바퀴를 놓아주었다. 뭔데. 이거 뭔데. 아마 내가 이걸 좋아한다 생각해서 놓아준 모양이었다.
나는 어이없다는 얼굴로 카일을 한 번, 쳇바퀴를 한 번 쳐다보다가 발로 대관람차를 툭툭 차 댔다.
분홍색 대관람차는 반질반질하게 기름칠이라도 한 것처럼 팽팽 잘도 돌아갔다. ……뭐지? 익숙해서 그런가, 안정이 좀 되네.
“잠시 다녀올 테니 얌전히 있거라. 캐슈넛.”
그는 검지로 나를 쓰다듬고 침실을 벗어났다. 아까 그 난리가 났었으니 당장 처리해야 할 일이 꽤 많을 것이다.
‘북부대공도 아무나 하는 거 아니네.’
따지자면 야근이니까.
발로 쳇바퀴를 돌리던 나는 번뜩 스치는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이거, 완전 절호의 기회잖아?
나는 얼른 시스템을 불러다 남은 횟수를 확인했다.
[787/1000]
‘이 정도면 금방이지.’
이제 200회 정도야 아몬드 먹으면서도 한다. 나는 얼른 위에 올라타 쳇바퀴를 돌리기 시작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르륵.
안정감 있다. 이젠 이보다 더 잘 돌릴 수가 없다. 침대가 돌침대라도 되는 건지, 쳇바퀴를 단단하게 받쳐 주는 게 보통이 아니다.
나는 신이 나 박차를 가했다.
[864/1000]
……
[958/1000]
……
[990/1000]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10바퀴를 남겨 뒀을 무렵.
“캐슈넛.”
문이 열리며 카일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얼른 수건이 깔린 시트 위로 몸을 날렸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 큰일을 당한 가련한 햄스터인 척 몸을 말았다.
다행히 내가 잘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 카일은…… 아직 쳇바퀴가 돌아가고 있는 것은 신경 쓰지 않고, 아니, 두 눈 가득 나를 담느라 못 본 것에 가깝겠다. 어쨌든, 씻으러 간다는 말을 남기고 욕실로 들어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팽팽 도는 쳇바퀴를 바라보았다.
‘이게 멈춰야 올라가는데.’
멍하니 앉아 광란의 쳇바퀴를 감상하다가, 완전히 멈추고 나서야 다시 조심스럽게 올라탔다.
[999/1000]
[1000/1000]
그리고 마침내 1000바퀴가 완료되었을 때, 이상한 팡파르 소리와 동시에 시스템 창이 반짝 빛났다.
‘뭐, 뭔데……?’
[‘불러오기’를 습득하셨습니다!]
[기적 수치가 상승했습니다!]
[현재 기적 수치 5.0%]
[‘불러오기’를 사용하시겠습니까?]
‘지금? 여기서? 써 봐도 되나……?’
나는 자그마한 앞발로 [YES]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시스템 창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과 똑같은 빛이 내 몸을 휘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