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북부대공의 햄스터-5화 (5/129)

5

‘나쁜 자식.’

피도 눈물도 없는 놈. 지독한 놈. 치사한 놈. 야박한……! 나는 톱밥 속에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포효했다.

―찌익! (내 쳇바퀴 내놔, 자식아!)

아직 반의반도 못 탔다고!

서류만 보는 척, 햄스터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없는 척 굴다가 이렇게 뒤통수를 치는 법이 어디 있냐. 어? 알았으면 나도 적당히 타는 척했겠지.

하긴, 못 말리는 햄스터 오타쿠가 1분이라도 내게 무관심할 거라고 믿은 내가 멍청했다. 뛰는 햄스터 위에 나는 북부대공이라니.

심지어 카일은 이튿날, 쳇바퀴를 가져간 채 영지 주변 순찰을 떠났다. 그야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이 햄스터 우리에서 일으킬 만한 기적도 없고, 퀘스트를 할 수도 없는데.

‘그 원수 같은 기적…….’

나는 미끄럼틀을 거꾸로 기어 올라가다가 중간 즈음에서 주르륵 미끄러져 내려오는 것을 반복하며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본래 세계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건 고사하고, 그냥 좀 죽는 날까지 인간답게라도 살고 싶다. 사전적인 의미의 인간으로, 좀!

어쨌든, 내 의지와는 달리 시간이 흘렀다.

그야말로 놀고먹는 나날이다. 미끄럼틀을 타고, 호두 먹고, 낮잠 자고, 땅콩 먹고, 숨집에서 몸 뒤집으면서 놀고, 해바라기 씨 먹고, 그네 타고, 피스타치오 먹고…….

추운 동네라더니, 견과류가 특산품인가? 부럼 맛집이네. 계속 까는 것도 일인데, 한꺼번에 까서 볼에 넣어 놓고 생각날 때마다 조금씩 꺼내 먹으면…….

‘……미친. 대체 무슨 생각이지?’

이제 사고방식까지 햄스터처럼 변하는 건가?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적응하게 될까 봐 슬슬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인간이다. 지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캐슈넛.”

카일은 해가 지고도 한참 뒤에 들어왔다.

밤늦게 들어온 건지는 잘 모르겠다. 여기서는 시계가 잘 보이지 않았고, 블레이크 영지의 겨울은 밤이 하루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으니까.

그가 서재로 돌아와 나를 살펴보았지만, 나는 아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뭐 예쁘다고.’

1층과 2층을 잇는 통로 사이에 몸을 구긴 채 그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자, 녀석은 햄스터 집 주변을 한참이나 둘러보다가 침실로 돌아갔다.

실망감이 역력한 기색이었던 것 같지만…….

뭐, 쳇바퀴 가져오면 눈인사 정도는 해 준다.

*

그렇게 투명한 통로 사이에 끼어서 맞이한 이튿날. 성질 급한 북부대공께서는 해가 뜨기도 전에 서재를 찾았다.

“다녀오마.”

그가 내 근처까지 얼굴을 바짝 댄 채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부터는 식단을 좀 조절해야겠더구나. 생각보다 그 통로가 네 몸에 끼는 것 같아서.”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나는 깜짝 놀라서 숨집 밖으로 기어 나왔다.

그러나 어찌나 빠르던지, 카일은 이미 내 밥그릇을 싹싹 뒤집어엎고 있었다. 온갖 견과류로 가득 차 있던 내 그릇이…… 내 그릇이…… 아몬드 세 알만 남기고 싹 비었다.

“관절에 무리가 가면 안 되니까. 조금은 남겨 뒀으니 밤까지 괜찮을 거다. 축제 준비 때문에 바빠서 오늘도 늦게 들어올 것 같구나.”

―…….

“……역시, 너무 적나?”

내가 무어라 항의하기도 전에 그의 옆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말했다.

“아닙니다. 마수학자에게 듣기로 아직 개체의 성장기가 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하. 이 정도면 적당합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식단 관리라니? 너는 눈이 옹이구멍이냐! 안 그래도 아침저녁으로 견과류만 먹는 것도 억울한데!

남이 짜 주는 식단은 급식 이후에 또 처음이다. 나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올려다보다가 밥그릇을 한 번 팍! 찼다.

더럽고 치사한 삶. 먹고 싶은 것도 마음대로 못 먹고.

치킨에 맥주 먹고 싶다. 연어 위에 케이퍼. 닭발. 분모자 떡볶이. 빠네 파스타…… 기름지고 맵고 몸에 나쁜 거. 한국인만 먹을 수 있는 그런 거!

“운동도 조금 시키는 게 좋겠지.”

“예, 전하. 무리하는 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살찌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음.”

카일은 아주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집 안에 쳇바퀴를 놓았다.

‘그래! 그거지!’

나는 파란 눈을 반짝거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늘만큼은 그가 천사처럼 보였다.

축제인지 나발인지 준비를 아주 천천히 하고 오시라고요, 전하. 저는 더도 덜도 말고 딱 팔백 바퀴만 뛰고, 이 더러운 햄스터 생활 청산하렵니다.

일단 침착하자. 주자마자 냅다 쳇바퀴에 올라가면 또 뺏어 간다. 나는 최대한 차분한 척, 이제야 겨우 내 품으로 돌아온 쳇바퀴에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척 고개를 홱 돌렸다.

카일은 그런 나를 아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한참 동안 쳐다보았다.

저거, 아주 눈으로 백 번은 뽀뽀한 것 같다. 그래도 누가 옆에 있을 때는 제법 자제할 줄 아네. 많이 컸어.

“마수가 그렇게 좋으십니까?”

나가는 두 사람의 대화가 얼핏 들렸다.

“북부 들쥐라고 부르는 마수다. 심장에 마석이 생기는 것은 조금 늦고, 신체적인 위력은 약하지만…… 사회적인 행동이 가능하고 무엇보다 똑똑하지.”

“어차피 새끼 때는 그게 그거잖습니까. 햄스터랑 똑같이 생기기도 했고. 아무리 봐도 그냥 금색…….”

뒤를 슬쩍 돌아본 부하 기사가 나를 은근슬쩍 삿대질했다.

“쥐잖습니까.”

“쥐라니.”

카일이 냉랭하게 대답하며 기사의 손을 철썩 때렸다.

“너는 눈이 사시인가?”

“……저, 전하.”

“됐다. 너는 내가 축제에 관련된 검토를 마치는 동안, 작은 바늘과 실을 가져와라.”

“그건 뭘 하시려고요?”

“알 것 없다. 중요한 일에 쓸 것이니 최고급으로만 준비하도록.”

“예…….”

카일은 크흠, 하고 헛기침을 하며 서재를 나갔다.

“올해 겨울은 유독 춥던데…….”

‘이 자식, 설마.’

내 옷을 뜨개질로 만들 생각은 아니겠지? 이상하게 가정적인 짓 하지 마라, 대공작. 연약한 햄스터 뒷덜미 잡고 넘어가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상상만으로도 전신의 털이 쭈뼛 서서, 나는 팔다리를 빠르게 문질렀다.

생각하지 말자. 생각하지 마.

나는 얼른 쳇바퀴 위에 올라탔다. 잡념을 지우는 데에는 쳇바퀴 돌기가 제일이다. 이제 요령도 생겼으니 팔백 바퀴도 금방일 것이다.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네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덜그럭.

커다란 대관람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자. 이제 흐름에 몸을 맡기고, 딴생각이나 하자. 이왕이면 평화롭고 기분 좋은 생각. 피자, 뚝배기 불고기, 순대국밥…….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며 그 원동력으로 쳇바퀴를 박찼다.

[0217/1000]

……

[0322/1000]

……

[0445/1000]

숫자는 순조롭게 올라갔다.

이 정도면 나보다 쳇바퀴 잘 돌리는 햄스터는 없을 거라고 자부한다. 또 이게 하다 보니 보람도 있고, 횟수 카운팅도 되니까 포인트 적립하는 것 같기도 하고.

나는 묘한 희열을 느끼며 이제 막 600에서 700 사이를 달리는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이것 봐, 금방이라니까?

허기가 좀 지기에 내려가서 뭐든 먹으려니, 아까 카일과 기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뭐? 식단을 조절해? 통로가 내 몸에 껴?’

어림도 없다. 살을 쪽 빼 주지. 땅을 치고 후회해 봐라.

나는 이상한 열의에 불타 휴식도 마다하고 미친 듯이 쳇바퀴를 돌렸다. 이러다 나사가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처음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을 땐, 드디어 이 무지막지한 쳇바퀴가 운명을 다한 줄로만 알았다.

어라? 근데, 이 소리가 그 소리가 맞나?

“대공이 성에 여자를 숨겨 둔다지?”

“아주 좋아 죽는다던데. 매일 끼고 산다더라.”

……여자?

“멍청한 자식들아. 여자를 서재에 숨겨 두겠냐? 침실에 뒀겠지!”

“……그런가? 그럼, 여기부터 뒤지고 침실로 가자고.”

“맞아. 여기서 운 좋게 군사 기밀이라도 손에 넣으면 좋잖아?”

나는 쳇바퀴를 멈추고 문으로 기어들어 온, 그러니까 정말 글자 그대로 기어들어 온 세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군대에서나 볼 법한 포복 자세로 책상 근처까지 다가온 그들은 새카만 복면을 쓰고 있었다. 누가 봐도 초대받은 손님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잡든지 암살하든지 하자고.”

“그래, 일반인이면 편하지.”

“그래서 꽁꽁 숨겨 둔 거 아냐?”

복면의 사내들. 이하, 도둑들은 저들끼리 만담을 주고받으며 서랍을 뒤졌다. 제일 위 칸엔 서류, 그다음 칸에도 서류, 또 그다음 칸에도 서류. 그리고 마지막 칸에는―.

“이게 다 뭐야?”

남자 중 하나가 묵직한 주머니를 들어 올렸다. 나는 밥그릇 옆에 죽치고 앉아 아몬드를 까먹으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마카다미아?”

‘저게 저기도 있었구만.’

참고로 문 옆에 있는 작은 서랍 안에도 있다.

까득. 까드득.

도둑들이 황당함에 침묵하자, 서재 안에는 내가 아몬드 까먹는 소리만 났다. 그제야 내 존재를 눈치챘는지 넋 놓고 있던 다른 도둑 둘이 내게로 다가왔다.

“이건 뭐야?”

“쥐 같은데요?”

“특이하게 생겼는데. 털이 황금색이잖아?”

“……마수인가?”

“역시 북부대공쯤 되니까…….”

아뇨, 그냥 햄스터입니다.

나는 마지막 아몬드를 들고 야무지게 먹방을 찍었다. 거, 손에 든 마카다미아도 좀 가져와 보쇼. 아몬드 세 알론 기별도 안 가니까.

“……이거, 비싸려나?”

한참 내 먹방을 쳐다보던 도둑의 입에서 침이 꼴깍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이내 햄스터 우리를 열기 시작했다.

‘정말 계획이고 뭐고 없구나.’

여자 찾았다가, 기밀 찾았다가, 이제는 햄스터 납치.

줏대라곤 하나도 없다. 어쩌다 이렇게 어설픈 사람들이 도둑씩이나 하려 했을까. 오는 사이에 안 들킨 게 기적일 정도다.

나는 천장에서 내려오는 손을 바라보지도 않고 한숨을 내쉬었다. 슬슬 나와라. 등장하기 좋은 타이밍이잖아?

그때.

“뭐, 뭐야!”

쨍그랑! 유리가 깨지는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세 명의 도둑들. 이하, 머저리들은 미어캣처럼 목을 빼고 창문을 홱 돌아보았다.

“감히 내 것에 손을 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으며, 북부의 가장 높은 고지의 바람을 닮은 목소리가 서리처럼 내려앉았다. 머저리들은 목소리만으로 벌써 세 번씩 죽은 것처럼 떨기 시작했다.

어…… 그러니까, 이런 걸 전문 용어로 업보라고 한다. 한마디로 쌤통이다.

[감히 나의 설탕 햄스터를 납치하려고 해! ᕕ( ᐛ )ᕗ]

그렇게 말한 적은 없다. 근데, 너는 왜 신났냐?

“살려 보내지 않겠다.”

아니, 햄스터에 손을 댔다는 죄목으로 사형인 거야?

카일이 허리춤에서 칼을 꺼냈다.

……아무래도 정말 안 살려 보낼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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