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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되자, 블레이크 대공작의 서재에서는 캐슈넛 테마파크 파티…… 대충 줄여서 햄스터 잔치가 열렸다.
자, 자. 대관람차 타실 다음 손님 안 계십니까? 눈 깜짝할 사이에 꼭대기까지 올려 드립니다. 지금 타시면 북부 대공 집무실 뷰가 무료!
이런 기회, 두 번은 없습니다. 디스코 음악 같은 건…… 아, 그럼 관람차가 아니라 디스코 팡팡인가? 어쨌든 빨리빨리 오십쇼. 환상의 나라 캐슈넛 랜드로.
나는 적막 속에서 머리를 대충 흔들며 쳇바퀴를 손으로 돌렸다.
덜그럭, 덜그럭.
처음에는 너무 무거워서 제대로 굴러가지도 않던 쳇바퀴는 한번 속도가 붙자 그야말로 신명 나게 돌기 시작했다.
손으로 돌리는 것도 굴리는 거지. 안 그래? 이것도 발이잖아. 앞발.
[ㄟ(˘ o ˘)ノ]
……손으로 돌리는 것도…… 굴리는 거지?
아니, 이 작고 연약한 손을 봐라. 이 양심 없는 시스템 놈아. 발로 다 뛰었다가는 비명횡사한다니까?
‘야, 저기요. 시스템 님.’
자식아, 듣고는 있는 거냐?
[0003/1000]
아니, 진짜 한 바퀴도 반영이 안 된다고?
[양심 없는 시스템입니다!ꉂꉂ(ᵔᗜᵔ*)]
아…….
나는 쳇바퀴를 거의 패대기 치다시피 빠르게 돌리기 시작했다. 흡사 부서질 듯 덜그럭대는 소리에도 내 마음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이 빌어먹을 관람차. 아니, 쳇바퀴. 어느 세월에 죄다 발로 뛰냐고. 좀 모르는 척 편법도 용인해 줘야지!
아니다. 이건 카일 놈의 잘못이다. 누가 반려 햄스터 덩치도 생각 안 하고 이런 쳇바퀴를 갖다 놓냐? 기니피그도 쾌적하다고 뛰어 젖힐 대접만 한 쳇바퀴를 좀 봐라!
이 거지 같은 인생! 빌어먹을 쥐생!
그렇게 얼마나 화풀이하고 있었을까. 덜컥, 노크도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온 사람은 당연히 성의 주인인 카일이었다.
‘아니, 영지가 무슨 시골 동네야? 휙 하면 한 바퀴 다 둘러보는 게 말이 돼? 한나절도 안 걸렸…….’
걸렸다. 그러고 보니 나, 낮잠 잤구나.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는 엄청난 기세로 햄스터 집을 향해 걸어왔다. 북방의 패자라고 부르기에 손색없을 만큼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차림새는 또 어떻고? 얼음장 같은 바람을 막아 줄 두툼한 망토와 철과 가죽으로 만든 갑옷, 무릎 아래까지 올라와 눈길을 헤칠 수 있도록 돕는 부츠까지.
그 모든 것이 기가 막힐 정도로 어울리는, 겨울을 깎아 만든 듯한 처연한 미남자.
“캐슈넛?”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돌아오자마자 보이는 풍경이 저 혼자 돌아가는 쳇바퀴와 사라져 버린 햄스터라면 이상할 만도 했다. 정확히는 사라진 게 아니라 조그만 숨집에 들어간 거지만.
“엉덩이 다 보인다.”
……그러냐. 어쩐지 좀 집이 작더라.
나는 머쓱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숨집에서 나왔다.
“당장이라도 함께 시간을 보내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오늘은 확인해야 할 서류가 많아 어렵겠구나.”
―찍. (사양한다.)
“그래, 나도 슬프다.”
―찌익. (아니. 안 슬프다니까.)
슬픔은 쥐뿔. 개인적인 시간을 통해 내면마저 멋진 대공작으로 거듭나길 바란다. 뽀뽀와 주접으로 체통 깎아 먹지 말고.
카일은 당장이라도 나를 집 밖으로 꺼내 뽀뽀하고 싶다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그러나 바쁘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나를 그저 뜨거운 시선으로만 볼 뿐, 이내 한숨을 내쉬며 책상 앞에 몸을 내렸다.
‘하긴, 검 좀 쓴다고 작위가 덥석덥석 주어지지는 않았겠지.’
그런 방식이었다면 황제 자리를 세습하는 게 아니라 결투로 물려줬을 거다. 좋으나 싫으나 영지를 위해서라면 지루한 서류 작업도 견뎌야 하는 건가. 먹고살기 어려운 건 여기나 저기나 똑같다.
‘……그래도 제법 멋있네, 직업 정신.’
나는 톱밥 사이에 파묻히듯이 앉아 카일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양피지 두루마리에 무언가를 부지런히 정리하고 있었다. 보이지 않으니 필체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왠지 무척 정갈할 것 같다.
그렇게 그는 마치 내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진지한 태도로 업무에 임했다.
‘살날이 한 달 남은 놈도 저렇게 열심히 사는데…….’
뭐, 본인은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금방 끝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겠지만. 나는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섰다. 어쩐지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물론, 밤잠 낮잠 다 챙겨 자고 할 일이 없어서 이러는 건 절대 아니다.
그래, 어쨌든 천 바퀴를 뛰어야 한다면! 최대한 빠르게 해치운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한국 사람, 빨리빨리!
나는 회심의 ‘빨리 가는 작전’을 시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떻게 빨리 가냐고? 그야, 개발자로서 일을 빨리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은…… 철야다.
개발자는 철야의 생물이다. 판교의 등대였던 때처럼 온몸을 불살라 보자고.
[좋은 생각입니다! (*´╰╯`๓)]
‘웃지 마라. 그런다고 정 안 드니까.’
[(ᗒᗣᗕ)՞]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쳇바퀴를 탔다. 그리고 있는 체력 없는 체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그 무지막지한 대관람차를 네발로 달렸다.
술 먹고 개가 된 적은 있어도 쳇바퀴 돌리는 햄스터가 되어 보는 건 처음인데……. 뭐, 다리가 네 개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으니 다행이다.
두다닥.
그래도 몇 바퀴 뛰어 보니 좀 감이 왔다.
아까 돌려 보면서 느낀 건데, 적당히 속도가 났을 때 그냥 그 흐름에 몸을 맡기고 뛰는 게 처음부터 속도를 내는 것보다 편했다. 쳇바퀴가 생각보다 무거워서 그걸 발로 밀어 굴리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두다닥. 사각사각. 다다닥. 사각사각. 투다다닥. 사각사각. 드르륵. 철퍼덕. ……아. 넘어졌다. 나는 고꾸라진 채로 옆을 슬쩍 바라보았다.
‘……못 봤겠지?’
아무래도 못 본 것 같다. 카일은 여전히 진지한 표정으로 보고서를 읽어 넘기고 있었다. 집중력이 좋은 건지, 무심한 건지.
“……다 됐군.”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자, 카일이 뻐근한 목을 좌우로 뚝뚝 꺾으며 일어났다.
그즈음의 나도 입안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어서, 이대로 과로사하고 싶지 않으면 좀 쉬어야 하는 타이밍이었다.
[0213/1000]
‘그래. 조금만 쉬었다가, 저 녀석이 침실로 돌아가거든 혼자 남아서 새벽 내내 제대로…….’
덜컥.
그때, 햄스터 집의 천장이 열렸다.
뭐, 맘대로 해라. 그래 봤자 주접 좀 떨다가 내려 두고 자러 가겠지. 난 그럼 열심히 마저 돌리고, 천 바퀴 되면 사람 되고, 반려 햄스터 팔자 접고, 다음 퀘스트 받고.
완벽한 계획이었다. 저 원수 같은 쳇바퀴를 약 팔백 바퀴쯤 더 탄다는 가정하에.
“그럼, 이건 가져가마.”
‘……어? 잠깐만.’
야! 내 쳇바퀴!
나는 반사적으로 쳇바퀴를 붙잡고 매달렸다. 이게 어떤 쳇바퀸데 함부로 가져가!? 여태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작은 앞발에 힘을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일은 기어코 내가 매달린 쳇바퀴를 집 밖으로 꺼냈다. 내 반항쯤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른 손으로 나를 조심스레 붙잡고 기어코 쳇바퀴와 뚝 떼어 냈다.
―찍찍찍찍! (야, 이 상도덕 없는 놈아!)
“마음에 든 건 알겠다만 더는 안 된다, 캐슈넛. 그러다 무릎 관절이라도 상할까 걱정이더구나.”
―찌익! 찍찍! (햄스터 쳇바퀴 돌리는 거 처음 보냐!)
“그래, 그래. 서운하겠지. 그래도 다 너의 건강을 위해서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거라.”
카일은 쳇바퀴를 멀찍이 놓아두고 내 배에다 뽀뽀를 갈겼다. 나는 혼신의 발차기로 카일의 뺨을 퍽퍽 때리곤 다급히 시스템을 불렀다.
‘야! 솔직히 이건 무효지! 쳇바퀴가 없는데 어떻게 퀘스트를 하냐!’
[능동적인 햄스터가 되어 보자! (*•̀ᴗ•́*)و]
나는 부글부글 끓는 속을 느끼며 주먹을 말아 쥐었다. 눈앞에 있었으면 머리를 쥐어박고도 남았다.
뭐? 능동적인 햄스터? 북부대공한테 붙잡혀서 키스 갈겨지는 햄스터한테 능동을 운운해?
그럴 거면 어엿한 마수로 빙의하게 해 주던가! 하다못해 세레나로 빙의했어도 지금보단 팔자가 좋았을 거다. 우여곡절이 많은 인물이긴 해도 말 못 하는 짐승만큼 답답할까.
인권.
내 인권 돌려줘, 빌어먹을 세상아!
“그보다 배가 고프겠군. 쳇바퀴를 그만큼 돌렸으니 허기가 질 만해.”
이제 그는 내 신경질이 단순한 배고픔에서 비롯된 심술이라고 생각하기까지 이르렀다. 나는 톱밥 위에 내려서서도 씩씩거리며 투명한 유리막에 바짝 붙었다.
카일은 문 옆에 있는 탁자 서랍에서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이내 내 위로 마카다미아를 집어 내밀었다.
“먹어도 좋아.”
상냥한 말투였다. 누가 들으면 연인한테 하는 말인 줄 알겠다.
나는 작은 두 손으로 카일의 손가락을 붙잡고, 그대로 마카다미아가 아닌 그의 손을 꽈악 깨물었다.
그때, 내 눈앞으로 시스템 창이 새로 떠올랐다.
[뭣보다 나는 햄스터가 아니라 인간이다. 아무거나 깨무는 야만적인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내가 시스템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그 배수현은 어제부로 죽었다. 나는 새로 태어난 배수현이다. 지금 배수현은 사람을 문다. 마카다미아 같은 것보다 고기가 좋은 나이다.
그리고 이건 업보 아니냐? 물리기 싫으면 물릴 짓을 하지 말았어야지.
“이가 간지러운가.”
아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카일은 참 무덤덤했다. 그는 오히려 내 엉덩이를 받쳐 들더니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야, 뭘 봐.
보지 마. 엉덩이 들어 올려 보지 말라고.
내 쳇바퀴나 돌려줘!
“얌전히 잘 놀고 있어라.”
이후, 그는 그대로 나를 집에 내버려 둔 뒤 침실로 돌아갔다. 달칵. 서재의 불이 꺼지며 사방이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나는 톱밥 위에 주저앉아 땅을 쳤다.
‘내 쳇바퀴…….’
정말이지, 운수 좋은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