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캐슈넛.
빙의하고 나니, 내 이름이 캐슈넛이란다.
……대체 누가 지었냐?
세상에 하고많은 대명사 중에 굳이 캐슈넛일 이유가 대체 뭐란 말이야?
사람한테 김치찌개, 볶음밥, 오므라이스 같은 이름을 붙여 준 거랑 다를 게 없다. 김쌀국수, 최스테이크, 박푸팟뽕커리…….
‘……관두자.’
어차피 빌어먹을 햄스터가 됐을 때부터 내 인권 같은 건 개나 줘 버린 거다.
황무지에서 선인장처럼 자라, 게임 하나 대박 내놨더니 부귀영화는 고사하고 햄스터라니. 잠시 잊어 두었던 억울함이 울컥울컥 치밀기 시작했다.
그래.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도 있는데, 살아난 건 다행이라고 치자. 그게 하필이면 반쯤 졸면서 읽었던, 그나마도 중간에 하차했던 소설에 빙의한 형태여도 봐줄 수 있다.
그런데, 왜!
그 많은 등장인물을! 다 놔두고!
쥐!
쥐!
이 망할 쥐가 되어서!
[동기화가 완료되었습니다!]
그래. 말 좀 해 봐라. 수백 명씩 되는 등장인물을 놔두고 하필이면 햄스터가 된 이유를 들어나 보자고.
[공석이 그것뿐이었어요!~(˘▾˘~)]
지금 약 올리냐.
내가 이를 뿌득뿌득 갈고 있자, 카일이 나를 새집에 조심스럽게 내려 두었다.
“캐슈넛? 왜 기운이 없지? 쉬고 싶은 건가?”
그래. 지금 생각할 게 산더미처럼 쌓여 있으니까, 너까지 치대지 말고 좀 놔라.
나는 조그만 발로 카일의 손바닥을 팍팍팍 찼다. 저 망할 시스템과 이야기를 좀 나눠 봐야겠으니, 좀 꺼져 보란 말이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더니, 미리 준비한 새집 안에 나를 조심스레 넣었다.
“부족하지만, 널 위한 공간을 마련했다. 이곳에서 마음을 달래거라.”
카일이 미소 지었다. 냉철함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사뭇 다정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였다.
‘왜 이래? 안 어울리게.’
그냥 생긴 대로 삽시다.
나는 툴툴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나를 위해 미리 마련했다던 햄스터 집은 척 보기에도.
‘과하다…….’
심히 과했다.
무려 3층으로 된 햄스터 우리는 탁자보다 높이 올라와 있었다.
나무로 테두리를 튼튼히 짜고, 맨 윗부분은 아치형으로 모양을 냈다. 중앙에는 화려한 붉은 보석이 떡하니 장식되어 있기까지 했다.
구석구석 꼼꼼하게도 꾸며 둔 안에는 푹신해 보이는 방석, 멀리서 보면 장신구로 착각할 만큼 번쩍거리는 사료 그릇, 보기만 해도 부드러워 보이는 톱밥과 온갖 장난감, 미끄럼틀, 쳇바퀴…….
호화롭다.
내 생애 이렇게 공들인 햄스터 집은 처음 본다. 게다가 테두리마다 새긴 장식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짝이고 있었다.
‘……지금 햄스터 집에 금을 박아 넣은 건가?’
현관문을 열면 맞은편 창문이 깨질 것 같은 좁디좁은 원룸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살아 보는 3층 집에 정신이 혼미할 지경이었다. 물론, 햄스터 기준이지만.
[대공작은 제국에서 세 번째로 부유한 귀족입니다.]
그래 보인다. 고작 햄스터 한 마리 키우는 데 이런 집을 만들었단 건 어지간히 부유하거나 햄스터에 미쳐 있어야 하는데……. 아무래도 부유한 미친놈인 것 같다.
“어쨌든, 쉬는 게 좋겠군. 내일 인사하러 오마.”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그를 쳐다보지는 않았다. 사람 말을 재깍재깍 알아듣는 햄스터는 너무 수상하잖아. 살처분은 사양이다.
나는 구석에 처박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가라, 가. 가서 잠이나 자라.
“캐슈넛.”
―…….
“좋은 꿈 꿔라.”
‘좋은 꿈은 개뿔.’
나한테는 이 상황이 그저 악몽이라고.
*
망할 햄스터 사랑꾼이 침실로 돌아가고 난 뒤에야 겨우 평화가 찾아왔다.
자, 그럼 진한 면담을 해 보실까.
야, 나와.
[〣(ºΔº)〣]
여기가 <겨울의 심장> 속이라고?
[네. 맞아요! (*>▽<)ノシ]
그리고 저 남자는 소설 중반부도 되기 전에 죽는, 블레이크 대공작이고.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예상 사망 시간으로부터 약 1개월 남았습니다.]
이거 빙의물 아니었어? 여주인공이…….
[세레나입니다.]
시스템 창에 세레나의 이름과 얼굴이 떠올랐다.
차분한 갈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의 여인이었다.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얼굴이었는데, 차림이 상당히 꾀죄죄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의 세레나는 빙의 후, 특유의 영민함과 처세술로 빈민가를 벗어났다고 했던가.
하여 그전까지는 이름조차 없었다. 세레나는 황후에게만 대대로 내려오는 이름이니, 황후가 아닌 지금은 이름도 모를 여자인 거다.
잠깐만. 근데, 빙의는 내가 했잖아?
한 작품에 두 명이 빙의할 수 있는 건가?
[세레나는 빙의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빙의자의 정체가 바뀌었습니다.]
[기적 수치, 현재 1%]
나는 흔들의자에 걸터앉은 채 심각한 표정으로 시스템 창을 바라보았다. 물론, 짧은 다리는 꼬아지지 않아서 작은 손으로 턱 밑을 문지르기만 했다.
‘아까부터 쭉 신경 쓰였던 건데, ‘기적 수치’가 대체 뭐야?’
[당신은 죽을 운명입니다.]
얄미운 이모티콘이 뚝 떨어진 채, 떠오른 한 문장이 오싹하리만큼 파랗게 빛났다.
‘……죽을 운명.’
새삼 떠올랐다. 마지막에 나를 덮치던 전조등의 창백한 불빛, 바퀴가 바닥을 긁으며 내는 마찰음, 떠오르던 몸…….
[하지만 완전히 죽기 전! 바로 제가 개입했어요!]
멍해진 내게 시스템이 부지런히 말을 붙였다.
[당신의 원래 육체는 지금 혼수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영혼의 운명을 바꾸지 않는다면 다가올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뇌 내 정보를 수집, 살아남을 수 있는 최적의 자료를 모색합니다. 목표를 설정하면 맞춤 퀘스트를 송출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인즉.
[기적 수치를 올려 보세요. 당신을 죽음으로부터 구해 드릴게요!]
나를 살려 주겠다는 말인데.
네가 왜? 신이라도 돼?
[기적을 일으킬 정도는 되지요!]
입은…… 아니, 시스템 창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자. 기적 수치는 내가 발로 뛰면서 모으는 건데, 재주는 햄스터가 넘고 돈은 시스템이 버는 소리잖아. 양심 있냐?
[อิ_อี;]
이젠 돈을 벌다 벌다 못해서 기적까지 벌라고 해? 내가 모세냐? 어? 모세야? 바다라도 갈라 드려요?
내 정산금. 창창하게 펼쳐진 미래. 그리고 내 인생과 인권까지 전부 다 되찾아야 한다. 결단코 햄스터로 늙어 죽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작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이미 햄스터가 되어 버린 마당에 다른 방법은 없었다.
[목표를 설정하시겠어요?]
기적, 그리고 목표.
그러니까, 시스템의 요지는 <겨울의 심장> 속 세계의 운명을 바꾸어 그 힘을 모은 뒤 내 운명을 바꾸라는 거였다.
세레나 대신 내가 햄스터에 빙의했더니 기적 수치가 올랐다. 그런 식으로 원래대로라면 일어나지 않았을 사건을 일으킨다면 또 수치가 오르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바로 내가 이 소설의 중간 하차자라는 점이다. 가장 공감하고 연민했던 등장인물이 죽자마자 책을 덮어 버렸으니까.
그러니, 나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모른다. 누가 죽고 사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그 운명을 바꾸…… 잠깐만.
‘카일!’
그래,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 그 남자가 한 달 뒤에 죽는다.
‘만약 카일을 살린다면?’
죽음을 번복하는 것만큼 대단한 기적은 없다.
그래. 어차피 좋으나 싫으나 카일은 내 주인이 되었고, 독자였을 때도 저 녀석이 비참하게 죽는 건 싫었다.
내가 중간 하차자가 된 원인. 사랑하는 여인의 손에 죽으면서까지, 그 여자의 안위를 걱정하던 남자.
‘이봐, 카일을 살리는 건 어때? 이것도 나름대로 기적이잖아.’
[목표 설정 완료 : 카일 제인 마인하르트를 살려내기.]
[퀘스트 선정 중…….]
이상한 기분이었다.
죽을 녀석을 살려내면 나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세상에 이런 일이 가능하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이미 햄스터가 되었다는 점에서 모든 전개가 황당해진 상황이니 의미가 없었다.
갈 길이 구만리겠지만, 어디 한번 치열하게 살아남아 보자. 너도, 나도.
일단 난도에 맞는 퀘스트부터 주시죠, 시스템 씨. 지금 이 몸뚱이로는 아무것도 못 하잖아. 기껏해야 반려 북부대공의 삶의 만족도나 좀 올려 주다가 5년도 채 못 살고, 삭신이 쑤셔서 쳇바퀴도 못 타겠지.
몇 분의 침묵 끝에, 시스템이 첫 퀘스트를 내밀었다.
[인간적인 햄스터가 되어 보자! (ง˙∇˙)ว]
허공에 작은 손을 휙휙 내젓자, 다음 내용이 이어졌다.
[인간의 좋은 친구, 따뜻한 반려 햄스터가 되어 보아요!]
[보상 : 작은 기적, 인간성을 살릴 기회]
‘인간적인 햄스터가 되는 게 왜 기적이야. 원래 키우던 햄스터가 나쁜 녀석이었던 모양이지?’
[´•̥︿•̥`)⁾⁾]
진짜냐…….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네.
[카일은 피가 방울방울 배어 나오는 손가락을 내려다보았다. 아직 어린 마수였지만, 그 척박한 북부의 생명이었다. 쉽게 길들일 수 없는 게 당연했다. 그의 차갑고 단단한 얼굴에 희미한 실망감이 떠올랐다.]
원작의 내용으로 추정되는 문장이 가지런히 떠올랐다.
‘……저런 내용이 있었던가.’
그보다, 원래도 마수를 키우려고 했나?
하긴, 북부는 사람이 살 만한 땅이 아니다. 마수를 밀어내고 터전을 일궜다고 해도, 손에 잡히는 모든 마수를 죽일 수는 없을 테지.
인간 친화적인 마수도 있었을 거고, 그중 귀여운 개체는 키우고 싶은 마음도 들었을 것이다. 꼭 반려 마수가 아니더라도 상생을 희망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니까.
[“그러게, 그냥 두고 오시지 그러셨습니까?”
기사의 말에 카일이 대꾸했다.
“그럼 그대로 죽게 두란 말이냐.”]
‘죽을 녀석에게 손을 뻗은 건 카일이 먼저였구나.’
……그래, 뭐. 봐준다. 다 같이 먹고살자고 하는 짓이니까. 날 거꾸로 잡아 흔드는 것만 아니라면야, 나도 굳이 녀석을 깨물 필요가 없지.
뭣보다 나는 햄스터가 아니라 인간이다. 아무거나 깨무는 야만적인 짓 같은 건 하지 않는다고.
[(ʃƪ˘³˘)(´ε`ʃƪ) ?]
아니, 그래도 뽀뽀는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
심드렁하게 눕는데, 카일이 아까 보여 줬던 다정한 미소가 자꾸만 떠올랐다.
‘그렇게 동물을 좋아했나?’
피도 눈물도 없는 북부대공 캐릭터에 안 어울리신다고요. 기사들이 보면 놀라서 뒤로 넘어가겠다. 카일의 거죽을 쓴 마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고…….
생각을 흘러가는 대로 두었더니, 언제인지도 모르게 까무룩 잠들었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으니까, 기절하듯 잠이 든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그렇게 얼마나 잠들었을까? 눈을 뜨고 나니 이튿날 점심이었다. ……아니, 점심? 오후?
[햄스터의 수면 시간은 평균 13~14시간입니다!]
기다렸다는 듯이 떠오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나는 콩알 같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대충 열세 시간 정도 모로 누워 잤더니 한쪽 면의 털만 납작하게 눌려 있었다.
어떻게 정리라도 해 보려던 찰나였다. 내 몸집의 수십 배쯤 되는 커다란 문이 끼익, 하고 열렸다. 물론, 노크 없이 이 방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은…….
“캐슈넛.”
그 남자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