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99화 (99/100)

99화.

한국으로 돌아온 우리는 거의 분 단위로 쪼개진 일정표를 맞이했다. 우승을 기념해 언론 인터뷰를 비롯해 TV 방송, 인터넷방송 가리지 않고 여기저기 얼굴을 비춰야 했다.

“와, 저기 보여요?”

준이 가리킨 곳을 올려다보자 대형 전광판에 제현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들어가 있었다. 우리가 단체로 찍은 광고도 인터넷이나 TV에서 활발하게 나오고 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제현의 얼굴은 길거리에서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었다.

“잘생겼네.”

“형, 여기 실물 있어요. 실물 봐요.”

저 자신인데도 어김없이 질투하는 모습에 괜히 장난기가 생겼다.

“글쎄, 너는 사진발이 잘 받아서 저쪽이 더 잘생겼는걸…….”

“그건 맞지.”

“……동형까지 그러시는 거예요?”

제현이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하다 내 허벅지에 얼굴을 묻었다. 우리도 충분히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지만, 제현은 마스크가 남다르다 보니 우리보다 훨씬 많은 오퍼가 들어와 더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었다.

“조금 푸석푸석해졌네.”

아무리 지치지 않는 체력의 제현이라도 강행군에는 어쩔 수 없었는지 얼굴이 좀 상했다. 내 혼잣말에 울상을 지으며 올려다보는 모습은 완벽하게 귀여웠지만 말이다.

“진짜요?”

“어, 아니야. 예뻐, 예뻐.”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더 파고드는 게 잠깐 눈을 붙일 작정인 것 같았다.

‘이대로 제현이 데리고 도망쳐서 게임이나 하고 싶다…….’

프로게이머가 게임만 잘하면 되는 시대는 이미 지나간 지 오래였다. 심신의 안정을 위해 제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허망한 얼굴로 창밖을 보고 있자 동진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다음 주부터 휴가니까 조금만 더 힘내자.”

“그래야죠.”

“눈 감았다 뜨면 연말이겠네……. 그래도 벌 수 있을 때 벌어야지.”

결혼을 앞둔 동진이 제법 가장 같은 소리를 했다.

***

개인 인터뷰 하나를 끝내고 나오는데 누가 갑자기 날 어깨에 들쳐 멨다. 사람이 너무 놀라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날 들어 올린 상대의 옷을 쥐어뜯다가 등판에 쓰인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J O K E R’

“황제현.”

“네.”

“뭐 해.”

“형 납치하려고요.”

바쁜 일정에 치이느라 같이 붙어 있는 시간은 이동 시간과 자는 시간밖에 없었던 터라 짐짝처럼 어깨에 둘러져서 옮겨지는데도 웃음이 실실 나왔다.

“어디 가려고.”

“음, 가면서 생각해야죠.”

제현이 주머니를 뒤적여 차 키를 누르자 딱 봐도 회사 차가 아닌 것 같은 차가 삑삑 소리를 냈다.

“차 샀어?”

“빌린 거예요. 형, 생각보다 차는 바로바로 출고되는 상품이 아니에요.”

“그래……?”

제현이 안전벨트를 채워 주며 씩 웃었다.

“안 샀다는 건 아니고요. 내년쯤엔 나올걸요.”

“동형도 아직 차가 없는데…….”

“그 형은 면허부터 빨리 장만하셔야죠.”

회사 차보다 확연하게 부드러운 소리를 내며 차가 출발했다. 나야 이 인터뷰가 마지막 일정이었다지만 제현은 나보다 일정이 하나 더 많은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도망이라도 친 건가 싶었다.

“그냥 일정 하나 펑크 나서 형보다 일찍 끝나서 납치하러 온 거니까 무슨 탈주한 사람 보듯이 보지 않으셔도 되거든요.”

화려하게 운전대를 돌려 건물을 빠져나가느라 나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내 생각은 기막히게 파악하고 있었다. 무슨 독심술이라도…….

“어디서 독심술이라도 배워왔냐는 생각하고 계시나요?”

“…….”

“그건 아니고, 형이 저랑 게임을 할 때 제 위치 기막히게 알아내는 거랑 비슷하지 않을까요.”

“넌 나 적으로 만나도 못 찾잖아.”

“그건…… 또 다른 얘기죠.”

점심부터 우중충하더니 지금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내일부터 기온이 쭉 내려간다고 하니 겨울이 훌쩍 다가오고 있었다. 눈 감았다 뜨면 연말일 거라는 동진의 말이 맞았다.

“……그보다 윈터 시즌 개막전이 먼저려나.”

턱을 괴고 중얼거리자 제현이 운전대를 가볍게 팍 쳤다.

“그래요. 그게 문제라고요.”

“?”

“형이랑 합 맞춘 지도 이제 곧 1년을 꽉 채우는데 제대로 쉬어 본 적이 없잖아요.”

“어, 그렇지…….”

“형한테 받아 낼 것도 있고요.”

무슨 채권자 같은 대사를 하며 능글맞게 웃는 제현을 보자 불현듯 서머 시즌이 끝나고 제현에게 한도가 없는 소원권을 준 기억이 났다. 슬쩍 창가로 몸을 붙여 제현과 거리를 벌리자 제현이 핸들에 얼굴을 기대며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왜요. 제가 형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그래요?”

“이미 잘근잘근 씹어 드신 사람이 할 말인가?”

“크흠…….”

제현이 어색하게 헛기침했다. 그도 그럴 게 제현이 지난번에 파리에서 아주 제대로 나를 물고 뜯고 맛보신 흔적이 아직도 몸에 남아 있었다.

“이거 봐. 이건 아마 없어지려면 몇 달 걸릴걸.”

티셔츠를 걷어 올려 아직도 잇자국이 선명한 가슴 쪽을 보여 주자 제현이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서는 고개를 돌리며 팔만 뻗어 티셔츠를 내려주었다.

“저 운, 운전…… 운전하니까 위험한 짓은…… 자제 부탁드릴게요.”

“너는 치열이 고르니까 자국도 예쁘게 남더라.”

“죄송해요……. 그건 진짜 할 말이 없어요. 하, 제가, 제가 죄송합니다.”

속사포로 사과를 주절거리며 운전에 집중하는 모습에 실실 웃었다.

“그래서 어디 가는데?”

“가면서 정하자고는 했는데 사실 저희 갈 곳이 마땅찮잖아요.”

숙소와 경기장만 오가는 신세다 보니 갈 곳이 없었다.

“내 빌라?”

“쯧.”

일단은 내 명의의 집이라 아무 때나 갈 수 있는 곳이기에 한 번 불러 봤더니 제현이 혀를 찼다.

“어쭈.”

“아, 죄송해요. 본능적으로 그만. 알아서 모실 테니 그냥 마음 놓고 계세요.”

제현이 차를 세운 곳은 서울 근교의 아파트였다. 호텔이나 모텔 따위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번듯한 아파트에 입이 쩍 벌어졌다.

“집도 샀어?”

“음, 제 명의는 아니고 형이랑 저랑 잠깐 같이 살았던 집인데 지금은 비어 있어요.”

“어, 어.”

남자 둘이 살았다고 하기엔 너무나 깔끔한 인테리어에 한 번 더 놀랐다.

“오늘 특별히 여기로 모신 이유가 따로 있거든요…….”

제현이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어가더니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실례하겠습니다…….”

집주인은 벌써 방으로 들어가 버린 바람에 어색하게 허공에다 인사를 하고 슬금슬금 방으로 따라가 보니 제현이 거의 옷장에 들어갈 기세로 뒤적거리고 있었다.

“뭔데.”

“형이 제 소원 들어주시기로 하셨잖아요.”

찾던 것을 발견했는지 옷장에서 빠져나와 눈앞에 들이민 것을 보고 당황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하……?”

“뭐든지 들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본인 입으로.”

“그래서, 이걸…… 입으라고? 내가?”

“네.”

‘황제현’

명찰에 이름 석 자가 선명하게 박혀있는 검은색 ‘교복’이었다.

“그…… 소원권을 이거보다 좀 더 알차게 쓸 수 있지 않을까?”

슬슬 뒷걸음질 치자 제현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형, 생각해 보세요. 제가 형 고등학생 시절 때부터 팬이었는데 형 교복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못 봤단 말이에요.”

“그야 이미 자퇴하고 프로 데뷔한 거니까…….”

“제가 형 사이즈로 새로 살까도 생각을 해 봤는데 제 교복을 입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더라고요. 어차피 기성복은 형한테 다 크니까 수선 맡겨야 하고.”

“그렇지…….”

“제가 볼 때 형은 대놓고 야한 거 입힐 때보다 이런 평범한 옷이 저를 더 미치게 만든다니까요. 교복에 남친 셔츠는 덤이라고요. 제가 이보다 알차게 소원권을 쓸 수 있을 거 같아요? 저는 못 한다고 봅니다.”

빠르게 어필하며 자기 교복에 손짓하는 모습이 거의 홈쇼핑 쇼호스트 같았다. 내용은 거의 뭐 오타쿠에 가까웠지만. 제현이 저렇게 오타쿠처럼 굴 때마다 얼마나 낯선지 모르겠다.

“진짜 입어?”

“그러면 가짜로 입어요?”

진심 100% 상태인 것을 보니 내가 저걸 입어야 마무리될 것 같았다. 한숨을 푹 쉬고 티셔츠를 벗어젖혔다. 제현이 내 티셔츠를 받아 들면서 얼굴을 붉혔다.

“너도 취향이 참…… 이런 말라빠진 몸이 뭐 볼 게 있다고 맨날 그렇게 얼굴을 붉히냐.”

“형이 몰라서 그러지, 형 지금 진짜…… 저 지금 코피 안 터진 게 용한 거라고요.”

내게 교복 셔츠를 건네주고 내 티셔츠를 소중하게 끌어안은 채 커다란 체구를 웅크렸다.

내 몸의 거의 두 배만 한 셔츠를 걸치고 바지를 내리자 제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틈새 사이로 나를 보는 게, 마치 내가 스트립쇼라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좋아?”

제현이 멋모르는 소년처럼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고개만 열심히 끄덕거렸다. 바지가 걸린 발을 제현에게 내밀자 제현이 침을 꿀꺽 삼키더니 떨리는 손으로 받아 들었다.

‘팬티도 벗을 뻔했네…….’

스트립쇼 하는 기분에 너무 취한 탓이었다. 단추를 잠그고 있으려니 제현이 바지를 들고 와 입혀 주었다. 셔츠는 어떻게든 걸친다고 쳐도 바지는 너무 커서 아예 붙들고 있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내릴 정도라 제현이 벨트를 가져왔다.

“제가 입어 달라고 해 놓고…… 바로 벗기고 싶으면 안 되겠죠.”

욕망이 들끓는 눈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나도 그냥 벗어던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으나 이런 제현을 놀리는 재미도 놓칠 수 없어 마저 단추를 잠갔다. 벨트를 제일 안쪽 구멍에 넣었는데도 아직도 헐렁해 자꾸만 바지가 내려갔다.

“살을 좀 찌워야겠어요. 프랑스 출장 한 번에 그간의 제 노력이 다 물거품이 되어 버릴 줄이야.”

“윈터 시즌 끝나고 아마 올스타전 할 텐데.”

“그거 싱가포르에서 개최 예정이지 않아요? 한국팀 버퍼는 무조건 형일 텐데 망했네…….”

매년 각국의 선수들을 팀과 상관없이 인기 투표로 국가 대표를 뽑아 온갖 이벤트 전을 펼치는 일종의 축제였는데 나는 데뷔 이후로 감사하게도 매년 한국의 국가 대표 버퍼로 뽑혀서 끌려가고 있었다.

“프랑스보다는 낫지.”

“음, 그 전에 힘을 좀 내야겠어요.”

제현의 손이 내 허벅지를 꼼꼼하게 쓰다듬다가 올라와 넥타이를 조여 주었다. 조끼와 재킷도 마저 입었다. 셔츠도 그렇고 재킷 소매가 너무나 남아돌아 팔 길이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진짜 이런 걸로 되겠어?”

“최고예요.”

다 입은 김에 방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서자 어른 옷을 입은 6살짜리 꼬맹이가 된 것 같았다. 제현이 흡족한 얼굴로 지켜보다 핸드폰을 가져와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360도로 사진을 찍어 대기 시작했다.

“진짜 귀여워요.”

“…….”

이번엔 내가 부끄러운 타이밍인가 보다.

“이제 벗어도 돼?”

“벌써요? 안 되죠.”

“하…… 헉.”

아직도 셔터를 누르고 있는 제현에게서 벗어나려다 질질 끌리는 바짓단을 밟고 미끄러졌다. 방바닥과의 진한 입맞춤을 할 뻔했지만, 제현이 간신히 내 허리를 붙잡아 살았다.

“도대체가 안심을 못 하게 하신다니까요.”

“바지가 길어서 그래.”

넥타이도 불편해 제현에게 안긴 채로 넥타이를 조금 끌어 내렸다.

“형 지금 되게 양아치 같아요.”

“요즘 양아치들은 바짝 줄여 입지 않나?”

“그거랑은 다르게 뭐랄까…… 불량해 보인다고 해야 할까요.”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기며 웃었다.

“내가?”

학교를 밥 먹듯이 빼먹던 희대의 불량아 시절에도 공부 잘하게 생겼다는 소리는 들어 봤어도 양아치 같다는 소리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디 불량해져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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