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지나다니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지만 길거리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는 제현을 한참을 어르고 달래다가 호텔 방으로 돌아오자 둘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제현도 오늘 일에 충격이 컸는지 돌아오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잠깐만 울어도 눈이 퉁퉁 부어 못 볼 꼴이 되는데 제현은 그렇게 울고도 눈 밑이 붉어져 오히려 섹시했다.
‘내가 쟤를 포기하려 했다니……. 내가 미친놈이지.’
그것도 말 한마디로 펑펑 울렸으니 아주 때려죽일 미친놈이었다.
“날 한 대 때릴래?”
“예?”
죄책감이 들어 역시 한 대쯤은 맞아 줘야 페어플레이가 아닐까 싶어서 말한 건데 제현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지는 것을 보니 명확한 오답이었나 보다.
“혹시 맞는 게 좋아요?”
“누가 맞는 걸 좋아해…….”
제현이 얼굴에 ‘그럼 왜?’라는 질문이 적힌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너 마음고생시킨 대가를 치르려고? 이게 계산이 깔끔한 것 같아서?”
제현이 자기 이마를 내려쳤다.
“가끔 형 사고방식이 이렇게 단순 무식하고 박력 넘칠 때마다 제가 진짜 미치겠어요.”
“미안.”
“미안은 하세요?”
“……응.”
다 죽어 가는 내 대답에 제현이 내 턱을 감싸 쥐었다.
“깔끔하게 계산하자면서요.”
제현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목선이 드러난 모습이 어쩐지 선정적이었다. 눈앞에 보이는 제현은 정말 섹시하고 끝내 주지만, 막상 맞으려니 긴장되어 눈을 꼭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머리가 돌아갈 준비를 하고 이를 악물었다.
쪽.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맞닿았다가 떨어졌다.
“허.”
“제 기준으로 가장 깔끔한 계산은 역시 이거네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제 입술을 혀로 핥는 모습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네가 그렇게 앙큼하게 굴 때마다 미칠 것 같아.”
“미쳐 보세요. 어디까지 가나 보게.”
사람 혼을 쏙 빼 놓고는 싱그럽게 웃는 모습이 정말 요망하기 그지없었다. 제현을 보고 있자면 미인에게 미쳐서 나라를 말아먹은 왕들이 다 이해가 됐다.
‘네 앞에 나라고 국사고 무슨 소용이 있겠니.’
장난스럽게 웃는 침대로 끌고 와 눕혀 놓고 그 위에 겹쳐 누우며 내가 왕이 아닌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
어느새 제현의 손이 내 엉덩이를 제 것처럼 주무르고 있었다.
“흐으…….”
달뜬 목소리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제현이 야속하게도 강하게 주무르던 손길을 멈췄다.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어요?”
“뭐를?”
긴장 반, 기대 반의 상태로 되물었다. 제현의 눈빛이 진득하고 짙어졌다.
“형은 절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어요? 어리광이나 투정같이 귀여운 게 아니라도 절 받아 줄 수 있어요?”
오래간만에 내 도전 의식을 불태우는 말이 떨어졌다.
“해 봐.”
“도망가면 어떡해요. 저 형 없이 못 산다니까요.”
내 손바닥을 핥고 깨무는 모습이 영락없이 어린 강아지 같았다.
“내가 널 쥐고 흔들고 시험했던 것처럼 너도 날 좀 시험해 봐야 덜 억울하지.”
한쪽 입꼬리가 올라가는 게 느껴졌다. 양손으로 제현의 가슴을 콱 쥐고 제현의 귀에 속삭였다.
내 장난기를 자꾸만 이렇게 툭툭 기어 나오게 만드는 사람은 세상천지에 황제현이 유일할 듯싶었다.
“내가 널 어디까지 받아 줄 수 있을지 궁금하지 않아……?”
숨소리가 섞인 내 목소리가 풍기는 확연한 유혹에 제현의 숨이 거칠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 제현을 실오라기 하나 없이 벗겨 놓고 즐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맞닿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지만 그 전에 할 일이 하나 남았지.’
***
“사람이 정신을 못 차릴 만큼 혼미하게 유혹해 놓고 말이야…….”
누가 보면 성대한 파티라도 하는 줄 알 것처럼 술병들을 한 아름 껴안은 채 있으니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다 나왔다.
‘내 카드 줄 테니까 술 좀 사 와.’
‘예?’
‘너 어차피 맨정신이면 내 눈치나 살살 보면서 네 맘대로 못 할거잖아. 술 사 와.’
‘어…….’
‘너나 나나 술 어지간하게 마셔서는 정신 안 놓잖아. 센 거로 많이 사 와. 알겠지?’
내 여권까지 야무지게 챙겨서 뒷주머니에 넣어 주며 엉덩이를 톡톡 두들기는 손길을 즐기고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방 밖으로 떠밀려 있었다.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언젠가 찬희가 손짓, 턱짓 하나로 날 부려 먹을 수 있는 날만을 염원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오히려 이렇게 자기 맘대로 주물러 준다면야 영광이었다.
‘의외로 박력이 넘친다니까.’
진형에게만큼은 항상 늘 어딘가 무르게 굴던 사람이 오늘처럼 화낼 수도 있는 줄 몰랐다.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불경스럽게까지도 느껴질 정도였지만 솔직히…… 기분 좋았다.
씩 웃으며 우연히 호텔 로비를 둘러보다 눈에 들어온 흡연실 구석 자리에 앉아 있는 인영이 익숙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도 아는 얼굴이었다.
“뭐야……?”
흡연실에서 찬희와 진형이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정리와 계산은 깔끔한 게 좋다. 게임을 할 때도 마우스와 키보드, 장 패드, 모니터 각도까지도 정갈하게 나만의 규칙대로 정리가 되어 있어야 마음이 편안했다.
인간관계란 그와 달리 쉽지 않았다. 애초에 다른 사람과의 교류도 별로 없었지만, 그 몇 없는 관계조차도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또 사람이고 감정 아닌가.
“찬희야, 눈이 무섭다.”
눈앞에 앉아 있는 남자가 그중 제일이었다. 나에 대한 걱정이 가득 담긴 부드러운 눈은 이제 분노로 흐려져 그리 예뻐 보이지도 않았다. 머리카락을 만지려 들기에 마치 날벌레라도 쫓듯 쳐냈다. 상처받은 표정이 가관이었다.
“너 정말 나 쳐내려고 그래?”
“계속 그런 식으로 굴면.”
“그러지 말자…….”
이렇게까지 당황하는 얼굴은 또 처음이라 새로웠다. 우리 사이에 주도권은 늘 진형의 손에 있었는데 완전히 내 손 위에 떨어진 기분이 묘했다.
“형, 내가 부탁 좀 하자.”
“말해.”
“받아들여.”
“뭘?”
“형보다 제현이가 나한테 훨씬 중요하다는 거.”
“왜?”
전혀 이해하지 못한 진형의 얼굴에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뒤로 넘겼다. 하여간 사람한테 미움이라고는 살면서 받아 본 적이 없고 숨만 쉬어도 다 저 좋다고 달려드는 삶을 살아온 도련님한테 자신이 1순위가 아니라는 소리가 온전히 전해질 거로 생각한 내가 바보였다.
“찬희야, 내가 주제넘었다고 생각한다면 사과할게.”
“또 그런 식으로 넘어가려는 거잖아.”
그동안 저렇게 저자세로 나오며 ‘알겠다, 미안하다.’ 한 뒤에 짓는 불쌍한 얼굴에 얼마나 휘둘렸는지.
“도대체 나한테 왜 그래? 형 좋다고 울고불고할 때는 부담스러워하기 바빴잖아?”
“찬희야 나는…… 알잖아. 나는 연인 같은 거보다 길게 네 곁에 평생 있을 사람이니까.”
“하…….”
이토록 사람을 두들겨 패고 싶은 충동이 들었던 적이 있던가. 한숨을 쉬다 옆을 보니 뭔 보따리를 껴안은 채 망부석처럼 굳어서 이쪽을 보고 있는 커다란 강아지가 보였다. 열받는데 저 얼굴을 보니 한결 상쾌해지는 게 정말 만병통치약이 따로 없었다.
‘그래, 네가 내 피톤치드다. 졸라 상쾌하네.’
손가락으로 이리 오라고 부르자 멍한 표정을 하고 있으면서도 얌전히 걸음을 옮기는 모습에 가슴이 한구석이 찡했다. 흡연실로 들어온 제현을 보며 내 허벅지를 탁탁 두들겼다.
“……?”
“이리 와 앉아.”
내가 보던 중 가장 멍청한 표정으로 슬금슬금 다가온 제현이 내 옆에 앉으려는 걸 잡아끌어 내 허벅지 위에 앉혔다.
영문도 모른 채 짐까지 들고 있는 본인의 무게를 나에게 지우지 않기 위해 급기야 스쿼트 자세를 하게 된 제현의 몸이 단단하게 굳었다.
“있잖아. 생각해 보니까 형 잘못이 아니더라고. 제대로 소개를 안 한 내 잘못이지.”
“…….”
“인사해. 황제현, 내 남자 친구고, 내 딜러고, 나한테 형보다 중요한 사람이야.”
과시도 할 만큼 했으니 제현의 엉덩이를 토닥여 일어나게 하고 황망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진형에게 미리 챙겨 온 진형이 선물했던 향수병을 손에 쥐여 주었다.
“내가 그랬잖아. 어중간하게 굴지 말라고.”
***
엘리베이터에서 기묘한 침묵이 돌았다. 진짜 코피라도 터질 것 같아서 말도 못 하고 술병이 그득 담긴 봉지를 콱 쥐었다가 놓았다가 반복하고 있자 옆에서 찬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왜. 할 말 있으면 해.”
“형은…….”
껴안은 봉지가 부스럭거렸다. 진짜 무슨 누아르 영화 주인공인 줄 알았다. 찬희가 외형이나 체구가 여리여리하다 보니 예민한 미모사 같은 여린 사람이라고 자주 오해받는 부분이 있었는데 단언하건대 절대 아니었다. 몸이 버티지 못하고 앓아누울 뿐이지 자기 심기 한번 거슬렸다 하면 얼마나…….
“형은 진짜 섹시한 것 같아요…….”
아직도 여파가 남아 냉기가 철철 흐르던 눈이 내게 닿자 가볍게 휘어지더니 너털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모습에 녹아 흘러내릴 것 같았다.
“형은 어떻게 그렇게 쉽게 사람을 홀리세요?”
“지금 내 이야기 하는 거 맞아?”
“네.”
“그거 너나 그러지. 네가 특이케이스라니까.”
찬희는 나를 보며 씩 웃다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다시 무덤덤한 표정이 되어 먼저 내렸다. 어쩌면 뒷모습까지도 저렇게 내 마음에 쏙 드는지 의문이었다. 어쩌면 큐피드가 실수로 황금 화살을 화살통째로 나에게 쏟아부어 버린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나오면서 바라본 거울에 비친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찬희의 허벅지 위에 앉을 때부터 달아올랐던 것 같은데 아직도 이랬던 건가. 찬희가 나를 보면서 웃었던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
“…….”
제현이 잔을 비우면 채우고 비우면 다시 채우는 것을 반복하고 있었다. 나도 잘 취하지 않는 편인데 제현이는 차원이 달랐다. 그간의 회식 경험에서 볼 때 제현은 오만 술을 다 주워 마셔도 아주 정신을 놓을 정도로 취하지는 않았다.
오늘만큼은 나보다 제정신이 아니게 만들 생각이라 내가 한잔을 느릿하게 비우는 동안 줄기차게 먹이는 중이었다.
‘그래도 서머 시즌 우승하고 나서는 꽤 취했었지…….’
거기서 한 발짝 더 넘어간 제현이 궁금했다.
“다시는 술 안 마신다고 했었는데…….”
“그러고 보니 너 진짜 취하면 어떻게 돼?”
“그렇게까지 마셔 본 적…… 없어요…….”
말끝이 잔뜩 늘어지는 게 아무래도 슬슬 한계에 다다를 것 같았다. 생각보다 이른 타이밍이었다. 조금만 더 먹이면 될 것 같았다.
“응, 더 마셔.”
“몸…… 못 가누겠어요.”
“더 못 마시겠어?”
“음…….”
내 어깨 위에 얼굴을 기댄 제현의 입에 잔을 대주자 얌전히 받아마셨다.
“그만 마시고 싶으면…….”
갑자기 제현의 고개가 내 허벅지 위로 툭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