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96화 (96/100)

96화.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니 열두 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그간의 긴장이 모두 풀리니 먹고 자고 한껏 게으름을 피웠다.

준과 동진은 각각 에펠탑이니 루브르 박물관이니 공짜 유럽 관광을 놓치지 않겠다며 새벽같이 나가서 밤늦게 들어오고 있었지만 내 활동 반경은 호텔 방, 식당(호텔), 연습실(호텔), 헬스장(호텔)이 전부였다.

제현도 하루 이틀은 24시간 나와 찰떡같이 붙어 있는 것에 만족스러운 것 같았지만, 3일째가 되자 가끔 오랫동안 산책하러 못 나간 강아지 같은 표정을 했다.

“황제현.”

“네?”

“안 심심해? 너도 좀 나가 놀아.”

제현을 가만히 바라보며 말하자 제현이 내 배에 얼굴을 묻었다.

“하나도 안 심심해요. 형이랑 있을래요.”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제현의 성격상 지금 좀이 쑤시고 지루할 게 뻔한데 잘도 저렇게 대답했다. 이미 호텔에 머무르고 있는 거의 모든 선수, 관계자들과 호형호제하는 사이가 되어 여기저기서 제현을 찾기도 했다.

“너 얼마나 심심하면 이젠 호텔 직원분이랑도 막 얘기하더라.”

옆에서 뭐라고 영어로 대화하는 것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먼저 방으로 돌아온 기억이 났다. 그 여자분이 웃으니 눈이 부신 게 제현과 같은 과였다.

“예쁘시더라.”

“아, 그런 거 아니에요. 형 혹시 우리 형 기억나요?”

“어, 어.”

“프랑스에서 요리한다고 했잖아요. 저희 형 여자 친구예요.”

“음, 그래…….”

제현이 갑자기 눈에 빛을 내며 고개를 들었다.

“설마 질투해요?”

“무슨 질투야…….”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형밖에 몰라요.”

“누가 뭐랬냐.”

“누구 씨랑은 다르다고요.”

누구를 말하는 건지 말을 하지 않아도 누구인지 예상이 가서 허허 웃고 있으니 문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올 사람 없는데…….”

내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킬 필요도 없이 제현이 먼저 일어나 문을 열었다.

“아, 말 꺼내는 게 아니었는데…….”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을 확인한 제현의 표정이 잔뜩 구겨져 거의 얼굴로 욕하고 있었다.

“내 얘기하고 있었나 보네. 너 날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진형이 피식 웃으며 문 앞에서 떡하니 버티고 있던 제현을 비집고 방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

“일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만 오나. 너 보러 왔지.”

“볼일 없으면 가. 제현이 불편해해.”

얼른 보내고 편안한 마음으로 고스톱이든 마작이든 하려고 핸드폰을 집어 드는데 진형이 침대맡에 앉아 핸드폰을 뺏었다.

“너 나랑 거리 두자고 했지 아예 연 끊자고 한 건 아니잖아. 너 내가 싫어?”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싫은 게 아니면 내가 네 곁에 있는 것만으로 널 흔들기라도 해? 너희 관계에 내가 악영향이라도 끼쳐?”

“그게 아니고 제현이가…….”

진형이 고개를 아래로 푹 숙였다.

“어차피 며칠 뒤면 너랑 나랑 또 언제 만날지도 모르는데 정말 이래야 해?”

“…….”

진형의 눈꼬리가 축 처져서 저렇게 애처롭게 나를 보고 있으니 내가 마치 매몰차고 나쁜 사람이 된 것 같은 생각이 드는 찰나, 제현이 진형의 옷을 콱 쥐고 끌었다.

“당신, 나랑 얘기 좀 하자.”

“아, 그러니까 그 호칭 좀 어떻게 안 돼? 트라우마 생겼다니까.”

“…….”

제현이 빠드득 소리가 나게 이를 악무는 소리가 났다. 그저 둘이서 시선을 맞대고 있을 뿐인데 스파크가 튀는 것 같아 슬그머니 몸을 뒤로 빼고 심신의 안정을 위해 제현의 베개를 끌어안았다.

***

고래 싸움에 내 등이 터지더라도 그래도 역시 내가 가서 중간에 샌드백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방을 나선 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구석에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헛소리 그만하라고 했어.”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하나부터 열까지 상대한테 맞춰 주는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 맞아? 안 피곤해?”

“네가 뭘 안다고…….”

제현이 말을 끝마치기 전에 진형이 픽 비웃었다.

“맞아. 너희 사이도, 너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네가 무리하고 있는 건 알겠는데.”

제현의 얼굴이 확연하게 구겨졌다. 진형은 제현에게 멱살이 잡혀 있으면서도 시종일관 여유가 넘쳤다.

“찬희 옆의 너는 네가 맞아? 잘 생각해 봐. 속에서 곪고 있는 거 아닌지.”

“…….”

“내가 걱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언제까지 찬희 옆에서 버틸 수 있을지, 그리고 찬희가 상처받는 건 아닐지. 그 두 개야.”

제현에게도 말문이 막힐 말이긴 했지만, 나에게는 더 치명적인 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분노가 끓어올랐다. 주먹을 콱 쥐고 떨다가 결국 쾅 소리를 내며 벽을 내려쳤다.

“그걸 왜 형이 신경 써?”

둘 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 나를 돌아보았다.

“찬희야.”

“내 생각해서 그런 거다? 이딴 말 할 거면 하지 마. 열만 더 받으니까.”

“찬희야 나는…….”

“상처를 받아도 내가 원해서 받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나는 형처럼 살기 싫어.”

진형처럼 사람에게 진심이 되지 않으면 사람에게 상처받지도 않을 테지만 영원히 내 사람이라 부를 사람도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건 싫었다.

“다신 그런 소리 하지 마. 다시는 내 관계를 형이 정리하려 하지 마.”

“찬희야…….”

“나 주변에 사람 없는 거 알면서 있는 사람까지 내치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한 글자 한 글자 씹어 먹듯 내뱉자 굳어진 진형을 경고하듯 노려보다 옆에 멍한 얼굴로 서 있는 제현의 팔을 붙잡아 끌고 나섰다.

방 안에 처박혀 있어 봐야 열 뻗쳐서 벽에 주먹질이나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제현을 붙잡은 채로 호텔 앞 강가를 따라 걸었다.

어딜 보나 낯선 환경에 온 신경이 다 삐죽삐죽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좀 걸으니 분노가 약간은 사그라들었다.

“형, 괜찮아요?”

내가 한참을 씩씩대는 통에 말도 못 붙이더니, 이제 좀 진정한 것 같으니 슬쩍 물어보는 제현의 얼굴을 보자 괜히 또 미안했다.

‘사람 눈치나 보게 만들었네…….’

걱정이 가득 담긴 제현의 눈을 마주하자 가슴 한구석이 턱 막힌 것 같았다. 제현은 사람 자체가 온화하고 다정한 사람이었다. 다정함이 과했다. 과연 다정이라는 말을 과하다고도 할 수 있을까.

마치 어제같이 느껴지는 결승전 마지막 경기가 끝나고 제현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이제 아시겠죠. 형은 저랑 제일 잘 어울려요.’

벅찬 감동에 절어 그렇게나 기분 좋은 순간에도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던 이유를 지금은 절절하게 알 수 있었다.

다정함이 과하다기보다는 과분하다고 봐야 했다. 내게는 너무 과분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도망치고, 회피하고, 시험에 들게 했었다. 그리고 그 모든 행동이 제현을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였다.

피곤함이 몰려와 근처 벤치에 앉자 내 옆에 바싹 붙어 앉은 제현이 앉자마자 내 손부터 살폈다. 몰랐는데 붉게 부어올라 있었다.

“제발 몸 좀 아껴 주세요.”

따뜻하기 그지없는 눈이 내 손에 머물렀다. 3일 만에 호텔 밖으로 나온 참이었다.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길을 가다 말고 제현을 쳐다보고 갈 정도로 제현은 반짝반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 매번 이렇겠지.’

진형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었다. 제현은 나와 함께 있기 위해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황제현.”

“왜요.”

나는 아마 제현이 나를 놓기 전까지, 그가 이렇게 반짝거릴 때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사람인지 혹시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할 것이었다.

“우리 그냥 그만할까…….”

생각보다는 덤덤하게 나왔다. 제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한 번 올려다봤다가 다시 매만지고 있던 내 손으로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우리 해지기 전에는 들어가요. 바람이 생각보다 차가워요.”

“황제현.”

“왜요.”

못 들은 척하며 넘겨 버리려 하는가 싶어 날 만지던 손을 쳐냈다.

“왜 못 들은 척해.”

“왜요? 그 자식이 한 말 때문에 그래요?”

제현의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며 목소리도 손도 파르르 떨렸다.

“틀린 말은 아니야. 관계라는 게 일방적으로 주거나 받는 게 아니잖아. 나같이 모자란 사람도 그 정도는 알아.”

“그런 적 없어요.”

“내가 너한테 맞춘 적 있어? 네가 한 번이라도 내 상태 신경 쓰지 않고 네가 원하는 대로 한 적 있어?”

“…….”

“일방적인 거 맞잖아.”

내 말이 비수라도 되어 꽂힌 것처럼 고통스러운 얼굴을 했다.

“형 지금 권진형처럼 말하고 있는 거 알아요?”

“…….”

“마음대로 재단하고, 판단하고…….”

제현이 코웃음을 쳤다.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하나도 기분이 안 나쁘네요. 형이라서 그런가…… 하하, 그만하자는 말이 벌써 이번이 두 번째인 건 아세요?”

어딘가 허탈한 사람처럼 웃는 모습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형은 저를 너무 쉽게 포기해요.”

제현의 눈가에 물기가 어리더니 눈물 한 방울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제현이 웃음을 거두고 미간을 잔뜩 좁히더니 거칠게 손등으로 얼굴을 쓸었다.

나는 그 모습을 단 한 순간이라도 놓칠까 두려운 사람처럼 그저 열심히 눈에 담고 있었다.

“제가 그렇게 견디기 힘들어요?”

“아니야…….”

“알아요. 형 저 좋아하시잖아요. 저도 형이 좋아요. 형이 뭘 하거나 바뀔 필요 없이 형 자체가 좋아요. 저는 형을 좋아하는 저도 좋아요. 다 저 좋자고 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닦은 보람이 없게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에 제현의 얼굴이 젖어 들었다.

“얼마나 닿아요?”

“…….”

“저는 항상 100으로 형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데 얼마나 닿아요? 10? 20? 얼마나 말해야 충분해져요?”

“네가 부족한 게 아니야 내가 너한테 부족해…….”

“더 절박한 사람은 형이 아니고 저라고요!!!”

제현이 눈을 질끈 감고 소리를 질렀다. 내가 몸을 살짝 움찔거리자 큰 실수라도 저지를 사람처럼 손을 벌벌 떨었다.

“형은 저를 쉽게 포기하잖아요. 저는, 저는 그게 안 돼요. 그러니 제가, 제가 어떻게 할까요…….”

제현이 거의 속삭이듯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제가 형한테 일부러 상처라도 줄까요? 형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이라도 골라서 할까요? 그러면, 그러면 좀 절 받아 줄 마음이 드시겠어요……?”

제현의 말대로 한다고 해도 제현을 내 입맛에 맞추는 것이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살아도 평생을 살 사람이 나란 놈한테 뭐 아쉬울 게 있다고 저렇게 저자세로 아까운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까. 내가 받아만 준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하겠다고 애처롭게 말하는 건지. 눈물범벅인 제현을 보고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하나부터 열까지 상대한테 맞춰 주는 관계가 정상적인 관계 맞아?’

진형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려 있는 고갯짓을 해 떨쳐 냈다. 눈앞에서 울고 있는 제현이 중요하지 이딴 헛소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싫어요…….”

“뭐……?”

“형, 저 진짜 형이 시키는 건 다 할 수 있는데 일부러 형 상처 주는 일은 죽어도 못 하겠어요. 저 그러기 싫어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쉬며 푹 숙인 제현의 얼굴을 잡아 올렸다. 어쩌면 얘는 이렇게 엉망이 될 정도로 울어도 예쁘기만 했다.

“왜 울고 그래.”

“형이 울리신 거잖아요.”

“그래, 내가 나빴어.”

소매를 끌어당겨 제현의 얼굴을 닦아 주자 가만히 맡기면서도 눈에는 의심이 떠나지 않고 있었다.

“내가 잘못했어.”

“잘못했다고요?”

“응. 내가 그런 말을 하면 안 됐어.”

“아니, 형은 무슨 말이든 해도 돼요.”

내 손바닥을 붙잡아 자기의 뺨을 누르며 말하다 아차 싶었는지 말을 덧붙였다.

“저 버리신다는 말만 아니면 다 괜찮아요.”

제현의 이마에 내 이마를 맞댔다.

“나한테 일부러 상처 달라는 말이 아니야. 네가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고 싶지도 않아.”

“네.”

“난 너랑 서로 맞춰 나가고 싶어. 네가 일방적으로 나에게 끼워서 맞추는 게 아니라.”

“그럴게요. 아니, 우리 그렇게 해요.”

제현을 숭덩숭덩 잘라서 나라는 틀에 끼워 넣는 것이 아닌 온전한 제현을 품을 수 있도록 내 틀을 넓히고 싶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