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너 말 못 해? 브리핑 안 해? 그러셨잖아요.”
“허?”
“형이 지금 그때의 저처럼 구는 것 같아서요. 그때의 형 말을 좀 빌려봤어요. 왜 갑자기 그렇게 조심스럽게 구세요. 낯설어요.”
그때 생각이 나는지 제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낮게 웃었다.
“너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와?”
“그럼 울까요?”
제현의 말을 듣고 있자니 손이 자유로웠으면 아마 내 뺨을 한 번 더 시원하게 때렸을 것 같았다. 그래도 덕분에 뇌리에 깊게 박혀 자꾸만 답답하게 만들던 생각들을 뽑아낸 것 같아 시원해졌다.
“아, 이거 나가자니 죽을 것 같고 안에서 버티고 있자니 그대로 말라 죽을 것 같은데…….”
“아니요.”
동진의 말을 서둘러 끊어 냈다.
“이 게임 한 시간까지도 볼게요. 저 빼고 다 드러누우세요.”
내 KDA는 지금 0/3/4였다.
“이번 세트 저는 인간 시야 토템입니다.”
나름대로 비장하게 말했다. 쫄딱 망한 게임을 부흥시키는 것이야말로 나이츠의 진짜 재미 아닌가. 역전승만큼 짜릿한 것도 또 없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내가 죽어야 했다.
***
- 체크 메이트 또 잡힙니다!!! 기어이 10 데스를 채우는데요!!!
- 아……! 지금 체크 메이트 킬 골드가 겨우 15골드입니다!!! 체크 메이트 잡을 시간에 다른 걸 챙기는 게 더 나아요!!!
- 와중에 지금 맵이 압도적으로 밀리고 있는 팀답지 않게 훤하게 밝아서 체크 메이트를 제외하고는 이거 죽으려고 해도 죽기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 적 없는 곳에 모여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이득을 보면서 느리지만 성장하고 있습니다!!!
- 체크 메이트가 생각 없이 막 죽은 것도 아니거든요. 상대가 체크 메이트 목숨값보다 값진 투자를 해야만 체크 메이트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 역시 운영 명가 트릭스 게이밍! 엄청난 희생 플레이……! 그저 경이롭습니다!
레벨링이 하도 밀리고 있으니 부활도 빨랐다. 오히려 레벨링이 잘 되어 있었다면 더 힘들 뻔했다.
“제현아, 막템 언제 나와?”
“저 곧 나와요.”
내가 성장을 거의 못 한 상태라서 4:4 전면전을 벌이면 3:4로 싸우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나이츠가 머릿수에 장사 없는 게임이라지만 성장을 완전히 마친 제현이라면 3:4도 비등비등하게 끌고 갈 수 있을 것이라는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저 끝났어요.”
“저도 풀템 떴어요.”
“나는 하나 남긴 했는데 순탱이라 큰 차이 없어. 탱킹할 수 있다.”
비록 나는 비렁뱅이일지언정 무사히 후반으로 게임을 끌고 와 멋지게 성장한 우리 팀을 보자 감동적이었다.
“나 자식들 전부 한국대 보낸 부모의 마음을 알 것 같아.”
“엄마 사랑해요.”
준이 울먹이며 대답했다.
- 트릭스 게이밍이 결국 최후의 결전까지 끌고 오는 것에 성공합니다.
- 저는 이 게임 아무리 버텨 봐야 20분대에 끝날 줄 알았거든요!
- 벌써 40분대가 훌쩍 지나고 있습니다.
- 체크 메이트 레벨만 봐도 그간의 분투가 느껴집니다……!
- 양 팀 모두 위치 파악은 끝났고 아무래도 MVP 조합이 상대가 들어오는 걸 받아치는 게 좋은 조합이다 보니 간을 꽤 오래 보는데요.
- 말씀하시는 순간!!! 아아악!!!
제현이 회피기를 쓰자 상대 탱커가 제현에게 궁극기를 날렸다.
- 조커한테 들어가는 궁을 체크 메이트가 몸으로 막았습니다!!! 피가 한방에 닳으면서 죽겠는…… 어?
- 어라?
- 안 죽었어요?
“이걸 사네.”
- 기막힌 타이밍에 레벨업을 하면서!!! 체크 메이트! 살아서 궁극기를 박아 넣습니다! 기가 막힌 4인궁!!!
- 아하학! 레벨이 한참 뒤처져서 오히려 다행이었다고 해야 할까요?
- 조커 지금 화력 어마어마하거든요 한 대! 두 대!
[TGT Joker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TGT Joker 님의 더블킬]
[TGT Joker 님의 트리플킬]
[TGT Joker 님이 전장을 휩쓸고 있습니다.]
[TGT Joker 님이 적을 전멸시켰습니다!]
[전설적인 존재 TGT Joker 님]
- 결승전에서 레전더리를 띄우는 조커!
- 크으으 쭉쭉 밀고 나갑니다!
- 길고 긴 3세트의 승리를 결국 쟁취하는 트릭스 게이밍입니다! 세트 스코어 2:1!
***
3세트가 끝나자 급격하게 체력이 달리는 기분이 들었다.
“한 10년 늙은 것 같아.”
아까는 곧 죽어도 입에 뭘 넣으면 100% 확률로 체할 것 같더니 지금은 잘만 들어갔다. 제현이 과자 까는 기계라도 된 것처럼 까서 내 손에 넘겨주면 그대로 입에 들어갔다.
입 안에 들척지근한 느낌이 남는 것은 조금 역겨웠으나 과자를 위장에 쑤셔 넣으니 머리에 좀 피가 도는 것 같았다.
“그래도 10 데스를 하고 MVP 받은 건 나이츠 리그 역사상 형이 최초일걸요.”
“결승에서 레전더리를 먹고도 MVP 뺏긴 것도 네가 최초일걸.”
“찬희 형한테는 뺏겨도 괜찮아.”
열렬한 순애보가 느껴지는 발언에 준이 오만상을 지었다.
“다음 세트 찬희가 MVP 타면 MVP 상금 찬희가 먹겠는데.”
감독님이 수첩을 뒤적이며 말했다. 지금 MVP 포인트 단독 1위는 혼자 MVP를 싹싹 긁어먹었던 진형이었고 그 뒤로 4강전에서 MVP를 싹 쓸어 온 내가 바짝 뒤쫓고 있었다.
“다음 세트 찬희 형 몰아주죠?”
“흐응?”
제현의 소리에 지운과 감독님이 동시에 흥미롭다는 표정을 했다.
***
“진짜 정상까지 한 계단 남았다. 우리가 누구?”
“최강 삼각!!!”
“트라이앵글 가자!!!”
3세트가 워낙 긴 데다 고도의 집중력이 필요했다 보니 다들 지쳐 있었다. 그래도 구호라도 외치니 다들 조금씩 살아났다.
“재밌겠다.”
이번 세트 전략을 듣고 나자마자 어느 때보다 눈을 반짝이며 신나 있는 제현만큼은 평소와 똑같았다. 오히려 제일 좋아하는 산책을 한 번 더 나가는 강아지처럼 평소보다 신이 나 있었다.
남을 엿 먹이는 생각에 가득 차 있을 때조차 저렇게 밝게 빛날 수 있다니. 제현과 함께하며 드는 생각이라고는 역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었다.
“은근히 성격 나쁘다는 말이 맞는 것 같아.”
“제가요?”
너무나 충격받은 표정을 하는 모습에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아니야, 착해, 착하지…….”
내 말 한마디에 해맑게 방긋 웃으며 내 어깨 위에 머리를 얹었다. 제현은 내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게 지치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나도 모르게 제현의 머리 위에 손을 얹자 자기가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수동 쓰다듬을 받아 내는 제현이었다.
- 마지막 게임이 될 수도 있는 4세트가 막 시작되었습니다! 어떻게 보시나요?
- 벼랑 끝에 밀린 MVP의 선택은 정석 조합이었습니다. 사실 MVP의 승리 공식을 보자면 딜러의 교과서나 다름없는 킹 선수가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안정적으로 성장하는 것에 있었는데요.
- 1세트처럼 말이죠?
- 맞습니다! 이게 트릭스 게이밍 상대로는 조금 힘든 것 같네요.
- 하지만 이번 세트 조커의 픽이 조금 심심한 감은 없잖아 있어서 어떻게 흘러갈지는 지켜봐야겠습니다.
- 저희로서는 이대로 이겨서 당당하게 세계 최정상에 한국팀이 올라가 주면 더할 나위가 없겠습니다만 지켜보겠습니다!
이번 전략의 성공을 위해서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물었다.
“괜찮아요.”
마치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다 아는 것처럼 제현이 말했다.
“플랜 A가 망하면 플랜 B를 하면 돼요.”
“우리 플랜 B가 어딨어?”
“저요.”
“…….”
“결국은 제가 이겨요.”
누구 팀 딜러인지 정말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감탄하는 사이 온몸을 꽉 채우고 있던 두려움에 가깝던 공포감은 사라졌다.
- 와, 지금 체크 메이트 첫 아이템이 심상치 않은데요.
- 찬란한 독배를 들었어요?
▶ 찬란한 독배
마나 +300
마나 재생 +100%
지속 효과: 적군 처치 및 처치 관여 시 각각 1포인트 적립. 포인트 당 공격력 +10 상승 (최대 10포인트 / 사망 시 포인트 50% 차감)
- 저게 이름만 저런 게 아니라 정말 독배거든요!!!
- 상대에게 선사하는 독이냐, 자멸하는 독이냐의 차이가 있긴 하죠.
- 이야, 3세트에서는 10 데스 MVP를 거머쥐더니 이번에는 손에 독배를 들고 시작하는데요.
- 포인트가 올라갈 때마다 공격력 오르는 게 무시할 수 없거든요! 이거 노데스로 게임 끝내겠다는 거죠!!!
- 어쩐지 구리와 달링까지는 그렇다고 치더라도 조커까지 캐리력은 높지 않지만, 생존력이 좋은 픽으로 뽑았거든요. 여차하면 몸 대가면서 체크 메이트를 지키겠단 심산인 것 같습니다!
“와, 찬희 형 진짜 다 씹어 먹을 준비 완료.”
“대신 서포트 템 없고 시야 토템 살 돈도 없으니까 죽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해. 특히 김준, 황제현.”
“네!”
동진이야 상대가 과하게 투자하지 않는 이상에야 때려잡기 쉽지 않은 튼튼한 순탱이었으니 준과 제현만 조심하면 됐다.
최소한의 시야는 밝히겠지만 상대가 나이츠 리그 버퍼의 역사 와도 같은 카니발 선수였다. 거기다 딜러까지 시야 토템을 사 들고 오는 팀이니 진심으로 해도 밀렸는데 이번 세트 시야는 거의 주고 시작해야 했다.
“슬슬 돌아다니면서 킬 각 잡아야겠는데.”
“형! 저요, 저요!”
제현이 선생님의 이목을 끌고 싶은 유치원생처럼 외치며 자기 쪽에 지원 핑을 찍었다.
3세트처럼 초반 딜이 좋은 기사도 아닌데 딜 교환을 얼마나 잘한 건지 진형의 피가 반이 넘게 빠져 있었다.
“알았어, 갈게. 내가 그쪽으로 가는 거 알 수도 있으니까 한 번 붙잡고 있어 봐.”
“넵!”
하여간 잡아 놓으라고 했다고 거의 풀피에 가깝던 체력을 화끈하게 얻어맞아 쭉 빼 놓는 제현이었다. 아무리 최고의 어그로는 딸피라지만 그냥 랭킹전도 아니고 월드 시리즈, 그것도 결승에서 상대방에게 일부러 맞아 주는 미친놈이 우리 팀 딜러라니.
“너 그렇게 맞다가 죽으면 한국까지 수영해서 오라고 한다.”
“안 죽으면요? 내기하실래요?”
“무슨 내기는 내기야. 형 소리 한 번 더 듣고 싶어서 그래요, 제현이 형?”
“…….”
그냥 가볍게 장난친 건데 제현의 마우스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혹시나 저러다 진짜 죽는 것은 아닌가 걱정했는데 마우스를 거의 우그러뜨리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쥐고 있으면서도 진형의 스킬을 정확하게 피하고 있었다.
“형, 경기 중에 제 집중력을 흐리는 위험한 발언은…… 자제 부탁드립니다.”
“응…….”
이를 악물고 딱딱하게 말하는 모습에 조금 반성했다.
- 조커를 마무리하기 위해 쫓아가는 순간 뒤에서 체크 메이트가 킹을 덮칩니다!!!
- 퍼펙트한 퍼스트 킬!!!
- 찬란한 독배에 독이 들어차기 시작했는데요. 이게 또 한 번 쌓기 시작하면 쭉쭉 쌓이기로 유명한 아이템이거든요.
- MVP는 지금 발등에 불이 떨어졌죠. 체크 메이트 견제를 꾸준히 하지 않으면 독배를 받고 우승컵을 내주게 될 겁니다!
찬란한 독배 아이템의 포인트 스택을 풀로 채워 봤자 공격력 100이라 게임을 다 씹어 먹을 정도는 아니지만 타락한 월계관과 함께라면 잘 성장한 딜러들보다 데미지가 잘 나왔다.
- 체크 메이트 더블킬!!! 벌써 독배 포인트가 6점이라 슬슬 독기가 올라오는데요!
- 지금 조커가 때리는 것보다 체크 메이트가 때리는 게 더 아파요!!!
- 지금 귀환하면 타락한 월계관이 딱 나올 것 같은데 이거 MVP 큰일 났죠?
▶ 타락한 월계관
공격력 +80
재사용 시간 감소 +20%
지속 효과: 스킬 사용 시 본인의 체력을 5% 차감하고 피해량 10% 증가 (일정 체력 미만 시 체력 감소 없이 적용)
사용 효과: 2초간 무적상태가 됩니다. (재사용 시간 150초)
- 사실 월계관은 본인 피를 깎고 데미지를 올리는 거라서 양날의 검과 같은데…… 독배가 죽으면 여태 열심히 쌓은 포인트가 반절 날아간단 말이죠.
- 체크 메이트라서 할 수 있는 선택이 아닌가 싶습니다.
- 체크 메이트 3대 명대사가 생각나는데요! 다인 궁 쓰는 법은 적팀이 모여 있을 때 쓰면 된다! 논타게팅 스킬 맞추는 법은 그냥 쏘면 상대가 맞아 준다!
- 마지막은 그거죠. 예, 정말 제 가슴 깊숙이 새겼던 그 명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