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93화 (93/100)

93화.

“그렇게 좋아?”

“네.”

분주하게 마우스를 움직이면서도 칼같이 즉답하는 제현의 모습에 웃음이 다 나왔다.

- 성장? 그게 뭔데! 조커는 성장을 킬로 한다! 킹에게 또 한 번의 데스를 선사합니다! 이야 이번 세트 킹 플레이 시간이 데스 시간이랑 맞먹을 것 같은데요.

- 1세트에 군림하는 왕 같았던 킹이 지금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있습니다. KKL에서 명성을 떨치던 집요함을 한 번 맛봐라! 집요함의 끝을 보여 줍니다!

- 조커 선수가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이거 누가 막죠? 어떻게 막죠?

- 뭐든지 뚫는 창이 되어 버린 조커!!! 아, 탱커도 녹아요! 조커 앞에 장사 없습니다! 도망가야죠!

- 이거 1세트와 2세트의 양 팀 온도가 너무 달라서 제가 정신을 못 차리겠어요!!!

“아, 내가 먹을 것 좀 남겨!”

“죄송, 제가 다 먹었어요.”

“깨끗하게도 먹었네.”

이제 동진도 어느 정도 아이템이 갖춰져 드디어 활약할 순간이 왔는데 제현이 워낙 훌륭하게 성장을 마친 뒤라 딱히 뭘 보여 줄 기회가 없었다.

[나이츠 게시판] (나월) 결승 2세트ㅋㅋ

아니 나는 우리 동구리 형이 딜탱 픽하길래 조졌다 싶었는데 조커가 버스 운전대 잡아 버림ㅋㅋㅋㅋ

댓글 92개

ㅂㅂ : 오늘 조커 버스의 종착지는 우승입니다^^ 모두 벨트 꽉 매세요

ㅈㅈ : 밴픽 끝났을 때만 해도 나는 쟤네 지려고 작정한 줄 알았네ㅅㅂㅋㅋ 조커 아니었으면 조질 뻔

ㄴㄴ : 아나 초반부터 MVP가 집요하게 동구리 형만 몇 번 노린 줄 아냐? 경기 끝날 때까지 노데스로 이만하면 잘한 건데 왜 이렇게 머리채 잡고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 난 애들이 많음?

└ㅋㅋ : 삼각이들 까빠 많은 걸로 유명하잖아

ㅇㅇ : 서머 시즌 결승처럼 패패승승승 빌드업하려고 픽한 줄 알았는데 이겨서 실망

└ㅅㅅ : 이겨서 실망은 또 뭔데ㅋㅋㅋㅋ

- 2세트 MVP…… 조커 선수입니다!

- 이야, 혼자서 게임을 만들었다고 봐도 무방했습니다. 이 게임은 내가 집도한다는 의지가 보였죠.

- 후반부에 구리 선수도 어떻게든 뭔가 보여 주려고 하는데 성장을 마치고 보니 조커, 조커 선수가 이미 신이 되어 있었습니다!

- 킹을 3연속으로 잡은 순간 이미 게임은 끝났었죠!

“무슨 생각 해요?”

VCR 영상이 나오는 동안 물을 마시며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었더니 제현이 얼굴을 불쑥 들이밀었다.

“얼굴 좀 그렇게 가까이 들이밀지 마. 너는 네 얼굴의 파괴력을 좀 알아야 해.”

“왜요. 심장에 안 좋아요?”

“어.”

제현이 농담으로 한 말에 내가 뇌를 거치지 않고 척추에서 나온 것같이 빠르게 대답하자 머쓱하게 웃는데 그게 또 그렇게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생각했냐니까요.”

“…….”

쓸데없이 너무 과하게 잘생긴 제현을 보며 2세트를 머릿속으로 복기하고 있었다.

1세트는 내가 너무 생각이 많았고 그러느라 제현도 덩달아서 움츠러들어 게임이 전체적으로 말렸었다.

반면에 2세트는 제현을 거의 방임하다시피 풀어놓았는데 게임이 잘 풀린 것이 마음에 걸렸다.

‘혹시 내가 제현을 억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머리를 관통하는 질문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그도 그럴 게 제현은 버퍼 출신인 만큼 딜러치고는 시야가 넓었고 상황 파악도 빨랐다.

판단 자체가 너무 무리하는 경향은 있어도 그게 다 자기 피지컬에 대한 자신감에서 나오는 거라서 결과가 내 예상과는 반대로 흘러갈 때도 잦았다.

“동진아, 딜탱 할 만하냐?”

“감독님 저 피 말려 죽겠어요.”

“그러면 다시 순탱으로 갈까? 그러면 제현이가 조금 더 극단적인 픽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뭐 제현이 대답은 정해져 있을 것 같고. 차니차니, 어떻게 생각해?”

지운의 질문을 듣지 못하고 생각에 잠겨 있으니 지운이 내 코앞에서 손가락을 딱딱 튕겼다.

“서찬희, 오늘 왜 이렇게 집중을 못 하지?”

“아, 죄송해요…….”

“제현아, 너 뭐 없냐? 찬희 당 떨어진 것 같은데.”

“있어요, 있어요.”

지운이 주머니를 뒤적거리다가 제현에게 묻자 당연한 듯 제현의 주머니에서 내가 당 떨어질 때 생각 없이 주워 먹는 오트밀 과자며 초콜릿이 쏟아졌다.

아직 뭐 먹을 생각이 없는데 단 것들을 보자 속이 안 좋아져 얼굴을 찡그리자 대기실 안의 모든 사람이 긴장하며 내 눈치를 봤다.

“어디 안 좋아요? 아니, 아픈 얼굴은 아닌데…….”

“그런 거 아니야.”

열이 있는가 확인하려는지 이마에 손을 얹기에 고개를 흔들어 떨구어 냈다.

“정말 아픈 거 아니야.”

의심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 제현의 집요한 눈초리에 눈앞에 있는 과자를 하나 까서 입에 넣으려다 괜히 억지로 먹었다가 진짜 체하기라도 하면 곤란해 그대로 제현의 입에 넣어 주었다.

“진짜 괜찮은 거죠?”

“어, 어.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

더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머리를 환기해야 했다. 하도 주물럭거려 물렁물렁해진 핫팩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새 핫팩을 뜯었다.

3세트 시작을 앞두고 다른 생각을 하려 노력했지만 내가 오히려 제현의 억제기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정신 차려, 서찬희.’

짜악.

내가 양 뺨을 강하게 내려친 소리가 생각보다 커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다 들린 모양이었다.

“헐…….”

자기도 2세트 시작 전에 했던 짓이면서 준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린 채 나를 보고 있었다.

“형…… 볼, 볼이…….”

제현은 한 손으로 입을 막고 경악하고 있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다들 유난이었다.

“집중 좀 하려고 그랬어.”

“형도 좀 형의 파급력에 대해 아셔야 해요.”

제현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가락 틈새로 나를 흘깃거리며 웅얼거렸다.

- 하하하, 화끈하게 준비하는 체크 메이트 선수의 모습에 전 세계가 깜짝 놀랐네요!

- 체크 메이트가 자기 뺨을 때리는 모습이 스크린에 뜨자 관중석에서 동시에 모두가 경악하는 소리가 나던데요?

- 아무래도 최근 계속해서 부상에 컨디션 난조에 일이 많다 보니 해외에서는 프레자일(Fragile) 체크 메이트라는 애칭 아닌 애칭도 붙지 않았습니까. 그런 선수가 저런 터프한 모습을 보여 주니 놀랄 만도 하죠!

- 저도 놀랐는걸요! 그 뭐라 그러죠? 볼 터치라도 받고 온 사람처럼 발그레해진 모습이 귀엽네요.

- 하하! 블러셔라고 하죠? 워낙 피부가 하얀 편인 선수라서 잘 보이네요.

- 2세트 기세를 이어서 3세트도 이겨야죠! 최근에는 조금 명성이 흐릿해졌다고는 하나 트릭스 게이밍하면 사실 경기 빠르게 끝내기로 유명한 팀 아니겠습니까!

- 1세트 이긴 팀이 우승한다는 확률 뒤집어엎어 줘야죠!!!

[기타/방송인/스트리머 게시판] (화페) 나이츠 월드 시리즈 보는데

(지운 스크린샷)

(찬희 스크린샷)

아니 나 나이츠 게임이고 리그고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우리 백 코치 정장 입은 거 보려고 틀었거든 근데 이 친구 뭐야? 이 예민 두부 강아지 뭐야?

댓글 35개

ㅅㅅ : 두부가 예민할 수도 있냐고ㅋㅋㅋㅋ

ㅇㅇ : 예 민 두 부 ㄴㅇㄱ 생전 처음 들어보는 단어

ㅋㅋ : 아 조커 나올 줄 알았는데 갑자기 쳌메 나와서 빵 터졌네ㅋㅋㅋㅋㅋ 삼각이들 입덕문은 우리 쪼커 아니었나?

└ㅂㅂ : 아니 조커 잘생긴 건 알고 있었거든 근데 쟤가 갑자기 자기 뺨을 치는데 볼 빨개져서 눈 부릅뜨고 있는데 내 안의 짐승이 깨어남;

└└ㅋㅋ : 저번 세트에 이쪽 분도 자기 얼굴을 때리셨는데요 공식 귀요미 달링은 어떠신가요?

(준이 자기 얼굴을 철썩철썩 때리는 gif)

└└└ㅂㅂ : 어…… 응 귀엽네ㅋ

└└└└ㅇㅇ : 이 선생님 취향 확실하시네? 달링은 취향이 아니신 거로ㅋㅋㅋ

ㅈㅈ : 삼각이들 유입 들어오냐?! 나이츠 현 랭킹 1위 체크 메이트 세계 최강 버퍼 입덕 환영합니다ㅎ!!!

└ㅂㅂ : 아 화페가 백날 나이츠 해 보라 그래도 안 했는데, 와;; 이거 게임도 할 만해?

└└ㅈㅈ : 채팅창 전체 차단하는 명령어가 /mute all 이거거든? 이거만 알고 가면 할만해ㅋㅋ 선생님 나이츠 다운로드는 이쪽입니다^^7 ▶링크◀

- 2세트 밴픽 어떻게 보시나요?

- 트릭스 게이밍은 여전히 강력한 딜러를 중심으로 서포팅하는 조합을 짰고 MVP는 지난 2세트에 한계를 조금 느꼈나요? 빈터 선수도 구리 선수처럼 딜탱을 잘하는 선수는 아닌데 딜탱을 들었습니다!

- 조커 선수 2세트보다 과격한 딜러를 들고 왔기 때문에 이 화력 초반에 짓누르지 않으면 감당할 수 없을 텐데요. 2세트가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됩니다!

게임을 시작하고서도 정신이 산만했다. 준이처럼 따귀를 몇 대 더 때릴 걸 그랬다고 잠깐 후회했다.

‘어쩌자고 이 시점에 흔들리지.’

4강전을 너무 쉽게 올라온 탓이려니 생각했다. 심지어 나는 열에 혼미한 상태로 경기를 치러서 기억도 없었다.

- 체크 메이트가 시야 장악 싸움에서 밀린 적이 그리 많지 않은 선수인데 이번 세트는 조금 밀리고 있는데요.

- 지금 아이템 살 돈도 털어서 시야 토템 사서 힘내고 있는데도 밀리네요.

- 이번 세트 MVP 선수들이 시야 싸움에 진심이에요. 킹도 시야 토템을 들고 있거든요. 딜러가 아이템 사기도 빡빡할 텐데 말이죠.

- 다른 팀원들이 십시일반 모아서 저렇게 다 같이 맵을 밝혀 주니 아무리 체크 메이트라고 해도 혼자서는 힘들죠.

“거기로 가면 탱커랑 힐러 마주칠 거야.”

“싸울게요.”

“…….”

준이 있다고는 하나 상대 탱커가 초반 데미지가 워낙 좋은 편이라 지금 당장은 제현보다 데미지가 잘 나올 것 같았다.

‘맞지 않고 때리면 이기긴 하잖아?’

마치 ‘죽을 만큼 때리면 죽는다.’ 같은 당연한 생각을 깊게 생각했다. 괜히 돌아서 가라 그러면 동선 낭비가 심했다.

- 조커 위치가 조금 깊은데요.

- 달링이랑 함께라서 조금 과감한 루트를 선택한 것 같은데…….

- 아, 위험한데요.

- 집에 간 척 연기하고 있던 킹이 눈치채고 이쪽으로 오고 있는데요!

- 아!!! 먼저 달려드는 조커!!!

- 힐러는 잡았지만 지금 조커랑 달링 모두 체력 상황이 좋지 않은데요!!! 이 기막힌 타이밍에 킹이, 킹이!!!

[MVP King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MVP King 님의 더블 킬]

- 아이고!!! 곡소리가 저절로 나옵니다!!!

- 조커의 초반 폭딜을 이용해 후반까지 쭉쭉 밀고 들어가야 하는데 지금 조합의 주인공인 조커가 잘렸어요!!!

- 초반치고는 너무 뼈아픈 실점입니다!

“음…….”

나도 진형이 저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이제 뭐라도 한마디씩 해 줘야 하나 싶다가도 그놈의 억제기 소리가 뇌리에 박혀서 뭘 못 하고 있었다.

그 후로 진형에게 두 번이나 더 잡힌 제현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패색이 짙게 내려앉았다.

맵은 이제 집 근처를 제외하면 완전히 암흑이었다. 함부로 나갔다가 너도나도 어디서 썰릴 줄 모르니 주요 오브젝트고 뭐고 하나도 챙길 수 없었다. 극 후반까지 끌고 가지 않는 이상 뒤집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형, 저 트릭스 게이밍에 와서 형이랑 처음으로 같이 게임을 한 날 형이 저한테 한 말이 뭔지 아세요?”

“갑자기?”

뜬금없는 타이밍에 던져진 제현의 질문이 황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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