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진형이의 필살기는 상대가 자기를 얕잡아 보게 만드는 거거든.”
“일부러 저러는 거라고요?”
제현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인상을 잔뜩 쓰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아니, 아니. 노리고 저러는 건 아닐 텐데 그냥 본능적으로? 그러는 걸 거야. 너도 MVP 경기 보지 않았어? 모르겠어?”
“특별한 것까진 모르겠던데요.”
아무리 철저하게 여러 경기 분석을 한다고 해도 직접 겪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명도 진형과 경기를 뛴 적은 있었으나 정규 경기에서 적으로 상대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KKL 시절 진형과 맞붙어 본 상대들이 입을 모아 하는 말이 있었다.
“능구렁이.”
내가 중얼거리자 동진이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맞아, 맞아. 묘하게 밀고 당기기 당하는 기분이라고 상대팀한테 욕을 꽤 많이 얻어먹었지.”
“동형, 거기 힐러 올라가요.”
“뭐야, 찬희 형 걔 조금 전까지 저랑 싸웠는데요? 집에 간 거 아닌가?”
“잠깐 보였어.”
시야 한쪽은 미니맵에 항시 머물러 있는 편이라 상대가 살짝이라도 시야 토템에 걸리면 100% 위치 확인이 가능했다.
상대 힐러 루트를 대충 예상해 보니 갈 곳이 자기들끼리 우직하게 땀 냄새 나는 전투 펼친다고 양쪽 다 피가 3분의 2가 넘게 빠진 탱커 라인밖에 없었다.
동진이 입맛을 쩝쩝 다시며 먼저 귀환하자 갈 곳을 잃은 힐러가 다시 돌아오다가 시야 토템에 걸려 미니맵에 보였다.
- 이걸 보네요!
- 0.1초 정도 보였던가요? 이걸 보고 구리 선수가 쭉 빠집니다. 정말 대단하다고밖에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 이것이 바로 나이츠 월드 시리즈 결승전의 수준. 아, 정말 감탄밖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 아직도 퍼스트 킬이 안 나왔는데요.
- 양 팀 모두 매사에 신중을 더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 말씀하시는 순간 아래쪽! 조커와 킹이 동시에 6렙을 달성하면서 조커, 조커!
- 조커의 궁극기가 킹과 카니발에게 정확히 들어갔는데요. 아……! 하지만 데미지가 부족하네요!
- 이게 지금 아이템이 하나만 더 갖춰져 있거나 체크 메이트가 레벨업만 되었어도 더블킬이 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아쉽습니다.
- 킹과 카니발이 얻어맞으면서도 체력 관리 핑퐁을 잘했다고 볼 수도 있겠죠.
“아깝네요.”
“이제 우리 사려야 해.”
제현의 궁극기가 허망하게 이득도 없이 날아간 지금, 딜러와 버퍼 궁극기를 모두 들고 있는 MVP의 턴이었다.
기회를 소진한 이상 상대방이 기회를 날리거나 우리가 기회를 다시 잡을 때까지는 웅크려야 했다.
- 생각보다…….
- 조금 루즈하게 흘러가는 것 같죠?
- 네, 화끈하게 몰아쳤던 4강전과는 달리 두 팀 다 너무 신중한 것 같은데요.
- 결승전이 주는 중압감 때문이겠죠.
서로 대치했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킬도 이렇다 할 큰 전투도 없이 20분이 흘렀다.
“이제 슬슬 싸워야 할 것 같은데…… 저쪽 버퍼 어디쯤이에요?”
“지금 한 여기쯤이라 거기 가는 데 시간은 좀 걸릴 거야.”
“그러면 1:1해도 되지 않을까요?”
상황만 보면 싸우는 게 맞는데 진형이 제현의 근처에서 맴도는 모습이 마치 꼬리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것 같아 조금 수상했다.
‘내가 뭘 놓치고 있는 것 같은데.’
“잠, 잠깐만. 한 번만 더 참자. 너 곧 아이템 하나 더 뜨니까 그러고 싸우는 게 나을 것 같아.”
“음…….”
다급하게 진입하려는 제현을 저지하자 제현이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뒤로 빠졌다.
- 아, 조커가 이제 좀 싸움을 거나 했는데 뒤로 쭉 빠집니다.
- 지금 서로 밴픽 상황이 비슷해서 더 시간이 끌려 한타 한 번에 승리와 패배가 갈리는 순간으로 가게 된다면 상대적으로 사거리가 짧은 딜러를 보유한 트릭스 게이밍이 불리할 것 같은데요.
- MVP 조용하게 뭉쳐서 혼자 남겨진 조커 쪽으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이거 안 걸릴 것 같죠?
주요 오브젝트가 나오는 타이밍이 다가오고 있었다. 급하게 제현에게 경험치와 골드를 몰아주고 정비를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그 찰나의 타이밍을 노린 MVP가 홀로 남은 제현을 에워쌌다.
- 드디어 킬이 터집니다!!! 결승전 첫 번째 킬의 주인공은 MVP의 킹!
- 이야, 이 중요한 타이밍에 딜러를 잡아내면서 오브젝트까지 이어질 것 같은데요.
- 순식간에 굴러가는 스노우볼!!!
제현의 데스를 시작으로 전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졌다. 1세트는 그렇게 역대급 지루함을 남기고 허무하게 패배했다.
- 아, 기대가 컸기에 더 그런지는 몰라도 너무 아쉽습니다.
- 트릭스 게이밍 이렇게 허무하게 질 팀이 아닌데 말이죠.
- 다시 꼼꼼하게 재정비해서 2세트부터 새롭게 해 봐야겠죠!
***
“너희 왜 그렇게 사린 거야?”
대기실에 들어서자마자 지운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기세 싸움에서 지면 진짜 싸움도 지는 거 아는 사람들이 말이야.”
“상대가 상대다 보니까…….”
준이 말끝을 흐리자 감독님이 준이의 어깨를 강하게 주물렀다.
“제일 파이팅 넘쳐야 할 너까지 그러면 어떡해. 이번에는 아예 콘셉트 잡고 가는 게 좋겠다. 무난하게 가니까 무난하게 밀려버리네.”
“찬희야, 뭐가 제일 문제냐.”
“제가 뭘 자꾸 놓치는 것 같아서 계산이 느린 것 같아요.”
내 말에 내내 뚱한 얼굴로 있던 제현이 깊게 한숨을 쉬었다.
“제 생각엔 찬희 형이 느린 게 아니라 상대가 권진형이라 생각이 많아지는 것 같아요.”
“내가?”
“네, 찬희 형뿐만이 아니에요. 권진형 하나에 저 빼고 셋 다 좀 말리고 있는 것 같거든요.”
“내가 보기에도 그래.”
동진과 준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눈을 굴리자 지운이 바로 받아쳤다.
“아무리 생각해도 King 보면 행동하기 전에 잠깐씩 움칠움칠하는 것 같아.”
“너희 셋 다 상대 닉네임 안 뜨게 설정해.”
아무래도 강력한 상대를 만나면 인 게임에 뜨는 상대 닉네임만 봐도 사리게 되다 보니 갓 데뷔한 선수들이나 쓰는 설정이었는데 오늘은 제현을 제외한 전원이 쓰게 생겼다.
“너는 안 해도 되겠어?”
“저는 킹이 뜨는 편이 전투력이 올라가서요.”
제현이 음산하게 웃었다.
“오, 잠시만요. 저 자기암시 좀 할게요. 상대는 개조빱 딜러다. 진형이 형이 아니다.”
준이 눈을 꼭 감고 자기 세뇌라도 하는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 나이츠 월드 시리즈 2세트로 돌아왔습니다.
- 네, 세트 스코어 1:0으로 MVP가 앞서가고 있습니다.
- 두 팀 다 최초로 월드 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는 팀이다 보니, 아무래도 조심스러운 게 드러난 1세트였습니다.
- 팬분들이나 저희로서는 두 팀 다 조금 더 화끈하게 나와 주면 좋겠네요!
“어차피 저쪽은 우리만큼 공격적인 픽을 꾸리진 못할 테니까 그걸 이용해야겠다.”
“동진이 딜탱 한 번 가 보자.”
아무래도 동진의 방어적인 성격상 딜탱이 그리 잘 맞는 편은 아니라 거의 봉인되었다.
하지만 나이츠의 최근 패치가 딜러 외 다른 클래스들 또한 공격적으로 가도록 유도하는 만큼 동진도 아예 손을 놓고 있지는 않았다.
최근 전적도 나쁘지 않았으니 아마 저쪽도 동진이 순탱 말고도 딜탱을 들고 올 수도 있다고 예상은 했을 것 같았다.
“게시판 난리 났겠는데.”
지난번에 딜탱을 들어서 졌을 때도 ‘삼각이들은 딜탱만 들면 지는데 딜탱을 왜 하냐?’, ‘100% 동구리 형이 원해서 하는 거 아닐 텐데 감코진들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밴픽 하는 거냐?’ 등 오만 욕으로 도배가 될 정도로 우리 팬들은 동진이 딜탱을 드는 것에 민감했다.
“이겨서 보여 줍시다.”
동진의 침울한 말에 제현이 위로하고…….
“하, 참나. 아니꼬우면 자기들이 뛰던가. 하여간 입만 산 놈들이라니까. 싹 다 모아서 2열 종대로 세운 다음에 허리케인 싸대기를 날리면서 지나가야 해.”
준이 격분한 목소리로 말하며 허공에 마구잡이로 싸대기를 날려 공기에 1데스를 적립시켜 주었다.
[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
준이 양 뺨을 손바닥으로 철썩철썩 소리 나게 쳤다. 살벌한 소리에 옆을 보니 준이 전에 없이 살벌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 봅시다.”
여태껏 봤던 준의 모습 중에 가장 결의 넘치고 진중한 모습이었다.
- 이야, 트릭스 게이밍이 이번에는 승부수를 들고나왔는데요.
- MVP의 대처가 조금 특이하죠?
- 트릭스 게이밍이 저렇게 공격적으로 죽창 조합을 들면 보통 방패 들고 드러눕고 후반을 바라보거나 같이 죽창 들고 죽창 앞에 너도 한방 나도 한방! 외치게 되기 마련인데 MVP 조합 지금 너무 무난하네요.
- 2세트 승리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지 경기 시작됩니다!
닉네임 안 보이게 설정한 것은 정말 잘한 선택이었다. 겨우 ‘MVP King’이라는 몇 글자가 안 보일 뿐인데 심적으로 한결 편안했다.
‘사람은 생각하기 나름이라니까.’
지난 세트에 그렇게 의뭉스럽게 보였던 행동들이 진형이 아니라 보통의 딜러라고 생각하면 판단이 빨랐다.
“딜러 혼자 둔 거 보니까 버퍼 집 갔다가 동형한테 갈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또? 진짜 끝없이 오는구나.”
딜탱은 순탱에 비해 데미지가 좋은 만큼 안정성은 그만큼 떨어져 초반에 죽지 않는 게 제일 중요했다.
“준, 준아, 준아!!!”
“아, 여보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준은 시작하기 전에 보여 준 진중한 모습이 무색하게 2세트 내내 하이 톤으로 소리를 지르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초반부터 허구한 날 생사의 갈림길에서 준을 부르짖는 동진과 그 소리에 준이 헐레벌떡 지원하러 가서 겨우겨우 살려 내는 장면이 계속 연출되었다.
“아, 레벨링이…….”
슬쩍 상대와의 레벨 차이를 보니 아찔해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위기 상황이 많았지만, 동진이 한 번도 죽지 않은 것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계속 준과 둘이 붙어 있으니 상대보다 성장 면에서 계속 밀렸다.
“괜찮아요.”
제현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제가 잘 컸어요.”
“야, 무슨 소리야. 황제현 너도 레벨이…….”
[TGT Joker 님이 적을 제압했습니다.]
[TGT Joker 님의 더블 킬]
지난 세트에 사리고 사리다가 한번 잘린 것이 패배로 이어진 게 많이 분했는지 시작해서 마주치자마자 진형을 아주 물고 늘어지더니 결국 상대 딜러와 버퍼를 혼자 잡아먹었다. 내 도움도 거의 받지 않은 상태였다.
“레벨이 뭐?”
“아오, 저거 얄미운 것 봐. 동형 뭐 해요. 저도 어시 떠먹여 주세요.”
제현이 짓궂게 말하자 준이 칭얼거렸다.
- 트릭스 게이밍 지금 1세트랑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인데요!
- 트릭스 게이밍의 최대 강점이자 단점이 체크 메이트 원맨 커맨더에 있지 않겠습니까?
- 맞습니다! 이 팀, 전체적인 오더를 체크 메이트가 주도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러다 보니 체크 메이트가 흔들리면 팀 전체가 흔들리거든요.
- 지금은 약간 목장에 조커를 풀어 두고 어디 한번 놀아 보라고 하는 느낌인데 이게 오히려 잘 먹히고 있습니다!
“느려.”
제현이 진형의 궁극기를 무빙으로 간단하게 피하며 낮게 읊조렸다.
역으로 회피기를 써서 진입해 진형에게 스킬을 쏟아부으며 달라붙는 모습이 쟤가 우리 팀 딜러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이거 게임 끝났네.”
“형은 제가 지금,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를 거예요.”
제현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정말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