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비 마이 트로피-91화 (91/100)

91화.

다들 찬희와 한참을 노닥거리다가 밥을 먹으러 식당에 가고 나만 찬희 곁에 남아서 죽 한 공기를 다 비우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입맛이 없는지 숟가락을 입에 물고 어제 경기를 돌려보고 있었다.

“식사 마치고 마저 보세요.”

방심한 틈에 핸드폰을 냉큼 압수하자 찬희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결승전 때도 앓아누우실 생각이 아니라면 잘 챙겨 드셔야죠.”

내 입으로 뱉어 놓고 말을 마치자마자 곧바로 후회했다. 눈에 띄게 움츠러든 찬희가 입맛이 없는 표정으로 죽을 억지로 한입 밀어 넣었다.

저 작은 머리통에 무슨 생각이 들어차고 있는지는 대충 예상이 갔다. 누구보다 화려하게 팀을 승리로 이끌어놓고 본인 몸 상태로 팀에 피해를 줬다는 생각이나 하고 있겠지.

“형.”

내가 부르는데도 그저 죽그릇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만히 기다리는 모습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했다.

“형, 저 보세요.”

나직하게 말하자 망설이던 눈동자가 겨우 올라왔다. 내내 흐렸던 갈색 눈은 열이 가셨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맑았다.

“형, 3세트 연속 MVP였어요. 마지막 세트에서 조금 과하게 불나방 같긴 했는데…….”

겨우 날 좀 보나 했더니 죽그릇에 꿀이라도 발렸는지 또 시선을 떨어뜨렸다. 숟가락으로 의미 없이 죽을 휘휘 젓는 것을 보니 먹을 생각은 전혀 없는 모양이었다. 숟가락을 뺏어다가 한 숟가락 가득 떠서 입가에 대주자 인상을 썼다.

“아, 하세요.”

한가득 뜬 보람은 없이 새 모이만큼만 입에 넣는 찬희였다. 그러나 저렇게 인상을 쓰면서도 받아먹어 준다는 것이 중요했다.

“어차피 마지막 세트도 승기는 계속 저희한테 있어서 상관없었어요. 형이 진짜 저희 버스 태워 주셨다니까요.”

“이동할 때 계속 나 안고 다녔다며…….”

“개꿀이었죠.”

“말을 말자…….”

숟가락에 남은 죽을 받아먹으며 대화를 차단해 버리는 찬희였다.

찬희는 또 내가 주접이라도 부린다고 생각하겠지만 정말 빈말이 아니었다. 찬희가 아픈 것은 싫었지만, 합법적으로 어디서나 찬희를 안아 들고 있을 수 있다는 건 내게는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 열이 올라 정신이 없으니 본능적으로 나를 감싸 안아 오는 것도 너무 황홀했다.

그때의 느낌을 곱씹고 있으려니 찬희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신 차려 보니까 결승전이라고 하니 기분이 이상해.”

“잘해 왔고, 잘하고, 앞으로도 잘하실 거니까 잔걱정 마시고 일단 지금은 한 입만 더 드세요.”

애걸복걸해가며 한 입 더 먹이기 대작전에 돌입했다. 사실 결승전 상대가 상대인지라 긴장은 내가 좀 더 해야 했다. 찬희와 함께 세계 최정상의 자리에 서고 싶은 마음이 첫 번째긴 했지만, 그 뺀질뺀질한 족제비 같은 권진형의 콧대를 주저앉혀 주고 싶은 마음도 없진 않았다.

‘하필 같은 층이라 허구한 날 얼굴 비추는 게 마음에 안 들어.’

찬희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도 적어도 세 번은 들락거리며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아 그때마다 내쫓느라 실랑이를 벌여 편두통이 다 왔다.

‘당장 결승전에서 적으로 만날 사이인데 지운이 형도 말로만 툭툭 쏘고 내쫓지는 않는 게 은근히 그 인간한테는 무르단 말이지.’

찬희가 죽을 받아먹다 말고 슬그머니 머리를 뒤로 빼기에 정신을 차렸다.

“왜 그래요?”

“너 지금 웃는 게 살벌해. 사람 한둘 처리하고 올 것 같아.”

“결승 앞두고 전투력이 오르고 있어서 그래요. 신경 쓰지 마시고 아, 하세요. 제발 한 입만 더 드세요.”

찬희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은 채로 죽을 한 입 더 입에 넣었다.

***

앓아누웠다가 컨디션을 제 상태로 돌리는 데에만 며칠을 쏟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흘렀다. 8강전 끝나고 눈감았다 뜨니 결승전 무대 위에 세워진 느낌이었다.

조명이 꺼진 무대 위에 서서 사인을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몸이 뻣뻣해지고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KKL 경기장보다 몇 배는 더 크고 관객 수도 너무 많아 어지러웠다. 제현이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 슬쩍 다가와 내 어깨 위에 제 머리를 올렸다.

“곧 시작하니까 돌아가.”

“아직 시간 남았어요.”

“그러다 한 소리 듣는다?”

“알았어요. 형, 그런데 잊어버리신 거 아니죠?”

“?”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제현이 능글맞게 웃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월드 시리즈 우승하면 소원 들어주시기로 약속해 주셨잖아요.”

아,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기억의 저편에서 다시 걸어 올라온 약속에 눈을 가늘게 뜨자 제현이 눈썹을 들어 올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짜 잊고 계셨나 보네. 어떤 거든, 뭐든지, 다 해 주신다고 하셨으면서.”

“아냐, 기억하고 있어…….”

‘기억하기 싫었을 뿐이지.’

뒷말을 애써 삼키며 속으로나마 꿍얼거렸다.

“기대하세요. 아니다, 기대는 제가 해야지. 기대할게요.”

“도대체 뭘 시키려고 그래?”

대답도 하지 않고 실실 웃음만 흘리고 자기 자리로 쏙 돌아가 버리는 모습이 귀엽긴 했으나 앞날이 걱정스러워졌다.

***

- 나이츠 월드 시리즈 파리! 파리에서 인사드립니다. 안녕하세요!

- 오늘이 바로 대망의 결승전입니다. 정말 수많은 시청자분이 왜 이 둘은 만나질 못하냐! 이러다 못 만나는 거 아니냐! 얼마나 전전긍긍했습니까!

- 네, 맞습니다! 양 팀 모두 창단 이래 최초로 월드 시리즈 우승에 도전하는 새로운 강팀들이죠! 바로 우리 자랑스러운 한국팀,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북미의 메가 빅토리 피닉스, MVP가 결승전에서 드디어 만났습니다!

- 이 두 팀의 대결 정말 궁금했거든요!!!

- 맞습니다! 결승전 주요 포인트 알아보겠습니다.

- 먼저 트릭스 게이밍! 이야, 정말 기세라는 게 무엇인지 보여 주는 팀이죠?

- 맞습니다. 만년 삼등 타이틀 여름에 확 떼어 버리고 진정한 강팀의 승승장구란 이런 것이다! 제대로 보여 준 팀이 아니겠습니까!

- 트릭스 게이밍이 이번 나이츠 월드 시리즈에서 단 한 번밖에 지지 않았다는 사실 믿어지십니까?

- 핵심 선수 안내가 나오는데요. 네, 각 팀의 딜러가 나오는군요!

- 조커와 킹! 킹과 조커!

- 이야, 이거 핵심 선수가 둘 다 한국인이다 보니까 이거 괜히 제 어깨가 상공 8만 피트 위로 가 버리는데 이거 참……!

- 하하하, 결승전 무대 위 8명 중에서 5명이 한국인!

- 조커 선수! 이 친구 정말 특별한 선수죠. 데뷔 초만 해도 야생 그 자체였는데 요즘은 원숙미까지도 보입니다.

- 팀을 위한 플레이를 아는 딜러란 귀하죠.

- 킹 선수는 작년 서머 시즌까지만 해도 KKL에서 경기를 뛴 선수라서 한국 시청자분들에게 익숙한 얼굴이실 겁니다!

- 딜러의 교과서라고 불리던 남자! MVP로 이적하자마자 3회 연속 우승으로 이끌고 월드 시리즈 결승전까지 왔습니다!

- 정말 대단하다고밖에는 말할 수 없군요. 친정팀이라고 볼 수 있는 트릭스 게이밍과 결승전에서 맞붙는다는 점이 흥미롭습니다.

- 그래서 더 기다려 왔던 빅매치가 아니겠습니까!

- 경기 시작을 기다리는 관중석에서 킹 선수의 응원 구호인 ‘For the King’과 조커 선수의 애칭인 ‘King slayer’가 계속해서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화면에서 경기장 중앙에 놓인 트로피를 360도로 돌려 가며 비췄다. 금색의 트로피가 조명에 눈부시게 빛났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다고 볼 수 있는 내 커리어의 정점이 바로 지금, 이 순간이었다. 평생 3등만 하다가 은퇴할 것 같더니 이제 한 계단만 더 오르면 세계 정상에 오르게 된다는 사실이 벅차서 내내 심장이 마라톤이라도 끝내고 온 사람처럼 쿵쾅거렸다. 핫팩을 손에 쥐고 긴장을 감추려 눈을 겨우 끔벅이고 있으려니 별안간 준이 괴성을 질렀다.

“아아악, 존나 긴장돼!!!”

“김준, 욕하면 안 된다니까.”

“죄송.”

의자에 거의 드러누워 발을 버둥거리며 소리치던 준이 동진의 말 한마디에 순식간에 진정하는 모습에 나와 제현이 동시에 고개를 돌리고 조용히 웃었다.

“너 우황청심환도 야무지게 챙겨 먹어 놓고 왜 그렇게 긴장해.”

“동형, 우리 솔직해집시다. 형도 떨리죠?”

“…….”

동진이 경건하게 눈을 감고 아주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자. 다들 너무 긴장하지 말고, 그렇다고 너무 떨지도 말자! 우리 해 왔던 대로만 하면 걱정 없어!”

지운이 박수로 집중시키더니 돌아가면서 어깨를 툭툭 털어 주었다. 크게 심호흡을 한 감독님이 중후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누구?”

“최강 삼각!”

“아, 목소리가 작아. 우리가 누구?”

“최강 삼각, 트라이앵글!!!”

말 잘 듣는 유치원생들처럼 합 맞춰서 대답하는 와중에 나는 끼어들 타이밍을 놓쳐 ‘……앵글’을 늦게나마 겨우 읊조렸다.

“파이팅!!!”

그래도 다들 가볍게 소리를 지르고 나니 텐션도 오르고 과도한 긴장은 풀어진 것 같았다. 기분 좋은 흥분감만이 팀 내에 감도는 분위기가 좋았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탱커 Guri

힐러 Darling

딜러 Joker

버퍼 Checkmate

[메가 빅토리 피닉스 / MVP]

탱커 Vintor

힐러 Lemonade

딜러 King

버퍼 Carnival

- 핵심 선수 소개는 딜러들이 나왔지만, 버퍼 매치업도 장난 아닌 편이죠?

- 부동의 랭킹 1위 체크 메이트와 나이츠 리그 초창기부터 역사를 함께하고 있는 카니발 선수!

- 최근 폼이 한껏 오른 체크 메이트를 카니발 선수가 오랜 경력으로 노련하게 맞받아칠 수 있을 것인가도 주요 포인트겠네요.

- 특히나 요즘 패치를 통해 공격적인 버퍼 활용이 높아져서 이건 뭐, 체크 메이트를 위해 판이 벌어졌다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 워낙에 피지컬이 좋은 선수고 그 파워 포텐셜을 지난 4강 경기에서 똑똑히 보여 줬죠!

[ 게임이 곧 시작됩니다. ]

“아아, 마이크 체크 원투. 아, 원 체크! 아, 투 메이트!”

“갑자기 왜 저렇게 신난 거야? 4강전은 찬희가 정신이 나가 있더니 오늘은 김준이 저 모양이네.”

동진이 한숨을 깊게 쉬자 제현이 낮게 웃었다.

“그래도 긴장 풀린 것 같아서 좋은데요.”

나만 이렇게 얼어 있나 싶어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 2:2로 대치 중인데요.

- 이게 고요해 보여도 숨 막히는 딜교가 이루어지고 있거든요.

- 한 대 덜 맞고, 더 맞는 게 지금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 e-스포츠는 기세 싸움 아니겠습니까! 자고로 역대 나이츠 1세트 승리 팀이 우승할 확률은 80퍼센트에 다다른다고 하니 말 다 했죠!

- 아, 지금은 킹이 조금 기분 나쁠 것 같은데요.

제현이 진형보다 사거리가 짧은 기사를 쓰고 있어서 불리할 만도 한데 초집중 상태인지 평소라면 맞아 줄 만한 것도 척척 피하고 오히려 앞서고 있었다.

“황제현.”

“아, 네…….”

미세한 차이지만 앞서고 있어서인지 제현이 자꾸만 치고 나가려고 하기에 마치 고삐를 쥔 마부처럼 제현을 진정시켰다.

“야, 제현아. 진형이 다른 건 몰라도 타이밍 하나는 예술적으로 잘 보니까 항상 긴장해라.”

“별로 잘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요.”

제현이 지나가듯 하는 소리에 진형을 겪어 본 나를 포함한 나머지 세 명이 동시에 픽 웃었다.

“아, 이래서 진형이 형이랑 진짜 적으로 만나기 싫었는데.”

“딱 저거지.”

준과 동진의 반응에 제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뭔데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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