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처방전은 불어로 적힌데다가 의료진이 프랑스인이라 통역을 급하게 불러서 확인해 보았지만 평범한 해열제와 감기약이었다.
그 난리 통에도 찬희는 자꾸만 벌떡벌떡 일어나려 하고 키득거리며 웃고 있었다.
‘아니 무슨 뽕이라도 맞은 사람 같은데.’
술에 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는 찬희의 옆구리에서 삑삑거리는 기계음이 들리기에 뭔가하고 봤더니 38도가 찍혀 있는 체온계였다.
숫자를 확인하더니 씩 웃으며 지운에게 체온계를 넘겨주고 비틀거리며 대기실을 나서려 하기에 일단 붙잡아 안아 들었는데 여전히 몸이 달궈진 돌 같았다.
“어디 가요.”
“내가 가긴 어딜 가, 경기…… 경기 뛰러 가야지…….”
“혀, 어, 형 지금 상태가…….”
“지운이 형……. 지운이 형이 그랬어. 39도는 안 된다고. 나 지금 38도잖아. 나 할 수 있어…… 나아 진짜아 잘할 수 있어.”
내 어깨에 머리를 잔뜩 비비적거리며 말끝이 애교가 가득 섞여 늘어졌다. 특히 나에게는 아주 듣기 좋은 말투였지만 누가 봐도 제정신인 사람의 말투는 아니었다.
***
영화의 현재 멘탈 상태가 워낙 안 좋았고 찬희 본인의 강경한 요구로 경기장에 입성은 했으나 마스크 위로 쉼 없이 눈웃음을 흘리고 있는 저 사람이 내가 알던 찬희가 맞는지 긴가민가했다.
“코치님, 전에 찬희 형 39도, 40도 막 이러고 경기 뛴 날은 안 저렇지 않았어요?”
“어, 어. 경기중엔 누가 보면 꾀병인 줄 알았을 정도로 멀쩡했었지. 야, 야 좀 놔라.”
지운이 찬희의 이마에 쿨패치를 새로 붙여 주며 대답했다. 지운의 손이 차가워서 기분이 좋은지 손바닥을 붙잡고는 놓아주질 않는 모습에 이성의 끈이 끊길락말락 했다.
‘아냐, 정신 차리자. 황제현, 너 지금 여기서 지면 죽도 밥도 안된다.’
권진형이 있는 MVP가 W게이밍을 3:1로 잡고 이미 결승전에 올라가 있는 지금, 우리가 4강 탈락을 해 버리면 1년을 뒷맛 찝찝하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스스로 뺨을 쳐 정신을 차렸다.
- 네! 나이츠 월드 시리즈 파리,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과 KJ 스노우의 4강전 2세트 경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우리 한국 시청자분들에게는 너무 익숙한 구도지만 KKL 아닙니다! 나이츠 월드 시리즈입니다!
- 1세트는 좀 일방적인 경기가 나왔는데요. 그래서 트릭스 게이밍에서 선수 교체가 있습니다.
[트릭스 게이밍 트라이앵글]
탱커 Guri
힐러 Darling
딜러 Joker
버퍼 Checkmate (IN) / Vold (OUT)
[KJ 스노우]
탱커 Manday
힐러 Holymoly
딜러 Fanta
버퍼 Doki
- 네, 그분이 돌아왔습니다! 체크메이트!
- 저번 세트 이 선수의 빈자리가 정말 크게 느껴졌었거든요!
- 몸이 조금 안 좋다고 들었는데 기분은 상당히 좋아 보이는데요.
- 하하, 아쉽게도 전 세트 승리 우승은 물 건너갔지만, 우승의 길은 아직 두 팀 모두에게 열려 있습니다!
- 네, 아직 2세트 아니겠습니까! 경기 시작되었습니다!
지난 패배에 이어 찬희의 상태가 평소 같지 않은 탓에 찬희를 제외한 모든 팀원이 바짝 긴장한 상태였다. 쥐 죽은 듯 고요한 와중에 헤드폰에서는 찬희의 옅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형, 진짜 괜찮아요?”
대답 대신 기침 소리와 함께 경고핑이 연달아 날아왔다.
‘이거 옛날 생각나네.’
경고핑이 찍히자마자 슬쩍 후퇴하자 아니나 다를까 적 딜러가 버퍼와 힐러를 달고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경기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할 수 없는 시점이었다. 미리 거리를 벌리지 않았다면 아무리 용을 써도 죽었을 터였다.
짧게 감탄하고 있는 찰나, 동시에 상대 탱커와 평화롭게 대치하고 있던 동진 쪽에 가고 있다는 핑이 마구 찍히더니 찬희가 뛰어들어 탱커를 말 그대로 두들겨 패기 시작했다.
동진이 당황해서 엉겁결에 회피기까지 쓰며 달려가 합세하자 초반이라 아이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탱커는 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 체크메이트의 깔끔한 퍼스트 킬!!! 이야, 이 시점에 조커를 혼자 두고 맨데이를 찌르는 이 판단!
- 초반에 조커를 찌른 KJ 스노우의 판단도 정말 날카로워서 이번 세트 퍼스트 킬은 KJ 스노우가 가져가려나 했거든요. 그런데 역시 명불허전 체크메이트!
- 세 명이나 몰려오는데 딜러를 버리고 킬 사냥을 나서는 버퍼라니!
- 이쪽 딜러는 조커거든요! 믿을 만하니까 과감하게 갈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 조금 억지로 잡긴 했는데 이 시점에 2:1이면 얻어맞다 보면 아무리 탱커라도 녹거든요.
- 말씀하시는 순간 라이브 화면에서 어? 어어?
“찬희 형 진짜 미쳤나 봐.”
준이 자기도 모르게 한 혼잣말에 평소 같았으면 형한테 그게 할 소리냐고 한 소리 했을 동진도 이번에는 아무 말이 없었다.
물론 나도 내 쪽에 화려하게 찍히는 핑에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힐러부터 자를 거야.”
“예?”
“힐러.”
- 교전을 치른 후라 지금 체크메이트는 회피기도 없고 피도 반 정도 닳아 있는 상태인데요.
- 아니 이 상태로 바로 상대 뒤를 파고든다고요?
모인 것은 이쪽인데 데스가 나 버린 것도 이쪽이라 그 손해를 메꾸기 위해 억지로라도 나를 잡으려고 으르렁거리고 있던 적팀들 뒤로 찬희가 뚜벅뚜벅 걸어와 정확히 힐러에게 스킬을 쏟아부었다.
- 홀리몰리 아웃! 이어서 도키도 잡히면서 체크메이트 트리플 킬!!! 판타만 겨우 빠져나옵니다!
- 아니, 지금 궁극기도 안 나온 초반인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 지금 짧은 순간에 체크메이트와 조커의 스킬 적중률이 장난 아니었는데요? 아니, 이게 완전체 트릭스 게이밍의 힘?
- KJ 스노우 지금 1세트 때의 모습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요!!! 정신없이 두들겨 맞기 바쁩니다!!!
적팀도 두들겨 맞고, 죽고, 도망가느라 정신없었을 테지만 지금 가장 정신없는 건 바로 나였다.
트리플 킬을 배불리 먹은 상태로 귀환하는 찬희와 내 피 상태를 보니 둘 다 한두 대 맞으면 바로 죽을 것 같이 빈사 상태였다.
“방금 스킬 하나라도 빗나갔으면 우리가 쓸려 나갔을 거예요…….”
“안 빗나가. 왜 빗나가?”
한없이 해맑게 되물으니 할 말이 없었다.
‘형은 안 빗나가겠죠. 형은……!’
그저 속으로 소리 없이 원성을 낼 뿐이었다. 보통 내가 저렇게 마구잡이로 들이대고 난리를 치면 찬희가 적절하게 통제해 주는 편인데 지금은 오히려 반대로 내 목줄 잡고 있어야 할 양반이 더 날뛰고 있으니 당황스러웠다.
- 체크메이트가 모든 킬을 쓸어 담으며 공격력 아이템을 쭉쭉 뽑아냅니다!
- 최근 버퍼의 신규 아이템 패치로 예전처럼 수동적인 지원보다는 공격적인 포지셔닝이 가능해지긴 했거든요!!!
- 누가 노잼 버퍼래! Yes 유잼! 이게 버퍼다!!!
[나이츠 KKL 게시판] 쳌메 미친 거 아니냐?
17/0/3 이게 어떻게 버퍼 K/D/A냐?
이게 매운맛 국산 버퍼 클라스?
댓글 294개
ㅁㅁ : 팀원들한테 어시도 안 주고 그냥 싹싹 다 긁어먹고 다님 진짜 도른자ㅋㅋㅋㅋ
ㅇㅇ : 얘 여태 버퍼 어떻게 한 거냐? 트릭스 게이밍 이런 애를 여태 딜러로 안 쓰고 버퍼를 시켰다고? 이 무슨 국가적 손해;
ㄷㄷ : 쳌메피셜 발언 => 버퍼가 재미없는 게 아니라 너희가 재미없게 하는 것
└ ㅋㅋ : 쳌메피셜 발언2 => 너무 쉬운 건 재미 없어
└└ ㅇㅇ : 캐릭터 존나 확고하넼ㅋㅋㅋ
[나이츠 KKL 게시판] 스피릿 게임즈 : 버퍼 상향하겠습니다!
체크메이트 : ㅇㅋ ㄱㅅ
2세트 17/0/3
3세트 15/0/6
4세트 23/2/2
삼각이들 나월 결승 진출;
댓글 306개
ㅂㅂ : KKL 아님; 나월 조별리그도 아니고 4강에서 갑자기 급발진 지림;;
ㅅㅅ : 심지어 아픈 상태였다고;; 경기 끝나자마자 인간 들것(조커)에 실려 나감
└ㅋㅋ : 이게 사람 새낀가ㅋㅋㅋ
ㄷㄷ : 인간의 레벨이 아니야; 인간의 범주로는 쳌메 당신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이츠 KKL 게시판] 이거 맞아?
(얼굴 꽃받침하고 눈웃음 흘리는 체크메이트 gif)
혼자 겜 터트리고 웃는 남자;
시발 남잔데 설렜어;
댓글 1037개
ㅊㅊ : 쳌메 날 책임져ㅅㅂ
ㅇㅇ : 누가 마스크 좀 벗겨봐; 저거 쳌메 아닐지도 몰라;
└ㅌㅌ : ㄹㅇㅋㅋ
ㄱㄱ : 쳌메 형 저랑도 듀오 해요 저 받아먹는 거 잘해요
└Joker✔ : ㄴㄴ 내가 제일 잘함
└└ㅊㅊ : ㅁㅊ 혼모노 떴어
└└ㅈㅈ : 형이 왜 여기서 나와?
└└ㄷㄷ : 누가 쳌메처돌이 아니랄까 봐 ㅅㅂㅋㅋㅋㅋㅋ
***
폭풍이 한차례 지나간 것 같았다. 시종일관 웃으며 미친놈처럼 온 맵을 종횡무진으로 움직이던 모습이 떠올라 기분 좋은 소름이 끼쳤다.
맵을 넓게 보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렇게 제멋대로 쏘다니는 것을 보니 정말 사람의 레벨이 아니었다. 여태 찬희가 얼마나 팀원을 배려하는 플레이를 하고 있었다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불도저처럼 게임을 밀어버리더니 4세트 [승리] 표시가 뜨자마자 무슨 컴퓨터 전원 꺼 버린 것처럼 키보드에 머리를 박으며 절전모드가 되었던 찬희였다.
‘그렇게 방실방실 웃더니.’
작은 입도 야무지게 다문 채 단정한 모습으로 잠들어 있는 찬희를 보고 있으니 오늘 일이 더 꿈같이 느껴졌다.
찬희는 보통 카메라가 다가오면 어색하게 굳어 버려서 화면발 잘 안 받기로 유명한데 오늘은 카메라가 오든 말든 신경을 하나도 안 쓰고 마냥 헤실거리고 있으니 그야말로 ‘올 타임 레전드’였다.
마스크를 써서 얼굴의 절반 이상이 가려져 있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나이츠 게시판의 폭발적인 반응을 보자면 가려서 다행일지도 몰랐다.
‘다른 사람도 보여 주기엔 아깝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방긋 웃던 모습을 생각하며 혼자 고개를 끄덕거리며 생각했다.
그러고도 한참을 나이츠 게시판을 돌아다니며 오늘 경기중에 찍힌 찬희의 스크린 샷, gif, 동영상 가리지 않고 다운받는데 곳간이 풍족해진 사람처럼 흐뭇한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응…….”
꼬박 20시간을 한번을 깨지도 않고 잠만 자던 찬희는 열이 완전히 떨어지고 나서야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4강전에 대한 기억이 전혀 나지 않는다고 해 모두를 충격에 빠뜨렸다.
“형, 그럼 이거 다시 못해요? 컨트롤 개 지렸는데.”
준이 어제 입이 마르고 닳도록 천재라고 감탄하던 장면을 보여 주자 찬희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미친놈인가……?”
찬희는 영상 속에 본인의 닉네임이 버젓하게 쓰여 있음에도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얼굴로 보더니 결국 나지막하게 욕까지 날렸다.
“그렇죠. 형이 봐도 진짜 미친놈이죠.”
“김준, 쓰읍.”
“아, 동형! 저거 보고 미친놈 소리가 안 나오면 나이츠 유저가 아니라고요.”
어느 정도 김준의 말에 동의하는지 준에게 경고하던 동진이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슬쩍 끄덕였다.
“저게 돼……?”
본인이 해 놓고 어떻게 저게 가능하냐는 혼란스러운 얼굴이 너무 귀여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